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레와 사람의 차이
《서경(書經)》에 이런 말이 있다. “배우지 않은 사람은 담장에 얼굴을 대고 서 있는 것과 같다.〔不學墻面〕” 이 때문에 공자(孔子)께서 말씀하셨다. “〈주남(周南)〉ㆍ〈소남(召南)〉을 배우지 않은 사람은 담장에 얼굴을 바로 대고 서 있는 것과 같다.〔人而不爲周南召南 其猶正墻面而立也與〕”
주자(朱子)는 이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였다. “담장에 아주 가까이 다가가서 한 물건도 보이지 않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이다.〔卽其至近之地 而一物無所見 一步不可行〕”
예로부터 배우기를 권면하고 배우지 아니함을 경계한 말이 많았지만, 이처럼 비근(卑近)한 말로 잘 빗대어 말한 경우는 없다. 그러나 너에게 말해 주어서 네가 혹시라도 두려운 마음으로 뜻을 세울 수 있게 하려면 네 몸의 일을 가지고 비유해서 절실하게 와 닿도록 말해 주는 것이 가장 좋겠다. 이에 글을 지어 일러 주노니, 분명히 듣고 깊이 반성하거라.
지금 너는 15세가 지났는데 여태 문리(文理)가 나지 않았다. 타고난 자질이 남들보다 못한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진정으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 용감하게 떨쳐 일어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한다. 하는 일 없이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며 어제 깨닫지 못한 것을 오늘도 깨치지 못하고 금년에 알지 못한 것을 내년에도 알지 못하니, 세월이 번개처럼 흘러 노쇠해진 뒤에 슬퍼하고 한탄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한번 생각해 보거라. 어찌 애석하지 않겠으며 어찌 가슴 아프지 않겠느냐?
어디 한번 물어보자. 너는 장님을 보지 못했느냐? 장님은 두 눈이 캄캄하여 광대한 천지, 밝은 해와 달, 번화한 만물을 보지 못하니 창칼에 찔리게 되어도 피할 줄 모르고 더러운 오물이 앞에 있어도 피할 줄을 모른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글을 못 보는 사람은 가느다란 털끝은 살필 수 있으나 글자의 점과 획에는 깜깜하고, 자도(子都)가 아름다운 줄은 알지만 문장의 자구(字句)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흰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자인 줄만 알고 ‘어(魚)’ 자와 ‘노(魯)’ 자도 구별하지 못하여 만 권의 서적이 앞에 있어도 무슨 일인지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고 편지를 받고도 무슨 내용인지 무슨 연고인지 알지 못하니, 이런 사람은 눈이 멀지 않고도 눈먼 자이다.
너는 귀머거리를 보지 못했느냐? 귀머거리는 두 귀가 먹먹하여 불러도 쳐다보지 않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고 꾸짖고 욕해도 성낼 줄을 모른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귀가 먹었기 때문이다.
문장에 귀먹은 사람은 속된 말에는 밝지만 그 앞에서 《시경》ㆍ《서경》을 송독하면 딴전을 피우며 못 들은 체하고, 외설스러운 말은 잘 알아듣지만 곁에서 고금을 논하면 듣고도 못 들은 척한다. 글 짓는 모임에 가면 마치 바닷새가 성대한 음악을 듣는 것처럼 어리둥절하고, 운치 있는 담소를 들으면 무지렁이 아녀자가 고아한 악곡을 듣는 것처럼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귀가 먹지 않고도 귀먹은 자이다.
너는 벙어리를 보지 못했느냐? 벙어리는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고 마음이 있어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묻고 답하는데 홀로 묵묵히 있고 사람들은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데 홀로 우울하게 지낸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혀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문장에 벙어리인 사람은 의기양양하게 혀를 놀리다가도 붓을 잡으면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끊임없이 목청을 울리다가도 책 앞에서는 끽소리 한 번 내지 못한다. 내면에 쌓아둔 말을 표출하고 싶어도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하고,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친지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어도 편지를 쓰지 못한다. 이런 사람은 벙어리가 아닌데도 벙어리인 자이다.
너는 절름발이를 보지 못했느냐? 사람들은 모두 반듯하게 걷는데 절름발이는 비치적거리며 해괴한 모습으로 걷고, 사람들은 천천히 걷기도 하고 빨리 달리기도 하는데 절름발이는 절뚝대며 이상한 모양을 한다. 심한 경우는 앉아만 있고 일어나지 못하여 지척의 거리도 이동하지 못하고, 목발로 다리를 대신하여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아이들이 모두 비웃고 거지들도 업신여기는데, 이는 다름이 아니라 다리가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문장에 절름발이인 사람은 민첩한 다리가 있어도 강학하는 자리에서는 활동하지 못하고, 걸음걸이가 반듯해도 문장 짓는 자리에서는 활보하지 못한다. 문인(文人)들이 토론하는 것을 보면 위축되어 앞에 나서지 못하고, 시인(詩人)들이 재능을 겨룬다는 말을 들으면 주춤대며 물러서고 찾아가지 못한다.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은 절름발이와 다름없고, 부끄러운 기색으로 우두커니 있는 모양은 흡사 절뚝발이 같다. 이런 사람은 절름발이가 아닌데도 절름발이인 자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수백, 수천, 수만 가지의 병을 모두 알 수 있으나 지금 일일이 다 들 수는 없다.
