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사군(朝鮮四郡)
한(漢) 나라가 조선(朝鮮) 땅을 빼앗아 사군(四郡)을 만들었으니, 사군은 본디 우리나라에 속한 것이다.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현도(玄菟)에서 나와 고구려를 침범하자 왕이 옥저(沃沮)로 달아났다. 위 나라 장수가 숙신(肅愼) 남쪽 경계까지 추격하여 돌에 공적을 새겨 기록했다. 또 환도(丸都)를 무찌르고, 불내성(不耐城)에다 공적을 새기고서 낙랑으로부터 물러갔다.
환도는 국내성(國內城)인데,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었으므로 마침내 평양성(平壤城)으로 옮겼으니, 평양은 왕검성(王儉城)이다. 환도는 압록강 서쪽에 있는데, 현도로부터 나와 낙랑으로부터 물러갔으니, 두 군(郡)이 요동(遼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고(通考)》에, “조선은 진번(眞番)을 역속(役屬 복속)시켰다.” 했으며, 또, “우거(右渠)가 들어와 천자(天子)께 뵈오려 하면서도 일찍이 진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했으니 진번이 한(漢) 나라로 들어가는 경계(境界)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隋) 나라의 동정(東征)에 있어,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樂浪道)로 나오고,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오고,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沃沮道)로 나오고,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玄菟道)로 나오고,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碣石道)로 나오고,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鴨綠水 압록강) 서쪽에 모였다.
《통고(通考)》에 본다면, 수성 증지는 낙랑군의 속현(屬縣)이고, 양평은 요동군(遼東郡)에 속했으니, 이는 모두 압록 이동(以東)과 상관없다. 다만 임둔(臨屯)은 기록에 보이는 것이 없다.
내 생각으로 미루어 본다면 낙랑군치(樂浪郡治)는 조선현(朝鮮縣)이니 그 읍거(邑居)가 비록 요동에 있었지만, 평양에서 서쪽 지방은 모두 그 속현(屬縣)이었다. 현도군치 옥저성(沃沮城)은 설세웅이 나온 길로서 반드시 그 이름이 있지만, 우리나라 동북(東北)의 옥저는 아니다. 진번군치 삽현(霅縣)은 수(隋) 나라 군대의 동쪽으로 나온 아홉 길 안에 들어 있지 않으니 요하(遼河)의 서쪽으로서 중국 본토에 가장 가까운 곳이다.
한 소제(漢昭帝) 때에 이르러 사군(四郡)을 합쳐서 둘로 만들었는데, 평나(平那)가 있을 뿐 진번이 없으니, 진번이 바로 평나군(平那郡)인 것이다. 오직 임둔군치인 동이현(東暆縣)을 우리나라 사람이 지금의 강릉부(江陵府)로 지칭(指稱)하고 있으나 반드시 확실하다고 볼 수 없다. 이 한 부(府)는 패강(浿江)의 동남쪽 지방과 강원도 내부 예맥(濊貊)의 서쪽 지방이 모두였으니, 혹시 당시에 강릉에 수부(首府)를 두었는지도 모른다. 한 소제 때 사군을 고쳐 이부(二府)로 만들어서 임둔을 낙랑에 합쳤으니 이부가 된 후로는 압록강 밖과 임둔 지방을 통틀어서 낙랑이라고 일컬었다. 지금의 평안ㆍ강원 두 도(道)가 모두 낙랑의 지경(地鏡) 안이었다.
삼국 시대(三國時代)에 이르러, 평안도가 고구려에게 점령당해 낙랑주(樂浪主)는 백제(百濟)의 동쪽, 예맥(濊貊)의 서쪽으로 물러가 있게 되니, 그 압록강 서쪽에 있던 땅은 중국의 군현으로 들어갔으므로 태수(太守)라 일컫고, 주(主)라 일컫지 않은 것이다.
무엇을 가지고 밝힐 수 있는가? 처음에 백제왕이 이르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靺鞨)이 있다.” 했으며, 또 예맥은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르고, 서쪽은 낙랑에 이르렀으니, 예맥과 백제 두 나라 틈에 끼여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고구려에 쫓겨서 강원도에 물러와 있을 때이다.
그 후 고구려 태조왕(太祖王) 때 중국의 요동을 습격하여 대방령(帶方令)을 죽이고, 낙랑태수(樂浪太守)의 처자를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동천왕(東川王) 때에 위(魏) 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낙랑태수 유무(劉茂)와 함께 현도(玄菟)로부터 나와 고구려를 침입했는데, 이는 고구려에게 멸망당하여 압록강 밖으로 도망해 가 있을 때의 일이다. 다만 이때에 백제가 낙랑의 공허(空虛)함을 틈타 이를 습격하여 변경(邊境)의 백성을 빼앗아갔기 때문에 유무가 노했다고 한다.
그러나 백제가 고구려의 지경을 넘어서 요동을 습격했을 리는 없었던 것 같다. 내 생각으로는, 이 전역(戰役)은 낙랑이 고구려에 복수하기 위하여 관구검을 이끌고 와서 공격하니 고구려의 왕이 바닷가로 달아났으므로 이에 낙랑이 그 옛땅을 회복하게 되고 백제가 그 공허함을 틈타서 백성을 약탈해 간 것일 것이다.
