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설(諂說):아첨에 대하여

아첨이란 남을 기쁘게 해 주어 자기를 이롭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하가 임금에게 아첨하는 것은 임금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이고, 천한 자가 귀한 자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에게 도움을 받고자 해서이며,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아첨하는 것은 그의 부유함에 의지하고자 해서이다. 이는 모두 아래에서 위에 붙고,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구하는 것이다. 만일 정직하고 방정하여 이욕(利欲)을 초월한 사람이 아니면 상정(常情)으로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은 이로움을 꾀하고 환난을 면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이한 것은, 남의 아첨을 좋아하며 진정 자신을 사랑한다고 여기고, 남의 직언을 싫어하며 필시 자신을 소원하게 대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남이 높여 주는 말을 해주면 스스로 잘난 체하고, 남이 칭찬하는 모습을 지으면 스스로 현명하다고 여기며, 그른 일인데도 아첨하여 옳다고 하면 여론이 그르다고 하는 줄 모르고, 나쁜 물건인데도 아첨하여 좋다고 하면 공정한 안목이 나쁘다고 하는 줄도 모른다.


자기의 현지(賢智, 영리하고 지혜로움, 똑똑함)와 문무(文武 학문과 무예)가 남이 면전에서 칭찬해 주기를 기다릴 일이 아닌데도 아첨해 주기만 하면 기뻐하고, 자손의 수부(壽富 수명이 길고 부귀함)와 존영(尊榮 지위가 높고 영화로움)이 어찌 남의 칭송을 받을 정도가 되랴마는 아첨해 주기만 하면 기뻐한다. 남이 우롱하고 놀리는 것에도 껄껄 웃으며 받아들이고, 더 나아가 가까이 여겨 사랑하고 귀하게 대하여 어울리며, 일마다 돕고 제 몸으로 보호해 준다. 아첨하는 사람의 계책으로는 참으로 이롭다 할 것이지만, 빈말을 좋아하여 제 몸을 잊는 자를 우매하다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어린아이는 지식이 없어서, 똑똑하다고 하면 좋아하고 밉다고 하면 성을 낸다. 이 때문에 어린아이를 어를 때에 일부러 귀여워하는 모양을 짓고 칭찬하는 말을 자주 해주면, 어린아이는 해맑게 웃고 좋아하면서 제가 몹시 좋아하던 물건이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건네준다. 나는 남의 아첨을 받았던 자들이란 도리어 어린아이의 소견만도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희생을 대신해 도마에 누운 염조은(閻朝隱)을 비루하게 여겼으나, 사실은 자기를 사랑한다고 여기지 않은 것이 아니었고, 이헌(李憲)*이 팽손(彭孫)을 밟고 ‘네놈이 아첨이 너무 심하구나’라고 꾸짖었으나, 그의 마음은 이로 인해 더욱 그를 친애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아첨을 기뻐하는 자도 자기에게 아첨하는 것이 진실한 마음과 참된 태도가 아님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이는 어린아이의 무지에 비해 더욱 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로부터 누구나 있는 병통이다. 아첨을 좋아하는 자가 한때 귀에 솔깃한 말을 달게 여기는 것은 아첨을 잘하는 자가 한때 남을 기쁘게 하기를 탐하는 것과 같다.


또 괴이한 것이 있으니, 지금 세상에서 존귀한 자가 비천한 자에게 아첨하는 것이 오히려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아첨하는 것보다 심한 것이다. 노비를 가진 자는 반드시 아첨하여 부리되 그들의 뜻을 건드릴까 염려하면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인정(人情)이 야박하다고 여긴다. 부하들을 대하는 자는 반드시 아첨하여 대우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아랫사람을 아끼지 않는 것이라고 여긴다. 재상으로 시골농부와 예를 대등하게 행하여 칭송을 낚고, 사대부로서 시정잡배와 어울려 그 이로움을 낚고자 한다. 그들의 힘을 부리고 싶으면 아첨하고, 그들의 재물을 수탈하고자 하면 아첨하니, 겉으로는 자기를 굽혀 남을 돕는 듯하지만, 실은 바로 풍속을 해치고 파괴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남의 아랫사람이 된 자들이 교만하고 태만해져 도리어 윗사람이 자기에게 아첨하기를 요구하여, 다시는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고 허물없이 대하고 능멸하는 태도가 점점 자라나서, 친구처럼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고 싸움하듯 소리를 질러대며 자신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방탕하게 만족해한다. 이른바 신분과 체면(體面)은 반드시 무너뜨려 없애려 하고, 조금이라도 저들의 뜻에 차지 않으면 곧 원망과 미움을 품고 간사하고 음험한 일을 몰래 꾀하여, 작게는 배반하고 크게는 해독(害毒)을 끼치니, 모두 아첨으로 인해 양성된 것이다.


