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미혹

《열자(列子)》 〈양주(楊朱)〉*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양주(楊朱)가 “백성자고(伯成子高)는 자신의 터럭 하나를 가지고도 남을 이롭게 하지 않았다. 사람들마다 자신의 터럭 하나를 뽑지 않고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가 절로 다스려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금자(禽子, 묵자(墨子)의 제자인 금활리(禽滑釐))가 “그대 몸에 있는 터럭 하나를 뽑아서 온 세상을 구제할 수 있다면 하겠는가?” 라고 묻자, 양주가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맹자가 “양자(楊子)는 자신을 위하는 것만 추구할 뿐, 터럭 하나를 뽑아서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楊子取爲我 拔一毛而利天下 不爲也〕”라고 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자는 맹자의 말에 대해 “추구한다〔取〕는 것은 겨우 만족하는 의미이니, 겨우 자기를 위하는 것에 만족할 뿐이요, 남을 위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는 것이다.〔取者 僅足之意 取爲我者 僅足於爲我而已 不及爲人也〕”라고 해석하였다. 양주의 도는 이와 같다.


내가 요즘 사람들을 보니, 모두 ‘긴요하다〔緊, 긴할 긴, 즉 꼭 필요하다, 요긴하다의 의미〕’라는 글자를 가지고 마음을 유지하고 몸을 움직이는 기준으로 여기고 있다. 사람들의 말과 행동이 자신에게 그다지 관련이 없어서 절실하지 않다고 생각되면 대번에 “나한테 긴요한 일이 아니다.〔不緊〕” 한다.


‘긴요하다’라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내가 “요즘 사람들은 다 자신만을 위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말 한 마디 꺼낼 적에도 자신에게 긴요하지 않으면 하지 않고, 걸음 한 번 떼는 것도 자신에게 긴요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다. 일을 할 때에도 반드시 긴요한 뒤에야 하고, 계획을 세울 때에도 반드시 긴요한 뒤에야 세운다.


오직 자신에게 긴요하게 하고자 하므로 의리의 관건이나 시비의 경계에서 마땅히 말을 해야 할 때에는 입을 닫고 모호하게 구는 것을 절묘한 처신으로 삼고, 일을 만나면 회피하고 미루는 것을 대단한 능사로 여긴다. 명리(名利)의 분수(分數)에 이르러서는 수시로 세력을 좇아서 아침에 항복했다 저녁에 배반하는 것을 제일가는 묘방(妙方)으로 치고, 벼슬의 길머리에 이르러서는 지름길로 몰래 가서 자신을 드날리고 남을 밀쳐내는 것을 최고의 급선무로 삼는다.


사소한 이해(利害)만 얽히면 평소엔 떠돌이 거렁뱅이처럼 취급하여 배척하면서 끼워 주지 않던 사람에게도 갑자기 살을 부비며 사는 골육의 친족인 양 살갑게 굴고, 미세한 낌새만 있으면 전날에 어버이와 스승처럼 섬겨 지극히 공손하게 모시던 사람에게도 느닷없이 칼을 쥐고 이를 가는 원수처럼 여긴다. 앞문에서 읍하고 뒷문에서 빗장을 지르는 경우도 있고, 예전에는 은택이 내리다가 지금은 은택이 멈춘 경우도 있다.


기쁘지 않은데도 억지웃음을 짓고, 이미 알고 있으면서 짐짓 놀라는 체한다. 겉은 진심인 듯 보이지만 속마음은 거짓이고, 걸음은 동쪽으로 떼지만 마음은 서쪽으로 향한다. 속여서 꼬드기기도 하고, 공갈하여 협박하기도 한다. 미끼를 던져 낚기도 하고, 감싸 주는 체 부려먹기도 한다. 


