임진왜란의 의병(義兵) 김헌(金憲)
사람에게 보존되어 있는 것 가운데 충의(忠義)보다 큰 것은 없다. 명예가 한 시대에 드높고 훌륭한 이름이 백대 동안 전해지는 것을 어찌 사람마다 스스로 힘쓰고 즐겁게 실천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라가 어지러운 때를 당하여 만일 혹 고상하게 처신하고 은둔하는 뜻을 기른다면, 그 몸을 욕되지 않게 하여 성명(性命)을 보전하고 이런 명성을 오롯하게 누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작은 이해(利害)에 속박되어 제대로 처신할 수 있는 자는 매우 적다. 하물며 의리만 알고 제 몸을 돌보지 않으며 미소를 머금고 의연하게 흰 칼날을 밟으면서 한번 죽음으로써 지조를 지키는 자에게 있어서이겠는가? 아, 그 지극한 어려움이여!
그렇지만 전투가 벌어졌을 때 아군의 북소리가 이미 잦아들고 적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지는데 비분강개한 심정이 가슴에 가득 차올라 어쩔 도리가 없으면, 차라리 맨주먹을 쥐고 적에게 달려들어 죽는 행동은 지극히 어리석고 용렬한 남자가 아니라면 오히려 할 수 있는 일이다. 또 만약 나라의 세신(世臣)이 되어 몸은 높은 관직에 있고 현재 직사(職司)를 담당하고 있는데 마침 화란(禍亂)을 만나게 된다면, 개나 돼지의 심보를 가진 자가 아니라면 모두 그렇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평소 고금(古今)을 살펴보아도 겨우 몇 사람밖에 찾을 수 없으니, 진실로 제대로 죽기란 어려운 일이다.
만약 초야에 아주 미천하여 평생토록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충의가 충만한 간담(肝膽)이 천성에서 타고나 임금에게 폐백을 바치기도 전에 스스로 맹세하고 목이 잘려 죽는 것을 마치 집에 돌아가듯 편안히 여기는 경우가 있다면, 천 년 백 년 동안에 몇 사람이나 있겠는가?
지금 쓰고 있는 절사(節士) 김공전(金公傳)의 김공이 바로 그 사람이다. 아, 장하도다. 그렇지만 그의 전(傳)을 읽으니, 또 슬퍼할 만하구나. 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김공의 휘는 헌(憲)이고, 자는 희도(希度)이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다. 7대조 휘 성옥(成玉)이 처음 족보에 보이는데 관직은 대사성(大司成)이다. 증조는 휘 여원(麗源)이며, 진사이다. 할아버지는 휘 협(浹)으로, 승문원 교리(承文院校理)를 지냈고 판교(判校)에 추증되었다. 아버지는 휘 광진(光震)으로, 음직으로 주부(主簿)를 지냈고 참의(參議)에 추증되었다. 어머니는 영광 김씨(靈光金氏)로, 김귀수(金龜壽)의 딸이며, 관찰사 김필(金㻶)의 현손이고, 헌납(獻納)을 지낸 김괴(金塊)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신유년(1561, 명종16) 2월 16일에 장흥 행원촌(杏園村)에서 공이 태어났다. 공은 태어났을 때 용모가 크고 우람하였으며, 지기(志氣)가 남보다 탁월하였고, 힘도 남다르게 뛰어났다. 집안에 시례(詩禮)의 가르침이 대대로 전해졌고, 문필(文筆)을 익혔지만 항상 강개하여 사소한 일에 얽매이지 않는 뜻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 선생(趙先生 조헌(趙憲))이 남쪽으로 유람을 왔을 때 공이 뵌 적이 있었는데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공은 선생의 담론을 들은 이후로 항상 애통한 근심이 있는 것 같았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이르러 황윤길(黃允吉) 등이 일본에 갔다가 돌아오자 조정을 비롯한 전국이 모두 흉흉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과연 중봉의 말씀과 같구나. 남아(男兒)가 활쏘기와 말타기의 무예를 익히지 않는다면 임금을 위하여 적을 물리치는 의리를 펼칠 수 없다.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때 활을 매다는 것은 사방을 경영하라는 뜻이 있는 것이니, 문필을 익힐 때가 아니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무예를 익혔다.
