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독서에 대하여
많이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널리 보지 않으면 그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글이란 옛 성현(聖賢)들의 정신과 심술(心術)의 운용이다. 옛 성현들이 영구히 살면서 가르침을 베풀 수 없었기 때문에 반드시 글을 지어서 후세에 남겨 후인들로 하여금 그 글 속의 말을 통하여 성현의 자취를 찾고 그 자취를 통하여 성현의 이치를 터득하게 하고자 한 것이니, 이 때문에 후세의 선비들이 한결같이 글을 읽어서 성현의 뜻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이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으며, 널리 보지 않으면 그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책 일만 권을 읽으면 붓끝에 신기가 어린 듯하다.[讀書破萬卷 下筆如有神]”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글을 일천 번을 읽으면 그 의미가 저절로 나타난다.[讀書千遍 其義自見]”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묵은 글을 싫증내지 않고 일백 번을 읽는다.[舊書不厭百回讀]”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일만 권의 책을 가지고 있으면 일백 개의 성을 가진 것보다 낫다.[擁書萬卷 勝於南面百城]”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책 오천 권을 읽지 않은 자는 내 방에 들어 오지 말라.[有不讀五千卷者 不入吾室]” 하였으니, 옛사람이 독서함에 있어서 그 양이 많고 그 폭이 넓었음을 알겠다.
내가 보건대,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의 말에, “일찍이, ‘글을 읽으려면 반드시 일만 번을 읽어야 신명한 경지에 통할 수 있다.’는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선생의 말을 듣고 즉시 《두율(杜律)》을 가져다 1만 3천 번을 읽었다.”하였는데, 드디어 그는 시로 세상에 이름이 났던 것이다.
덕계(德溪) 오건(吳健)은 일찍이 역질(疫疾)을 피하여 촌가(村家)에 가 있었는데, 《중용(中庸)》 한 권만 가지고 가서 일만 번을 넘게 읽어서 문리(文理)가 통달하여 붓만 잡으면 글이 이루어졌다. 판서 임유후(任有後)도 젊었을 때 역질을 피하여 나가 있었는데, 그곳에는 책이 없었고 왕발(王勃)의 등왕각서(滕王閣序) 한 편만 있었다. 그래서 역시 일만 번을 넘게 읽었는데, 이후부터 붓만 잡으면 변려문(騈儷文)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것은 모두 이미 있었던 분명한 증거들이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명(明) 나라 선비 가운데 한 사람이 있고 근세에 한 사람이 있다. 명 나라 양천상(楊天祥)은 자가 휴징(休徵)이고 혜주(惠州) 사람이다. 자란 뒤 열심히 글을 읽느라고 낮에는 문밖을 나가지 않고 밤에도 자리에 눕지 않았으며, 겨울 밤에 얼음물로 발을 적시다가 동상이 걸려서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의 글 읽는 방법은 마음으로 책을 대하고 귀로 그 소리를 들었으며, 입으로 외우려고 하지 않고 무리하게 해석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 장마다 백 번씩 읽는 것으로 규정을 정해 놓고, 글을 읽을 때는 설사 일이 생기거나 누가 찾아와도 일절 모른 체하였고, 침식마저 모두 폐하였으며 읽는 횟수를 채운 뒤에야 응대하였다. 글을 지을 때는 붓을 잡으면 천언만어(千言萬語)가 쏟아져 나왔으며, 평생을 무료하게 보내는 날이 없었고 읽지 않은 책이 없었다.
정덕(正德) 정축년(1517, 중종 12)에 진사(進士)가 되어 친구와 형제들에게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내가 약관(弱冠) 때부터 뜻을 가다듬어 글을 읽었는데 이제 13년이 되었다. 1년 중에 명절과 집안의 경삿날 및 병을 앓은 날이 60일에 지나지 않으니, 300일은 모두 글을 읽은 날이다. 매일 3장 이하를 읽은 날이 없으니, 1년이면 900장을 밑돌지 않고, 15년이면 1만 5천 장을 밑돌지 않는다. 옛사람의 1만 권에 비하면 겨우 10분의 1, 2정도이지만, 근세 사람들에게 비한다면 그래도 내가 많을 것이다.