아랫사람들은 이미 이것을 윗사람 섬기는 도리로 삼고, 윗사람이 된 자들도 이것을 아랫사람을 부리는 방도로 삼아, 마음속으로는 ‘명분(名分)이란 한 사람이 밝힐 수 없는 것이요, 세도(世道)는 한 손으로 만회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저들에게 은혜로 대하고 나에게 손상이 없으며 내 욕심에 맞으면서 원망을 듣지 않으면 또한 좋지 않겠는가. 이 세상을 살면서 좋은 사람이란 말을 들으면 되는 것이지, 무엇하러 꼬장꼬장하게 옛날의 도를 지키며 살겠는가’라고 하면서 돌려가며 서로 본받아 드디어 한 세상의 풍습이 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상하가 서로 아첨하고, 아첨으로도 끝나지 않아서 아첨에 익숙하지 못한 자가 있으면, 아래에서는 위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중간에서는 친구에게 용납 받지 못하고, 위에서는 아래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 말을 해도 흥미를 끌지 못하고 면목이 가증스럽기만 하여, 세상과 어긋나고 흐리멍덩하여 고지식한 외톨이가 되고 말 뿐이다. 아, 그러나 이렇게 살지언정 저렇게 하지는 않겠다.


[역자 주]

1.아첨에 대하여 : 저자가 69~70세이던 1809~1810년경에 지은 글이다. 저자는 아첨의 속성이 무언가를 구하기 위해 하는 비굴한 행위로 규정하고, 이것이 아무것도 모르는 영아(어린애)가 하는 행동과 차이가 없는 우매한 짓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에서 그치지 않고 존귀한 자가 비천한 자에게 아첨하고, 주인이 종에게 아첨하는 등 풍속을 무너뜨리는 해괴한 행위가 있음을 지적하고, 이것은 무언가 명성을 낚거나 이로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위라고 분석하였다. 아울러 저자는 체면을 손상시키고, 원망과 음험, 배반과 해독을 끼침이 모두 아첨으로 인해 양성된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말미에서 말한, 아첨을 잘 못하여 위아래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친구에게도 용납 받지 못해 외톨이가 된 사례는 저자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듯하다.

2. 측천무후 : 측천무후가 병이 들어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고 명하였는데, 염조은(閻朝隠)은 소실산(少室山)에 가서 스스로 희생이 되어 제기(祭器) 위에 누워 측천무후의 목숨을 빌었다. 이에 측천무후의 병이 약간 차도가 생겨 그에게 후한 상을 내렸는데, 나중에 장원일(張元一)이 이 광경을 그린 〈대희도(代犧圖)〉를 바치자 측천무후가 크게 웃으며 비루하게 여겼다고 한다. 《古今事文類聚 別集 卷19 性行部 代犧禱疾》

3. 이헌(李憲): 송나라 환관(내시) 이헌(李憲)이 권력을 얻어 사대부를 노예처럼 부렸는데, 팽손(彭孫)이란 자가 이헌의 발을 씻기며 “태위의 발은 어찌 이리 향기롭습니까”라고 하자, 이헌이 그의 머리를 밟으며 “노(奴 노예)가 어찌 이리 아첨이 심한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仇池筆記 卷下 太尉足香》


-윤기(尹愭 1741~1826), '아첨에 대하여〔諂說 첨설〕',『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10책/ 책(冊)』-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13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상대 앞에서 형평을 잃고, 자기가 천하게 여기고 싫어하는 상대 앞에서 형평을 잃으며, 자기가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상대 앞에서 형평을 잃고, 자기가 가엾게 여기고 불쌍하게 여기는 상대 앞에서 형평을 잃으며, 자기가 오만하게 대하고 소홀하게 대하는 상대 앞에서 형평을 잃기 마련이므로 그런 상대 앞에서 몸가짐(언행)을 신중히 하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좋아하면서도 상대의 단점(나쁜 점, 악한 점)을 알 수 있고 싫어하면서도 상대의 장점(좋은 점, 선한 점)을 알 수 있는 자가 천하에 드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속담에, “사람은 자기 자식의 단점을 알지 못하고, 자기 논밭의 곡식이 잘된 것을 알지 못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닦여지지 않으면 자기 집안을 잘 단속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대학(大學) 8장-


"누가 나를 추켜세운다고 해서 우쭐댈 것도 없고 헐뜯는다고 해서 화를 낼 일도 못 된다. 그건 모두가 한쪽만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오해이기 때문에.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언외(言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 법. 온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 (법정 1932~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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