신묘년(1591) 겨울, 무과에 급제하였다. 다음 해 여름, 과연 왜구가 쳐들어왔고 호남과 영남에서 창의(倡義) 격문이 번갈아 빗발쳤다. 공이 눈물을 훔치며 팔을 걷어붙이고 말하기를 “지금이야말로 내가 목숨을 바칠 때이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중봉 선생이 유배에서 풀려나 옥천(沃川)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공이 선생을 따르고자 말에 올라타고 내달렸는데, 바로 7월 초순이었다. 장옥(丈玉)과 귀생(貴生) 두 하인이 공을 따라갔다. 당시 완주(完州)와 금산(錦山)의 경계에 적병의 기세가 한창 대단했는데, 공은 적의 칼날을 무릅쓰고 곧장 나아가 반드시 혼자 대적하고자 하였다.
7월 4일에 적병이 대대적으로 웅현(熊峴)을 넘어왔다. 공이 갑작스럽게 맞닥뜨렸는데도 곧바로 활시위를 팽팽히 조이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아갔다. 공이 아군 진(陣)에 당도하기도 전에 김제(金堤)와 나주(羅州)의 진이 일시에 궤멸되었고, 적병이 사방에서 돌진해 왔다. 공이 부득이 발길을 돌려 만마동(萬馬洞)을 경유하여 안전한 길을 선택해 가다가, 마침 조 선생의 의병을 일으키는 격문을 얻고는 매우 기뻐서 분연히 떨쳐 일어나 말을 달려 공주(公州)로 향해 갔다.
장옥은 이때부터 공을 따라갈 수 없어 험한 길을 뚫고 고생스럽게 집에 당도하여 울면서 그 사연을 고하였다. 집안사람이 상세한 사정을 따져 묻고, 또 주인 놓친 것을 꾸짖었다. 그런데 홀연히 공이 공중에 서서 큰소리로 “말아, 말아.”라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 온 집안사람이 깜짝 놀라서 나가 보았더니, 공이 타던 말이 슬프게 울며 들어왔다. 그런데 상처를 싸맸던, 구겨지고 찢어진 전포(戰袍)가 흥건히 피가 묻은 채로 말라붙어 안장 위에 놓여 있었다. 장옥이 말을 보고 부르자 말이 달아났고,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비로소 공이 전몰(戰歿)하여 유의(遺衣)로써 알렸다는 점을 알고, 행원촌 뒤편 자오(子午 정남향)의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 후 귀생이 살아 돌아와 공이 순절한 일의 전말을 상세하게 말해 주었다. 귀생이 말하기를 “8월 18일에 조 대장(趙大將)을 따르다가 금산 지역에서 적과 맞닥뜨렸는데, 적병이 덮쳐 죽이려고 하자 공이 갑자기 저에게 말고삐를 놓으라고 명하더니, 여러 사람과 함께 말을 채찍질하며 적진으로 들어갔습니다. 다만 제가 본 것이라고는 하늘을 뒤흔든 비명 소리와 시체가 쌓여 언덕을 이룬 모습뿐이었습니다. 소인은 다행히 목숨을 부지하여 공의 시신을 찾으려고 했지만, 제 힘으로는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라고 하더니, 울다가 기절하여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 후 갑자년(1624, 인조2), 귀생이 50여 세에 구성(龜城)의 중군소(中軍所)에서 공의 조카인 효신(孝信)을 따랐는데, 역적 이괄(李适)이 변란을 일으키자 효신은 창의(倡義)하여 임금의 군대에 귀순하려고 하였다. 역적 강작(康綽)이 이를 알아채고 기습하여 효신의 목을 베려고 하였으나 죽이지 못하였다. 효신이 칼을 빼어 들고 강작을 반격하자 강작이 도망하였다. 귀생은 효신이 강작을 쫓아가 베는 것을 도왔고, 급히 옷을 찢어 칼에 베인 효신의 상처를 감싸 묶고 장막으로 돌아왔으니, 귀생은 진정 충정어린 사내종이다. 금산 전투에서 귀생은 분명 주인을 버리고 혼자 살아 돌아온 자가 아닐 것이다. 결국 살아 돌아와 진중(陣中)에서 있던 일을 말해 주었으니, 어찌 이 또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공은 오성 정씨(筽城丁氏)에게 장가들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목사(牧使) 정경달(丁景達)로, 그가 쓴 《난중일기》가 있다. 일기의 한 대목에 “7월 8일에 봉사(奉事) 김랑(金郞)이 중봉의 의병을 따라 금산에서 전사하였는데 시신을 찾지 못하였고, 귀생이 살아 돌아와서 정황을 전했다. 애통하고 애통하다.”라는 기록이 있다. 아, 공은 바닷가의 한 무인(武人)이다. 온 나라가 난리를 만나 흩어져 숨는 때에 승냥이와 이리 같은 적과 맞서 싸웠다. 공이 지난날 조여식(趙汝式 조헌(趙憲)) 선생을 찾아뵈었던 일을 당시 선생을 미치광이라고 지목했던 사대부들과 비교하면 과연 어떠한가?