한 잔의 술대접에 오묘한 이치가 다 들어 있고, 한 차례의 방문에 깊은 속내를 모두 털어놓는다. 당장 자신에게 긴요하지 않은 사람이면 죽는 것을 멀뚱히 보면서 개의치 않고, 뒷날에라도 도움을 청할 사람이면 원수를 잊고 모욕을 참아 가며 그를 위해 죽는 시늉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갑(甲)은 ‘나는 남이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솜씨가 있다.’라고 생각하여 을(乙)을 얼뜨기라고 비웃고, 을도 ‘나만 홀로 남모르는 계책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여 갑을 멍청하다고 여긴다. 자신이 한 짓과 소문은 반드시 은밀히 감추고, 남이 한 짓과 소문은 반드시 끄집어내어 들춘다. 그래서 저마다 장쾌(駔儈, 거간꾼, 즉 양다리를 걸쳐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의 못된 버릇*을 저지르고, 옆 사람이 속으로 욕하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자신에게 긴요하다고 여기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들이 말하는 ‘긴요하다〔緊〕’라는 것은 도리어 너무나 긴요하지 않고, ‘나를 위한다〔爲我〕’라는 것은 전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의리의 타당 여부를 고려하지 않고 눈앞의 이해만을 계산하는 사람치고 실패하지 않은 경우가 없고, 시비의 진위를 분간하지 않고 사심에 좌우되는 사람치고 치욕을 당하지 않은 경우가 없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눈앞의 이익에 대해 자신에게 이보다 더 긴요한 것이 없다고 스스로 여겨질지라도 바른 의리에 위배된다면 공의(公議)에 죄를 얻어 뒷날에 받을 피해가 당시의 이익보다 100배나 되고, 사사로운 마음 씀씀이에 대해 스스로는 귀신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비의 공정함을 잃는다면 타인의 마음에 앙금을 남겨 나중에 돌아오는 치욕이 반드시 당시의 소득보다 심하기 때문이다. 이는 속일 수 없는 천리(天理)이며 필연적인 인정(人情)이다.


일시적인 이익과 손해를 가지고 말하더라도 역시 그러한 점이 있다. 예를 들어보겠다. 어떤 사람이 출세에 급급하여 권세가를 찾아가고 있었다. 도중에 친구를 만났는데, 대뜸 “나에게 긴급한 일이 있어서 잠시도 지체할 수 없다.” 하고는 돌아보지도 않고 휭하니 가버렸다. 얼마 지난 뒤에 지난번 길에서 만났던 친구에게 긴요한 지름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곧 가서 부탁하였지만,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미워하여 거절하였다.


또 어떤 사람이 야간 순찰을 담당하여 군호(軍號)를 받았다. 글자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 글을 잘 아는 사람에게 달려가 물었으나 그 사람도 알지 못하였다. 도중에 알고 지내던 한 서생이 있었으나 그에게 들어가 물어보지 않고 자기 생각으로 짐작하여 말했다가 결국 죄를 지었다. 나중에 그 서생이 무슨 글자인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었지만, 그때는 후회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세상의 일에 이러한 경우가 많으니, 모두 긴요한 것을 추구한 과실이다.


시관(試官)과 정관(政官)이 뇌물과 청탁을 받아 사사로이 일을 처리한 뒤에 스스로는 은밀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하지만, 탄핵을 받아 먼 지방으로 유배 가는 화가 뜻밖에 일어난다. 부자와 상인이 남들이 차마 못 하는 짓을 행하여 일신을 이롭게 한 뒤에 제 딴에는 은밀하게 했노라고 생각하지만, 불타고 칼 맞으며 도둑맞는 우환이 신임하던 사람에게서 생겨난다. 이런 경우로 보아 나는 정말로 긴요한 것인지 모르겠다.


사리(事理)도 모르고 생사(生死)도 모른 채 오로지 이익만을 탐하는 저 백성들이야 책망할 것이 없다. 하지만 사군자(士君子)가 되어서도 이와 같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은가? 


명(明)나라 사람의 말에 “사람이 100만 금을 들여 딸을 시집보낼 수는 있지만, 10만 금을 들여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하였다. 한데 지금 사람들은 일생의 힘을 다해 이익을 구할지언정 반생(半生)의 공을 들여 독서하지는 않고, 재화를 다 쏟아 권귀(權貴)에게 아첨할지언정 작은 재물을 덜어 가난한 자를 구제하려 하지 않으니, 이는 천하 사람들의 공통된 미혹이다. 


천하 사람들의 미혹이 어찌 이뿐이랴만, 연유를 찾아본다면 모두 ‘긴요하다〔緊〕’라는 한 글자가 빌미가 된다. ‘긴요하다’라는 것은 요긴하고 절실하면서 털끝만큼도 느슨하지 않은 것을 말한다. 그러나 노끈이 너무 단단히 조이면 팽팽해져 끊어지므로 도리어 느슨한 줄이 끊어지지 않는 것만 못하고, 옷이 너무 작으면 꽉 끼여 찢어지므로 도리어 품이 넉넉한 옷이 적당한 것만 못하며, 걸음이 너무 급하면 힘이 소진되어 쓰러지므로 도리어 천천히 가는 것이 더 빨리 가는 것만 못하다. 


