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직 조왕(擧直錯枉):바른 자는 들어쓰고 굽은 자는 방치한다
“바른 자는 들어 쓰고 굽은 자는 방치해야 한다.”는 것을 성인(聖人)이 여러 번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사람을 쓰는 요결이요,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이 나눠지는 한계가 되는 것이다. 까닭에 애공(哀公)의 물음에 대답하기를, “이같은 거조(擧錯)로 하면 백성이 복종하게 될 것이고, 이것을 반대로 하면 백성이 복종하지 않을 것입니다.(옮긴이 주: 거조(擧錯)는 "들 擧, 둘 錯, 들어서 두다" 라는 의미로 , “바른 자는 들어 쓰고 굽은 자는 방치해야 한다.”는 앞서의 말을 전제한다.)
또 번지(樊遲)가 인(仁)을 물은 대답에,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하고, 지(知)를 물은 대답에는, “사람을 알아보아야 한다.” 하였다. 또 그 깨닫지 못하고 다시 물은 대답에는, “바른 자를 들어서 쓰고 굽은 자를 방치하면 굽은자를 바르게 할 수 있지.” 하였다. 번지는 물러가서 또 자하(子夏)에게 물었는데, 자하는 오로지 지(知)만으로써 이야기해 주었다.
대개 이 거직 조왕(擧直錯枉)이라는 한 구절의 대의(大意)는 오로지 지(知)에만 있다는 것이다. 무릇 남의 임금으로서 누군들 바른 자를 들어 쓰고 굽은 자를 방치하고 싶어하지 않으랴마는, 지혜가 밝지 않으면 소위 바르다는 자도 바르지 않게 보이고, 소위 굽은 자도 굽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 거조를 알맞게 하자면 지혜가 아주 밝은 사람이라야 할 수 있는 일인데, 지(知)를 묻는 자에 대해서는 대답할 바가 아니다.
“순(舜)이 고요(皐陶)를 들어 쓰고 탕(湯)이 이윤(伊尹)을 들어 썼다.”는 말은 이 순과 탕의 신상에 관한 일이거늘, 갑자기 이것으로 애공과 번지같은 자에게 권할 수 있겠는가? 바른 것과 굽은 것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이치로 말하면, 이치에 맞는 것은 바르다 하고 이치에 어긋남을 굽었다고 여기는 것인데, 오직 지혜가 밝은 자만이 능히 분변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써 말하면, 그 마음으로 옳은 것을 헤아려서 그것이 옳다 싶으면 오직 옳게 여길 뿐만 아니라 바로 행하게 되고, 또 마음에 그른 것을 헤아려서 그것이 그르다 싶으면 다만 그르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바로 따르지 않게 될 것이다. 시종이 다 정직하고 조금도 아첨하는 태도가 없으면 혹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 마음가짐은 끝내 바르게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혹 세리(勢利, 세력과 이익)에 유혹된다거나 위무(威武, 권위와 무력)에 굴한다거나 구설(口舌)에 흔들리거나 해서 능히 그 마음을 굳게 갖지 못하고, 앞뒤를 재면서 외물에 쏠리는 자라면 비록 우연히 이치에 맞는 것이 있다 할지라도 그 마음은 본래부터 굽은 것이다. 만약 성인(聖人)의 훈계한 말에 이미 그 득실을 밝게 깨닫지 못한다면, 그냥 마음에 돌려서 논하기를, “이 같은 자는 들어 쓰고 이 같은 자는 두는 것이 옳다.”고 했을 것이다.
임금으로서 이미 바른 자를 들어 쓰고 그 저마다의 마음을 시험해 보면 천하의 이치가 바른 데에서 제대로 되지 않는 일이 없는 까닭에 백성이 복종하는 것이다. 고요와 이윤 같은 이는 오직 이치에 바르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남의 마음을 조화시키는 데도 또한 정직하게 했었다. 그 이치대로 해야 한다는 것은 오직 순과 탕만이 알았던 것이나, 그 마음을 바르게 해야한다는 것은 애공과 번지로서도 알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하가 순과 탕으로 증명하면서, 바로 그 마음을 바르게 가짐에 따라 이치도 조화시킬 수 있는 까닭에 이르기를, “훌륭한 말이다.” 하였다. 만약 단순하게 “선을 취하고 악을 버린다.”고 일러 주었다면 번지가 아무리 우둔하다 했을지라도 이것이 뭐 깨닫기 어려워서 다시 깨우쳐 주기를 기다렸겠으며, 자하도 무엇 때문에 성인(聖人)의 말을 칭찬하고 탄복하면서 말을 많이 지껄인 후에야 알 수 있도록 했었겠는가?