가령 당시 묘당(廟堂)에 공과 같이 식견 있는 사람이 십여 명이라도 있었다면, 어찌 중봉 선생이 나라를 걱정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흘린 눈물을 석양 녘 유배지에서 헛되이 닦게 했겠는가? 어찌 큰 돼지와 구렁이가 우리 서울까지 먹어 들어와 우리 칠묘(七廟)를 잿더미로 만들게 했겠는가?
공의 이런 행동이야말로 이미 사람으로 하여금 천년 뒤에도 무릎을 치며 공경하게 한다. 공의 뼈가 칠백의총(七百義塚) 가운데 있으니, 그 절의(節義)에 대해서는 다시 세세히 말할 필요가 없지만 슬퍼할 만한 점이 있다. 예부터 의롭게 순절한 사람이 어찌 죽은 후에 이름을 남기려고 한 적이 있었는가. 그러나 작은 신의를 지키려고 스스로 도랑에서 목매어 죽는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다. 성인이 도랑에서 목매어 죽는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 스스로 제대로 죽을 자리를 몰랐기 때문이다.
만약 의연하게 알아줄 만한 죽음을 이루었는데, 살았던 당시에도 매몰되고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적막하다면, 몰랐던 책임은 살아 있는 우리에게 있지 공에게 있지 않다. 만약 성인이 김공의 죽음에 대해 들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겠는가. 임진왜란 8년간의 난리 중에 절의(節義)로써 정려(旌閭)와 증직(贈職)을 내린 것이 계속 이어졌지만, 한 명의 왜놈이라도 진정 베거나 쏜 사람들은 대다수가 일반 백성이었다. 다만 의로운 마음 하나로 서로 분발하고, 몽둥이와 장대로 만든 깃발을 들고 분연히 제 몸을 돌보지 않고, 거친 산과 들, 그리고 물가에서 피를 흘린 자들이 몇백, 몇천 명인지 알 수가 없으니, 성명을 누가 다 기록하고 굶주린 혼백을 누가 제사 지내겠는가? 그들의 죽음은 본래 작은 신의를 지키려는 헛된 죽음이 아니었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죽음으로 귀결된 점에 있어서는 마찬가지이니, 아, 슬프도다!
공에게는 자식이 하나 있었는데, 전란 후에 고아가 되어 집안이 한미해졌고, 또 공이 생전에 드러난 관직을 지낸 적도 없어 죽어서도 알아주지 않으니, 세상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그러나 공의 집안사람들이 알아주고 공의 고을 사람들도 알아주니, 공의 죽음은 진실로 애당초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금산에 있는 높이 4자(尺)의 비석이 우주를 지탱하고, 굳세고 빛나는 이름과 공적이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는데, 오직 공의 이름만이 적막하다. 이것으로써 남이 알아주지 않는 죽음이라고 해도 맞는 말일 것이다.
그렇지만 공이 여기 칠백의총에 있으니, 중봉 선생은 알아줄 것이고 7백 명의 동지들도 알아줄 것이니, 그늘진 달빛 비추는 밤과 비바람 부는 낮에 분명 서로 더불어 한가로이 노닐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느냐의 여부에 대해 공이 또 무슨 유감을 갖겠는가?