긴요한 것을 추구하다 보면 도리어 긴요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이치상 당연한 것이다. 그럼에도 오로지 긴요한 것만을 일삼고자 하여 자기 일신에 사사롭게 하고자 하니, 무엇을 하든 이로운 일이 있겠는가?


오로지 긴요한 것만을 일삼는다면 측은(惻隱), 수오(羞惡), 사양(辭讓), 시비(是非)의 마음은 모두 말할 것도 없고, 두루 사람들을 사랑하고 대중을 포용하고 사물들을 아껴주라는 가르침이 모두 필요 없는 것이 되어서 칠정(七情)은 정도(正道)가 상실되고 오품(五品, 부자(父子)ㆍ군신(君臣)ㆍ부부(夫婦)ㆍ장유(長幼)ㆍ붕우(朋友)의 다섯 등급)은 법도로서의 가치가 훼손될 것이다.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이럴 수가 있겠는가?


아, 양주(楊朱)의 학문은 자신을 위하는 데에는 그나마 쓸모 있지만 지금 사람들은 겨우 자신을 위하는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양주의 학문은 남의 비위를 맞추는 데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요즘 사람들은 단지 남의 비위만을 맞추기에 족할 뿐이다. 이것은 양주의 학문을 배우고자 하면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니, 어찌 개탄스럽지 않은가?


정말로 말을 하고 일을 도모하는 즈음과 교유하고 행동하는 때에 ‘긴요한지, 긴요하지 않은지〔緊不緊〕’를 마음속에서 먼저 따지지 말고 오직 도리상 당연한 것을 위주로 한다면, 하늘로부터 받은 본성이 온전해지고 수신(修身)을 통한 덕이 갖추어져서 우환이 닥치지 않고 심신이 편안해질 것이다. 


이것이 참된 긴요함이요, 참된 위기(爲己, 자기를 위하고 보전함)이다. 어찌하여 그리도 고생스럽게 긴요한 일을 긴요하지 않다 하고, 긴요하지 않은 일을 긴요하다 하여 식견 있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는 비웃음을 사는지 모르겠다.


※[역자 주]

1.양주(楊朱) : 이해를 돕기 위해 《열자(列子)》에 실린 해당 부분의 내용을 소개한다. 양주가 “백성자고는 터럭 하나로도 남을 이롭게 하지 않고, 나라를 버리고 은거하여 농사지었다. 우 임금은 일신(一身)으로 자신을 이롭게 하지 않아 온몸이 바짝 말랐다. 옛사람들은 터럭 하나를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더라도 주지 않았고, 온 천하를 가져다 일신을 봉양한다 하더라도 취하지 않았다. 사람마다 터럭 하나도 뽑지 않고,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伯成子高不以一毫利物 舍國而隱耕 大禹不以一身自利 一體偏枯 古之人損一毫利天下不與也 悉天下奉一身不取也 人人不損一毫 人人不利天下 天下治矣〕”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금자가 “그대 몸의 터럭 하나를 뽑아 온 세상을 구할 수 있다면 그대는 하겠는가?〔去子體之一毛以濟一世 汝爲之乎〕”라고 묻자, 양주가 “세상은 터럭 하나로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世固非一毛之所濟〕”라고 대답하였다. 다시 금자가 “구제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때는 하겠는가?〔假濟爲之乎〕”라고 묻자, 양주는 대답하지 않았다〔楊子弗應〕고 한다. 《列子 楊朱》무명자집에는 ‘양자불청(楊子弗聽)’으로 되어 있으나, 《열자》 원문에는 ‘청(聽)’이 ‘응(應)’으로 되어 있다.

2. 장쾌(駔儈)의 못된 버릇 : 《운회》에 “‘駔’의 음은 자(子)와 낭(朗)의 반절이며, 시장에서 모이는 것을 뜻한다. ‘儈’의 음은 고(古)와 외(外)의 반절이며, 시장 사람들을 모으는 거간꾼이다.” 하였으며, 《사기》 권69 〈화식열전〉의 주에 “장쾌는 두 집안을 모이게 해서 물품을 교역시키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윤기(尹愭 1741~1826), '자신에게 긴요한 것만 추구하는 풍속을 논함〔論緊俗〕',『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 6책/ 문(文)』-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규필 (역) ┃ 2013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