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 사람이 곤궁하게 된 후라야 시가 공교로워진다

내가 세상 사람들이 “시인은 영달하는 사람이 적고, 곤궁한 사람이 많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무릇 어찌 그러하겠는가? 이는 세상에 전해지는 시는 대체로 옛날의 곤궁했던 사람에게서 나왔기 때문이다. 


선비가 재능을 간직하고도 세상에 그 뜻과 재능을 펼 수 없게 되면, 대부분 스스로 산이나 물가로 나가, 벌레` 물고기` 초목` 바람` 구름` 새` 짐승` 등을 보고 종종 기이한 것을 찾아낸다. 또 마음 속에 슬픈 마음과 분개한 감정이 쌓이면 곧 원망하고 그것을 풍자하여, 쫓겨난 신하나 과부의 한탄 등을 통해 인정상 쉽게 말하기 어려운 것을 써내게 된다.


대개 곤궁하면 곤궁할수록 더욱 공교한 시가 된다. 그러니 시가 사람을 곤궁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곤궁하게 된 후라야 시가 공교로워진다. 


내 친구 매성유는 어려서 음보로서 낮은 관리가 되었다. 여러 번 진사시험에 응시했으나 시험관의 억압으로 합격하지 못했다. 주․현에서 곤궁하게 산지가 무려 10년이나 되었다. 나이가 쉰인데도 관직의 서열에 따라 다른 사람 보좌관 역할을 하고 있어, 배운 학문이 막혀서 하는 일에서 능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집은 완릉이고 어려서 시를 배웠는데, 어린아이 시절부터 이야기를 하여 그의 어른들을 놀라게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육경과 인의의 도리를 배웠다. 그가 문장을 짓는 것이 간결하고 예스러우며 순수하여 세상 사람들의 구미에 맞추려고 하지 않았다. 세상 사람들은 다만 그의 시(詩)만을 알아주었다.


당시에는 현자나 우자의 구별없이 시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매성유에게 가르침을 받으려 했다. 매성유도 역시 스스로 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지 못하여, 시로 그 감정을 나타내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그가 평생 지은 것 중에 유독 시가 많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알아주었으나, 그를 조정에 천거하여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전에 왕문강공이 그의 시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이백 년 이래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이 없었다.”고 했다. 비록 그를 알아봐 주었으나 역시 조정에 천거하지는 않았다. 만약 다행히 조정에서 그를 중용하여 그에게 아송을 짓고 송나라의 공덕을 노래하게 하고 그 작품을 청묘에서 올리게 하여, 시경 주의 상송․ 주송․ 노송의 작자를 따르게 하면 어찌 훌륭한 일이 아니겠는가?


어찌 늙도록 뜻을 펴지 못하게 하여 곤궁한 사람의 시만을 쓰게 하며, 한갓 곤충과 물고기 따위에 감동되어 타향살이의 슬픔을 그려내게 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의 시가 훌륭하다고 좋아할 뿐, 그가 곤궁하게 지낸지가 오래되었고 또 늙어가는 줄도 모르고 있으니, 정말로 애석하다.


매성유의 시가 너무 많아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다. 그의 처조카인 사정초가 시가 없어질까 걱정되어, 낙양에 있을 때부터 오흥에 있을 때까지 쓴 작품을 모아 순서대로 열 권으로 편찬했다. 내가 일찍이 성유의 시를 좋아했으나 모두 모을 수가 없을까 걱정했는데, 사경초가 순서대로 편찬했다는 말을 듣고 기뻐 문득 서를 지어 간직한다.


그후 15년이 되어 성유는 경사에서 병으로 죽었다. 나는 그를 위해 곡하고 묘지명을 쓴 후, 그의 집에서 유고 천 여 편을 찾아내어 전에 보관하던 것과 합쳐 훌륭한 것 677편을 골라 열 다섯 권으로 만들었다.


아아, 매성유의 시에 대해서 이미 상세히 논했으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개인적인 이해를 돕기위해 번역글 필사하여 옮기면서 문장과 문맥을 약간 다듬다)


-구양수(歐陽脩, 1007~1072 송대 시인, 학자, 당송팔대가), '매성유시집서(梅聖兪詩集序)'『고문관지(古文觀止) 제 10권』-


▲원글출처: 오세주의 한시감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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