공이 죽을 때 공의 아들은 목숨을 보전했는데, 태어난 지 겨우 2세였다. 다행히 하늘이 재앙을 내린 것을 후회했는지 잘 성장하였고, 정묘호란 때 출신(出身)으로서 강화도로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으며, 그 공로로 곧장 6품의 자급(資級)에 오르게 되어 사과(司果)에 임명되었다. 그 후 병자년(1636, 인조14)에 안공 방준(安公邦俊)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의 걸출한 재주와 임금에게 목숨을 바치는 정성이 공과 매우 닮았다. 공의 조카 효신(孝信) 역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창의(倡義)하였으니, 김씨 집안의 충의는 선조의 모범을 따라 끊이지 않았다고 할 만하다. 공이 또 무엇을 슬퍼하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이미 그의 충의를 알고 있기에 슬픈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의 충의를 끝내 알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대략 서술하여 전(傳)을 지어 당세의 청운지사(靑雲之士)에게 알린다.
<역자 註>
1. 목사(牧使) 정경달(丁景達) : 정경달(丁景達)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영광(靈光)이고, 자는 이회(而晦)이며, 호는 반곡(盤谷)이다. 1570년(선조3)에 식년 문과에 급제했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산 군수로서 의병을 모으고 금오산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였다. 1594년에 당시 수군통제사 이순신의 계청(啓請)으로 그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그는 임진왜란 발발 당시부터 《난중일기》를 썼는데, 이순신이 주로 해전 상황을 쓴 데 반해 그의 일기에는 내륙 사정도 함께 기술되어 있다.
2. 안공 방준(安公邦俊) : 안방준(安邦俊, 1537~1654)으로, 본관은 죽산(竹山)이고, 자는 사언(士彦)이며, 호는 은봉(隱峰)ㆍ우산(牛山)이다. 임진왜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
3. 청운지사(靑雲之士) : 《사기》 권61 〈백이열전(伯夷列傳)〉에 “백이와 숙제가 비록 현인이었지만 공자의 찬양을 얻고부터 그들의 명성이 더욱 드러났다.(중략) 청운지사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의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의도 김공전(義徒金公傳)',「존재집(存齋集) 제23권/ 잡저(雜著)-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이주형 채현경 (공역) ┃ 2013
※옮긴이 註: 임지왜란 당시 의병대장으로 순국한 조헌(趙憲, 1544~1592)선생은 23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41세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후학을 양성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승병장 가허 영규대사의 승병들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한 뒤, 금산전투에서 순국했다. 이때 의병대장 조헌 휘하의 의병으로 참전하여 함께 순국한 이가 바로 김헌선생(33세)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이렇게 나와 있다. 요약하면, "금산전투에서 순국한 3일 뒤인 8월22일 조헌의 제자들이 의병의 시체를 모아서 큰 무덤을 만들고 '칠백의총'이라 하였다. 오늘 날 금산의 '700 의총'이다. "선조 36년(1603) 이곳에 제자들이 조헌 선생 순절비를 세웠다. 1647년 호남 ·호서의 유림들도 고경명 부대가 순절한 금산 양전리 눈벌에 선생의 사당을 건립하고 칠백의사의 위패를 모셨다. 이에 1663년 나라에서 종용사(從容祠)라는 사액과 토지를 내렸다. 종용사에는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칠백의사 이외에 이보다 먼저 눈벌싸움에서 순국한 의병장 고경명(6000여 의병), 그리고 횡당촌 싸움에서 순절한 온양군수 변응정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은 종용사를 헐고 순의비도 폭파해 버렸다. 해방후인 1952년 군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의총과 종용사를 다시 지었다. 1963년 정부는 700의총을 사적 제105호로 지정하고, 매년 9월23일 제향하고 있다. 1970년에 묘역을 확장하고, 1976년에는 기념관도 신축했다. 칠백의사의 정신은 조국수호(祖國守護) 신의단결(信義團結) 학행일치(學行一致)로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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