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탈을 쓰고 있다고해서 다 사람은 아니다

마음을 논한 것이 하나가 아니니, 초목지심(草木之心)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인물지심(人物之心)이라고 하는 것도 있고,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고 하는 것도 있다. 마음은 같은 것인데 같지 않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저 완연(頑然)한 흙과 돌은 마음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초목(草木)이 생장(生長)하고 쇠락(衰落)하는 것은 마치 마음이 있어서 그렇게 하고 있는 듯하지만 지각(知覺)이 없으므로 생장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금수(禽獸)가 생장의 마음이 있는 것은 참으로 초목과 같지만, 또 이른바 지각하는 마음이 있다. 무릇 금수가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죽는데, 그중에 신체의 한 부분이나 털이나 깃은 보살핌을 받으면 충실해지고 손상되었다가도 다시 완전해지니, 이것은 초목의 마음과 조금도 다름이 없지만 지각과는 상관이 없다. 


지각이란 추위를 알고 따뜻함을 느끼며, 살고 싶어 하고 죽기 싫어하는 것들이다. 지각은 낳고 자라고 늙고 죽는 것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털이 빠졌다가 다시 나고 발톱이 이지러졌다가 다시 자라지만 지각은 여기에 관여하는 것이 없다. 이는 두 가지가 각각 하나의 물(物)이 되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이다. 


사람에 이르러서는 '생장의 마음'과 '지각의 마음'은 원래 금수와 같지만 또 이른바 '의리(義理)의 마음'이라는 것이 있다. 지각의 마음이라는 것은 알고 느끼는 데에서 그치기 때문에 그 작용이 이익이 있는 쪽으로 달려가고 해로운 것은 피하는 것에 불과하니, 사람에게 있어서는 인심(人心)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사람의 경우는 반드시 천명(天命)에 당연한 것으로 주재(主宰)를 삼으므로 원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심한 경우가 있고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심한 경우가 있으니, 도심(道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초목과 비교하면 똑같이 생장의 마음이 있고, 금수와 비교하면 똑같이 지각의 마음이 있지만, 그 '의리(義理)의 마음'(살아가는 데 있어서 선과 악,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마땅히 지켜야 할 바른 도리를 추구하는 마음)은 저 초목이나 금수에게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밝힐 수 있는가? 지금 여항(閭巷, 일반적인 대중사회)의 아이들이 몸에 병이 있더라도 침을 맞거나 뜸을 뜨거나 약을 먹는 것을 두려워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생각에 이런 치료를 해도 절대 살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제로 이것을 사용하여 치료하면 죽을 수 있는 상태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또 만약 사람이 손가락 하나에 종기가 나면 그 부분이 이지러졌다는 것을 알아서 그 마음에 빨리 낫기를 바라지만 그 형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고, 반드시 기혈(氣血)이 잘 돌아서 점점 살이 차오른 뒤에 낫는 것이다. 이 경우 지각의 마음은 생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초목의 생장하는 마음과 금수의 지각하는 마음을 아울러 가지고 있고 또 의리로 거느리는 마음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순자(荀子)가 말하기를 “초목은 생명은 있지만 지각이 없고, 금수는 지각은 있지만 의리가 없고, 사람은 생명도 있고 지각도 있고 의리도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이미 선유(先儒)들의 감정(戡定, 다양한 논란을 통해 인정됨)을 거친 의론으로 《성리대전(性理大全)》에 보인다. 


그렇다면 사람은 세 개의 마음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인심과 도심 이 두 가지만 있을 뿐이고 이외에 다른 마음은 없다. 심(心)은 본래 오장(五臟)의 하나로 오직 사람과 금수만 그것이 있고 초목에는 애당초 없다. 심은 성(性)을 싣고 있는 것이다. 성은 이(理)이고 심은 기(氣)이기 때문에 이가 기를 거느리면 지각이 이를 따라서 의리의 마음이 되고, 기가 치우쳐서 이가 어두워지면 지각의 마음만 있어서 금수와 같게 된다. 


심(心)이라는 이름은 본래 장부(臟腑, 내장의 총칭, 오장육부)가 있는 것에서 나왔으므로 저 장부가 없는 초목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그러나 가상해서 미루어 말하면 초목이 생장하고 쇠락하며 감응(感應)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 사람이나 금수가 마음이 있는 것과 같기 때문에 그 점을 들어서 명명한 것이지만 그 실상은 같지 않다. 사람과 금수가 이미 마음이 있기 때문에 비록 생장하는 이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마음이라고 한 적은 없다. 


이 때문에 생장에 대해서는 뿌리에 책임을 지우는 것이고, 뿌리는 수(水)를 주로 삼는다. 지각에 대해서는 심장에 책임을 지우는 것이고 심장은 화(火)를 주로 삼는다. 그러므로 뿌리에게 지각을 요구하면 놀라게 되고, 심장에게 생장을 요구하면 잘못된 것이다. 수(水)는 사람에게 있어서 신장(腎臟)에 해당된다. 신장이 생장의 뿌리이기 때문에 음식을 먹어서 신장으로 양분을 보내는 것이 초목의 뿌리에 물을 주는 것과 같다.


천지지심(天地之心)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초목지심과 같아서 이 또한 이른바 지각이라는 것이 없다. 하늘이 어찌 일찍이 오장의 심이 있었던가. 자연히 운행되고 밝게 감격하는 것은 이치가 원래 그런 것이지 의도가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마음을 쓰는 것과 똑같다. 


그렇다는 것을 어떻게 밝힐 것인가? 대체로 〈복괘(復卦)〉로 천지지심을 논한 경우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병이 심해졌다가 다시 소생하고 깊이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는 것이 바로 그 경계(境界)로, 인심(人心)이 외물(外物)에 따라 호응하는 것과는 유(類)가 다르다. 대체로 휴구(休咎, 길흉화복)로 천지지심을 논한 경우가 있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혈기가 충만하면 길조(吉兆)가 안색에 나타나고, 혈기가 안에서 손상되면 흉조(凶兆)가 사지에 드러나므로 인심이 외물에 따라 호응하는 것과는 유가 다르다. 이런 것들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마음이라고 하지 않지만 하늘에 있어서는 그것을 가리켜 마음이라고 한다. 그리고 사물에 따라서 생각하는 마음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고 천지에는 없으니, 여기에서 마음이라는 명칭이 애당초 사람의 심장으로부터 나온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목과 천지의 마음이라는 것은 단지 유추하여 말한 것이지 세세하게 모두 같은 것이 아니다. 혹자는 사람의 마음이 평소에는 고요하게 움직임이 없다가 외물에 접촉하면 천하의 모든 일을 아는 기능을 가지고 천지와 병렬시켜 털끝만큼도 차이가 없다고 하는데, 어찌 조급하고 편협한 견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초목의 뿌리는 아래에 있는데 하늘은 어디에 뿌리가 있는가? 동정(動靜, 어떤 행동이나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낌새)은 음양(陰陽)이다. 양은 따뜻하고 음은 차갑다. 뿌리는 반드시 정(靜, 고요함, 맑음)에 있는데, 정(靜)이란 북쪽을 말한다. 그러므로 하늘의 마음을 논할 때에 북극(北極)에 총괄시키고 더 이상 심장이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장하고 쇠락하는 것을 논할 때에 신장(腎臟)을 뿌리로 삼지 않는 경우가 없고 심장(心臟)을 말한 적이 없다.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은 마음에서 관할하는데 이것을 심군(心君, 마음의 주인)이라고 한다.


-이익(李瀷, 1681~1763), '마음에 대한 설〔心說〕',『성호전집 제41권/ 잡저(雜著)』-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홍기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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