한 순제(漢順帝) 양가(陽嘉) 3년(134)에 주거(周擧)가, “신(臣)은 족히 여러 신하를 분별할 수 없다 하겠으나, 공경 대신(公卿大臣)으로서 자주 바른 말을 하는 자가 충직한 신하이고, 교활하게 아첨하고 구차하게 고분대는 자는 간사한 신하입니다.” 하였으니, 이 어의(語意)가 거직 조왕이란 말과 서로 비슷하다 하겠다.
또, “어질지 못한 자가 멀어졌다[不仁者遠矣].”고 하였으니, 인(仁)도 또한 그 속에 포함되어 있고 사욕이 멀어짐에 따라 백성도 인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만하다.
성인(聖人)은 또 일찍이, “강하고 과감하고 질박하고 말을 생각해 하는 자는 인에 가깝다[剛毅木訥近仁].”고 하였으니, 이는 마음이 바르다는 것을 이름이고 또, “말을 잘하고 얼굴 모습을 꾸미는 자는 인(仁)을 할 이가 적다[巧言令色鮮矣仁].”고 하였으니, 이는 마음이 바르지 않다는 것을 이른 말이다.
[역자 주] 거직조왕(擧直錯枉) : 바른 자는 들어 쓰고 굽은 자는 방치해 버리는 것. 《논어(論語)》 안연(顔淵)에, “樊遲問仁 子曰愛人 問知 子曰知人 樊遲未達 子曰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樊遲退見子夏曰 鄕也 吾見於夫子而問知 子曰擧直錯諸枉 能使枉者直 何謂也 子夏曰 富哉言乎 舜有天下 選於衆 擧皐陶 不仁者遠矣 湯有天下 選於衆 擧伊尹 不仁者遠矣”라고 보임.
-이익(李瀷, 1681~1763), '거직 조왕(擧直錯枉)', 『성호사설(星湖僿說)제20권/경사문(經史門)』-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김철희 (역) ┃ 1977
[옮긴이 주]
1. '거직조왕(擧直錯枉)'에 대한 해석은 대개 역자의 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즉 知의 관점에서, 바른 사람을 들어서 써야할 상황 즉 인재등용과 분변의 상황에 흔히 인용된다. 하지만 여기에 국한할 경우 어떻게 바른 것을 분변할 수 있는가?라는 방법론적 의문이 남는다. 그 기준이 보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이해관계의 잣대에 따라 다 다를 수도 있기때문이다. 이 한자성어가 나오는 전체 글을 보면 비로소 이해가 가능해진다. 글의 요점은 인(仁)에 대한 것이다. 성호 선생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위에 역자가 옮긴 논어의 해당 원문의 전체 번역글은 이렇다. 『번지가 인(仁)에 대해서 묻자, 공자께서 대답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지(知, 앎, 지혜)에 대해서 묻자, 공자 왈 “사람을 아는 것이다.” 번지가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께서 말했다. “바르고 정직한 사람을 들어 쓰고 모든 부정한 사람을 버리면 부정한 자로 하여금 곧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번지가 물러나와 자하를 만나자 말했다. “조금 전에 제가 스승을 뵙고 앎(知)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스승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네요. ‘곧은 것을 들어 굽은 것 위에 놓으면 굽은 것으로 하여금 곧도록 할 수 있다.’ 무슨 뜻인가요?” 자하가 말했다. “그 말씀은 뜻이 너무나 풍부하고 깊습니다. 순임금이 천하를 차지하여 여러 사람 중에서 선별하여 고요를 등용하자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어졌고, 탕임금이 천하를 차지하여 여러 사람들 중에서 선별하여 이윤을 등용하자 어질지 못한 자들이 멀어졌던 것입니다.”(논어, 안연편).
2.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 공자왈, 말재주가 교묘하고 표정을 보기 좋게 꾸미는 사람 중에 어진 사람은 거의 없다. (논어, 학이편 3)
3. 강의목눌근인(剛毅木訥近仁) :공자왈, 의지가 굳고 강직하며, 있는 그대로 소박하고 꾸밈이 없고, 말이 서툴지만 신중한 이런 사람은 군자에 가깝다, 하지만 무늬(겉)와 바탕(속)이 잘 어울려 조화를 이루어야만 비로소 군자라 할 수 있다(文質彬彬 然後君子) (논어,자로편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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