옛날에 상자평(尙子平)이 가사(家事)을 일절 끊어버리고 오악(五嶽)을 두루 유람하였다고 하나, 그것을 어떻게 소매 속에 담아와서 남들에게 알려 줄 수 있었겠는가. 자기 혼자 알고 말았을 것이다. 오악을 유람하려면 산을 넘고 물을 건너는 수고를 감내해야 하며 가족과 헤어진 쓸쓸함을 곱씹어야 한다. 이처럼 심신을 괴롭히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야만 비로소 두루 돌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경(五經)은 천지 만물의 온갖 이치를 갖추고 있으니, 오악에 비하여 어느 것이 더 위대하겠는가. 그 위에 또 제자(諸子)와 역대의 사서(史書)와 백가(百家)의 언론을 보탠다면 바로 이 세상의 동천(洞天)이며 복지(福地)인 것이다. 내가 이들을 읽음에 있어서 책 한 권을 마칠 때마다 마음이 트이고 정신이 유쾌해졌으며 듣고 보는 것이 모두 새로워졌었다. 지금 문밖을 나가지 않은 지 10여 년에 이를 두루 섭렵하였으니, 비록 남에게 알려 주기에는 부족하지만 또한 혼자 알기에는 충분하다.” 하였다.
다른 한 사람은 곧 상사(上舍) 신후담(愼後聃)으로, 자는 이로(耳老)이고 호는 돈와(遯窩)인데, 성호(星湖) 이 선생(李先生)의 문인이며 나와는 동문(同門)이다. 젊었을 때 언젠가 나와 한 번 만나서 독서의 방법에 대해 토론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성현의 글은 만 번쯤 읽지 않으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다. 비근한 일을 들어 비유하자면, 백 아름되는 나무를 베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큰 도끼로 찍어야만 벨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성현의 말씀으로 말하자면 그 의리의 심오함이 어찌 큰 나무에 비교할 정도이겠는가. 반드시 많이 읽은 다음이라야 대강이나마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요즈음 사람들은 글을 읽는 괴로움을 감내하지 못하고 한두 번 훑어보고는 스스로 안다고 자부하니, 뜻을 터득할 수 없음은 명백하다. 이것이야말로 자그마한 낫으로 큰 나무를 베다가 겨우 껍질이나 조금 벗기는 데에 그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하였다.
그때 그 말을 듣고 기뻐했었는데, 그가 죽은 뒤 그가 손자에게 보여준 글 한 편을 얻어보니, 거기에 말하기를,
“하빈노인(河濱老人)이 5, 6세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하였는데 이제 60이 되어 병들어서 죽게 되었다. 그래서 평생에 읽은 글의 횟수를 기록해서 어린 손자에게 보인다. 나는 《중용(中庸)》을 가장 많이 읽었는데, 만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세지 않았으나 아마 수천 번을 밑돌지는 않을 것이다. 《대학(大學)》은 5천 번을 읽은 뒤로는 숫자를 세지 않았으나 만 번에서 그리 멀지 않을 것이며, 《서경(書經)》과 《주역(周易)》은 각각 수천 번을 읽었고, 《시경(詩經)》·《논어(論語)》·《맹자(孟子)》는 각각 천여 번을 읽었고, 《소학(小學)》은 백여 번을 읽었고, 《예기(禮記)》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은 각각 오십 번을 읽었고, 삼전(三傳)은 그 반, 《주례(周禮)》·《의례(儀禮)》·《효경(孝經)》은 각각 수십 번을 읽었다.