장님은 눈이 멀었을 뿐이고, 귀머거리는 귀가 먹었을 뿐이고, 벙어리와 절름발이는 말을 못하고 걸음이 절뚝거릴 뿐이니, 다른 병까지 반드시 함께 지니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문리(文理)가 나지 않은 사람은 한 몸에 여러 가지 질병을 모두 지니고 있으니, 한 물건도 보지 못하고 한 걸음도 걷지 못할 뿐만 아니라 한 소리도 듣지 못하고 한 마디도 말하지 못한다. 앞꼽추나 뒷꼽추처럼 그 추한 모습을 가릴 수 없고, 살진 말을 타고 가벼운 갖옷을 입어도 저열함이 드러날 뿐이다. 이런 사람은 남과 견줄 만한 점이 하나도 없는 밥벌레일 뿐이다.
너는 그런 사람이 되려느냐, 아니면 온전한 사람이 되려느냐? 그런 사람이 되려 한다면 나도 어쩔 수 없으니, 네가 하는 대로 내버려 두겠다. 그러나 그렇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지난 세월은 되돌릴 수 없다 하더라도 앞으로는 뼈에 사무치는 진정으로 마음을 다잡아 두려운 마음으로 분발하거라. 죽기로 맹세한다면 어찌 재주가 없어 성공하지 못하기야 하겠느냐?
공부하는 방법으로 말하면 부질없이 글을 읽기만 해서는 안 된다. 책을 펴면 마음을 비우고 시야를 넓혀 글 뜻을 자세히 탐구해야 한다. 반드시 옛사람이 운용한 구상(構想)의 오묘함과 글자 사용의 절묘함 및 문장을 변화시켜 문세(文勢)를 올리거나 낮춘 방법과 글의 조리를 분명하게 갖추어 의미가 두루 통하게 한 방법을 탐구하여 마음속으로 알아내고 흔쾌히 받아들여 잠자거나 밥 먹는 동안에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글을 쓸 때는 마음을 붓끝에 모으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반드시 옛사람의 훌륭한 조어법과 전고(典故) 인용 방법 및 ‘문세를 일으키거나 끊고 대비되는 사물을 병렬함으로써 의미를 부각시키는 수사법〔起斷照襯〕’과 ‘어구를 늘이거나 줄임으로써 문세를 한층 고조시키는 수사법〔伸縮鼓舞〕’을 탐구하여 철저히 이해하고 체득하여 문장을 전아(典雅)하고 유창하게 만들어 조금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하여 은미한 말과 깊은 뜻을 남김없이 이해할 수 있고 장편과 단편을 막론하고 모든 글을 적절하게 지을 수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 너는 다행히 사람이고, 다행히 남자이고, 다행히 요절을 면하였고, 다행히 문필(文筆)을 아는 사대부 집안에 태어났고, 또 다행히 신체가 온전하여 무엇 하나 남들보다 못한 점이 없다. 그렇다면 하늘이 너에게 주신 것이 부족하다 할 수 없는데, 어찌하여 공연히 온갖 질병을 다 지녀서 남과 견줄 만한 것이 하나도 없는 일개 밥벌레가 되려 한단 말이냐? 이야말로 ‘막는 사람도 없는데 하지 않는다’는 격이니, 괴이하고 수치스럽다. 넌들 어찌 이런 마음이 전혀 없겠느냐?
아, 오늘 다음 내일이 있음만 알고 노쇠함이 쉽게 이를 줄을 알지 못하며, 노는 것이 즐거운 줄만 알고 환란이 무궁히 이어질 줄을 알지 못하며, 배불리 먹고 따습게 지내며 몸이 편한 대로만 하고 내면에 최고의 보물을 간직할 줄 모르며, 신체가 남들처럼 온전함만 자랑으로 여기고 자신을 형편없는 부류로 추락시키는 줄을 깨닫지 못하며, 높고 영화로운 자리에 있기를 바라기만 하고 좋은 명성을 얻으려면 학문을 좋아해야 함을 알지 못하며, 부귀로 명성을 날리기를 바라기만 하고 청운(靑雲)에 오르려면 학업을 부지런히 닦아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어리석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안타깝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가련하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많은 말을 할 것 없으니, 깊이 생각해 보고 어느 한쪽을 선택하여 처신하거라.
-윤기(尹愭 1741~1826), '권학문 수아를 위해 지었다.〔勸學文 爲秀兒作〕',『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5책/ 권학문(勸學文)』-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강민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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