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좋아해야 할 것을 좋아한다

사람의 마음에 유난히 즐기고 혹심하게 좋아하는 것을 벽(癖)이라고 한다. 벽(癖)은 병이란 의미인가?


벽(癖)을 입 밖에 꺼내는 순간 벌써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從吾所好, 원래 문장은 공자가 “부를 구해서 이룰 수 있다면, 말을 끄는 마부라도 내가 또한 하겠다. 그러나 만일 구하여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즉 내가 좋아하는 바는 의리에 따라 떳떳하게 사는 것이라는 의미〕’라고 하는 정도(正道)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벽은 보통 사람의 편벽됨일 뿐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땅히 좋아해야 할 것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 깊어질수록 아름다워지므로 벽(癖)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좋아해서 안 되는 것을 좋아하면, 좋아하는 것이 깊어질수록 병이 되니 이것을 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성현이 좋아하는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만 언제 벽(癖)이란 것이 있었겠습니까? 오직 기운에 치우친 바가 있고 마음에 정해진 바가 없어, 한번 외물에 유혹되어 함께 변하게 되면 도리어 한결같이 빠져들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합니다. 이즈음에 다른 사람이 벽이라고 지목하면 자신 또한 그 이름을 사양할 수가 없게 되니, 그렇다면 이른바 ‘벽(癖)’은 군자가 말하고 싶지 않은 것에 가깝습니다.


이 때문에 학문을 좋아하는 것이 아무리 심하더라도 ‘학벽(學癖)’이라는 말은 없고, 도를 믿는 것이 아무리 독실해도 ‘도벽(道癖)’이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의리가 내 마음에 즐거운 것이 고기가 내 입에 즐거운 것과 같다.〔理義之悅於心 猶芻?之悅於口〕’라고 하였으니, 즐기는 것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벽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남의 어짊을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꾼다.(易色, "여색을 좋아하는 마음은 당연한 남자의 본능이지만, 어진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기꺼이 바꾼다"라는 뜻)’라고 하였으니, 좋아하는 것이 혹심하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벽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마땅히 좋아해야 할 것을 좋아하면 벽이라고 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뭇사람 가운데 사물에 벽(癖)이 있는 자는, 그가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을 뭇사람이 꼭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 좋아하며, 남들이 꼭 즐기는 것이 아니고 자신만 즐길 뿐입니다. 지독하게 좋아하여 스스로 그만두지 못하고 심하게 빠져 남의 지적에 아랑곳 않는 것은 바둑 두는 자나 여색에 빠진 자가 스스로 패가망신하는 데에 이르도록 깨닫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좋아해서는 안 되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벽(癖)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 〈양춘백설(陽春白雪)〉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곡이지만 한나라 순제(順帝)는 산새소리를 들었고, 봄 난초와 가을 국화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향기이지만 해변의 사람은 지독한 비린내가 나는 어부를 좋아합니다. 앞에 든 두 사람은 본성을 억지로 바꾸어 일부러 세상을 놀라게 하는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치우친 중에서도 더욱 치우쳐 이런 지경에 이르도록 자신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이 남들과 다르기 때문에 호사가(好事家)들이 천고의 기이한 일이라고 전하니, 천하 사람들이 웃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물에 벽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정말로 지극한 것이 아닐진대, 좋아하는 가운데에 또 그 좋아함을 삼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두 사람의 벽(癖)은 세상에서 거론하는 수천수만 가지 벽에 견주어 볼 때 그중에서도 정말로 이상하고 해괴한 것이기는 하지만, 군자의 관점으로 보면 벽이기는 매일반입니다. 저것이 이것보다 아무리 낫다고 한들, 어찌 오십 보 도망간 사람으로서 백 보 도망간 사람을 비웃을 수 있겠습니까?


벽(癖)은 단서가 다 똑같지 않아, 스스로 고상한 취향에 가탁해서 좋아하는 경우가 있고, 호방한 성정을 뽐내려고 좋아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듣고 모두 칭송하고 부러워하여, 휩쓸리듯 부허(浮虛)하고 궤기(詭奇)한 곳으로 다투어 달려갑니다. 


그러나 마땅히 좋아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도리어 평범하고 진부하여 좋아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여기니, 폐단이 마침내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새소리를 듣고 비린내를 좋아하는 것이 그나마 제 본성대로 살아서 훗날의 폐단이 없는 것만 도리어 못합니다. 사물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자가 좋아하는 것이 다르다는 이유로 갑자기 ‘외물에 부림을 당하기 마련’이라는 경계를 스스로 망각해서야 되겠습니까? 


옛날에 사상채(謝上蔡)가 역사서를 통째로 줄줄 외자 백정자(伯程子)가 ‘그것은 완물상지(玩物喪志)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서를 통째로 줄줄 외우는 것은 배우는 자의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선생의 경계가 이처럼 준엄했던 것은 진실로 그 뜻이 치우칠까 염려해서였습니다. 하물며 벽으로 흐른 것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뭇사람들이 한 가지 사물을 병적으로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한탄스럽게 생각하여, 매양 옛 성현들이 좋아하고 즐거워한 것이 무엇인지 찾고자 하였지만 찾을 수 없었습니다. 또 오래전부터 마땅히 좋아해야 할 것을 좋아하는 당세의 군자와 토론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 집사께서 이것을 가지고 질문해 주시니, 짐짓 저를 시험하여 저의 의중을 살피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삼가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윤기(尹愭 1741~1826), '미치도록 좋아하는 병(癖)',『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8책/ 책(冊)』-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규필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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