《이정전서(二程全書)》·《주자대전(朱子大全)》·《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성리대전(性理大全)》은 종신토록 읽었는데, 그 중에서 백 번 혹은 오십 번씩 초독(抄讀)한 것이 있다. 심씨(沈氏)가 편찬한 《백가유찬(百家類纂)》은 수십 번을 읽었는데, 그 중 《도덕경(道德經)》·《음부경(陰符經)》·《남화경(南華經)》·《참동계(參同契)》는 수백 번까지 읽었으며, 《한위총서(漢魏叢書)》 중에서 《대대례(大戴禮)》·《왕씨역례(王氏易例)》·초씨(焦氏)와 경씨(京氏)의 《역문(易文)》·《신공시설(申公詩說)》 같은 종류는 각각 수십 번 읽었으며, 태사공(太史公)의 《사기(史記)》와 한문공(韓文公)의 《창려집(昌黎集)》은 백 번 혹은 수십 번을 초독(抄讀)했다.
그 밖에 읽은 횟수가 수십 번에 못 미치는 것은 기록하지 않으며, 많이 읽었더라도 단편(單篇)과 소문(小文)인 것도 기록하지 않는다. 손이 떨려서 글씨가 제대로 되지 않아 억지로 써서 너에게 주니, 너는 부디 이 유업(遺業)을 잘 잇기 바란다.” 하였다. 내가 얻은 이 두 글을 기록하여 가숙(家塾)의 자제들에게 보인다.
또 백곡(柏谷) 김득신(金得臣)이 있으니 자가 자공(子公)인데, 성품이 어리석고 멍청하였으나 글 읽기만은 좋아하여 밤낮으로 책을 부지런히 읽었다. 무릇 고문은 만 번이 되지 않으면 중지하지 않았는데, 백이전(伯夷傳)을 특히 좋아하여 무려 1억 1만 8천 번을 읽었기 때문에 그의 소재(小齋)를 억만재(億萬齋)라 이름하였으며, 문장으로 이름을 드날렸다.
효종(孝宗)이 일찍이, "낙엽진 고목에는 찬 안개가 감돌고 古木寒煙裏/ 쓸쓸한 가을 산에 소나기 흩뿌리네 秋山白雨邊 / 저무는 강물에 풍랑이 일어나니 暮江風浪起/ 어부는 서둘러서 뱃머리를 돌리누나 漁子急回船/" 라고 한 그의 시 용호음(龍湖吟) 한 절구를 보고 이르기를, “당인(唐人)에게 부끄럽지 않다.” 하였다.
판서 유재(游齋) 이현석(李玄錫)이 그의 묘갈(墓碣)에 명(銘)하기를, "무회씨와 갈천씨의 순박한 백성이며 無懷葛天之民/ 맹교와 가도처럼 뛰어난 시일러라 孟郊賈島之詩/ 80년 마음 가짐 하루와 같았으니 行心八十年兮如一日/ 억만 번 글 읽음이 기이하고 기이터라 讀書億萬數兮奇又奇/" 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일러 "진실된 기록이다" 하였다.
또 동명(東溟) 정두경(鄭斗卿)은 성품이 진솔하고 구애됨이 없었는데,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거의 일만 번이나 읽었으며, 인조·효종 연간의 문장으로 그를 능가할 자가 없었다. 나의 할아버지께서 태학사(太學士) 하계(霞溪) 권유(權愈)에게 글을 배웠는데, 권공이 일찍이 정공의 사람됨에 대하여 이야기하다가 웃으면서 우리 할아버지에게 말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정공이 사마천의 《사기》에 밝다는 말을 듣고 책을 끼고 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정공이 글을 읽으라고 하기에 읽다가 의심나는 곳에 이르러 질문을 하였더니, 정공이 말하기를, ‘자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였다. ‘이러이러한 말 같습니다.’ 하였더니 정공은 ‘좋다.’ 하였다. 그리고 매번 질문할 때마다 좋다는 말로만 대답하는 것이었다. 내가 머리를 숙인 채 글을 읽다가 마지막 편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정공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둘러보니, 정공은 방 윗목에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말하기를, ‘좋고도 좋구나. 글 뜻은 굳이 알 필요가 없고, 그저 많이 읽기만 하면 된다.’ 하였다.”하고, 인하여 웃고 말하기를,
“글이란 다독(多讀)하여 문장에 능하게 되는 데 있음을 나는 이 노인을 통해서 보았다. 그러니 그대들은 오로지 글을 많이 읽어야 한다.” 하였다고 한다.