여기에서 ‘낙랑’이라고 말한 것은 여왕(麗王)이 멀리 달아나고, 옛 주인이 와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여왕이 유유(紐由)의 계교를 써서 위 나라 군대를 격퇴하고 그 나라를 회복하니, 유무도 또한 요동의 고을로 돌아갔다. 또 생각건대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낙랑을 습격하여 멸했을 때는 한(漢) 나라 건무(建武) 13년이다. 건무 20년에 이르러 한 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바다를 건너서 낙랑을 치고, 그 땅을 빼앗아 군현(郡縣)을 만들었으니 살수(薩水) 이북이 모두 한 나라에 속했다.
이때에 고구려가 비록 낙랑의 터전을 차지했었지만, 국도는 아직도 압록강 서쪽에 있었으며, 낙랑주(樂浪主)가 비록 요동에 도망가 있어서 옛 땅과 격절되고, 또 고구려가 그 사이에 가로막고 있었지만, 한 나라가 군대를 이끌고 바다를 건너와서 영지(領地)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 전역은 낙랑의 옛 땅을 친 것이고, 낙랑주를 친 것은 아니니 실지에 있어 고구려를 친 것이다. 낙랑은 이미 멸망한 지 오래인데, 또 누구를 치겠는가?
일일이 교감하여 귀결을 밝힌다. 후일에 태사씨(太史氏, 역사가, 역사학자)로서 낙랑세가(樂浪世家)를 짓는 자가 있다면 반드시 여기에서 취할 것이 있을 것이다. 살수는 곧 청천강(淸川江)이다.
-이익(李瀷, 1681~1763), '조선사군(朝鮮四郡)', 『성호사설(星湖僿說) 제3권/ 천지문(天地門)』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기석 정지상 (공역) | 1977
※[옮긴이 주]
1.조선사군(朝鮮四郡) : 낙랑(樂浪)ㆍ임둔(臨屯)ㆍ현도(玄菟)ㆍ진번(眞番)의 사군(四郡), 즉 한사군(漢四郡)을 말한다. 기원전 108년 한 무제(漢武帝)가 위만 조선(衛滿朝鮮)을 멸하고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2.숙신(肅愼) : 고조선 시대에 만주 동쪽에 있던 부족.
3. 불내성(不耐城) : 우리나라 함흥(咸興)의 북쪽에 위치했던 성이름.
4. 국내성(國內城) : 만주 즙안현(輯安縣) 통구(通溝) 부근에 위치한 성. 광개토대왕릉비의 기록에 따라 통구성(通溝城)은 국내성이라는 설이 큰 설득력을 가진다. 또 고구려의 두 번째 서울을 국내성. 세 번째 서울을 환도성을 구분하는 설이 있지만, 성호선생이 밝힌 것처럼 동일지역이라는 설이 현재에는 유력하다.
5.성호선생의 고증에 따르면, 낙랑군을 비롯한 한사군의 위치는 국내가 아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배웠던 지식과 다르다. 만주 요동땅에 위치한 것이 된다. 사마천의 사기(조선열전)의 기록에서 지리적 상관관계도 따져도 그렇다고 나온다. 심지어 북한 역사학계의 수천기의 고분발굴을 통한 고고학적 검증 성과도 이를 뒷받침한다(☞이덕일 선생의 오마이뉴스 기고문 참조). 하지만 현재 역사학계의 강력한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식민사관은 이를 아예 무시하거나 오히려 왜곡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재야사학자들에 의해 드러난다. 글을 옮기면서, 이 글을 번역한 역자의 주석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이유가 있다. 역자가 주석에서 성호선생의 고증을 개인적인 추측으로 일방적으로 몰아버린 까닭이다. 이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성호선생은 사이비 학자, 유사역사학자가 되는 셈이다. 식민사관은 일본의 식민지배의 정당화 근거로 삼기위해 만들어진 역사관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작업도 미래지향적인 면에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는 목적지향적으로 우리 고대사를 해석했던 일본 우익의 관변사학자들의 정략적 견해들로 수립된 것으로 사료된다. 일제 강점 36년 동안 어떤 역사적 사료들과 고증기록들이 제거되고 그 흔적들이 지워졌는지는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다만 광개토대왕비석의 조작흔적으로 의도적인 왜곡이 자행되었음을 가늠할 뿐이다. 일본사학자들의 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친일사학자들이 남긴 연구성과들을, 마치 바이블처럼 여기는게 현재의 식민사학이다. 우리 조상들이 다양한 기록으로 남긴 역사서들이 가진 사료적 가치를 사대적, 혹은 단순 설화적인 것으로 단순 평가절하하거나 아예 부정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가리지 않고 역사적 사실의 근거로 인용하는 것은 큰 모순이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옛글에 기록된 조선 실학자들의 역사적 고증마저 일방적인 추측으로 매도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결코 예사로운일 아니다. 성호선생은 지배권력의 관점에 따라 정략적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이 아니다. 전형적인 실학자다. 한사군, 낙랑군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고증한 성호선생의 기록이 유일하게 남아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 역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소위 한학, 한문학, 유학을 한다고 하는 일부 학자들이 처한 실상의 한 단면을 여기서 발견한다. 누군가가 해석해 준 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원문을 확인하고 인용글까지 찾아서, 아울러 그 진면목을 내 머리로 생각해봐야하는 당위성 또한 여기서 발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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