지금 두 노인의 독서 방법을 보면 실로 대추를 맛도 보지 않고 통째로 삼켜 버리는 것이나 다를 것이 없지만 그런데도 능히 다독(多讀)을 통해서 문장을 이루었다. 더구나 성현의 글을 읽음에 있어서 이 두 노인이 한 것처럼 공력을 들인다면 그 진취함이 어찌 문장에서만 그치겠는가.
독서는 다만 본문의 정확한 의미를 추구할 따름이며, 지레 이를 요약하여 다른 의미를 찾거나 아니면 너절하게 부연하여 다른 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글을 읽는 일은 조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음란한 소설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유탕(流蕩)한 생각이 일고, 산수(山水)의 청담(淸談)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연하(烟霞)의 자연이 그리워지고, 병진(兵陣)에 관한 설들을 읽으면 자신도 모르게 무맹(武猛)한 기운이 솟구치지만, 성현(聖賢)의 경전(經傳)을 읽으면 지기(志氣)가 화평해져서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이 뭉클인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언제나 잡서(雜書)를 경계한 것이다.(ⓒ 한국고전번역원/홍승균 (역)1996)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독서(讀書)', 『순암집(順菴集)/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제13권/잡저(雜著)/상헌수필(橡軒隨筆)下』-
독서할 때는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
보내 온 별지(別紙)를 읽고 또 읽고는 정밀한 논리와 초절한 식견에 참으로 감탄했다네. 독서할 때는 반드시 의문이 있어야 하니, 의문이 있어야지만 진전이 있기 때문일세. 주자(朱子)도, “독서할 때는 의문이 크면 진보도 크다.” 고 했고, 또 이르기를, “처음 읽을 때는 의문이 있는 것 같지 않다가 읽어갈수록 점점 의문이 생기고 중간에 가서는 마디마디가 의문 투성이가 된다. 일단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의문이 점점 풀리기 시작하여 융회관통(融會貫通, 자세히 이해하여 이치와 사리를 통달함)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데 그제야 비로소 학문이라 할 수 있다.” 하였으니, 독서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고 주자의 그 말이 하나의 큰 단안일세.
대체로 성현들의 말씀은 모두가 평이하고 명백하므로 굳이 굽은 길로 찾아 들어가서 자기가 자신을 의문 속에다 얽어맬 필요는 없는 것이지. 퇴계(退溪) 이자(李子)도 이르기를, “독서를 하면서 굳이 색다른 뜻을 깊이 캐려고 하지 말고 다만 그 본문(本文)을 놓고 그 본문이 가지고 있는 뜻만 찾으라.” 했는데, 그 말이 아주 간단하면서도 꼭 맞는 말이니 한번 생각해 보게나.
경문(經文)은 두 가지 뜻이 있기 마련이니, 후인들로서는 해석할 때 반드시 헤아려 보아 현실적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쪽을 취해야 하는 것일세. 자네도 독서할 때, 전의(傳義)와 틀린 곳이 있으면 그 틀린 곳에서 경중을 헤아려 읊조려 보고 자세히 음미해 보면 자연히 구별되는 수가 있을 것일세. 나의 사사로운 뜻을 마음 속에다 걸어 두고서 선유(先儒)들의 말을 자기 뜻에다 맞추려고 하면 그것은 절대 안 되는 일일세. 만약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자기류(自己流)의 글을 따로 짓는 것이 낫지, 괴롭게 고서(古書)를 읽을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나는 어리석은데다 병까지 들어 지식이 혼미한 몸이라 사실은 의문점을 문답하는 일에 이렇다 저렇다 할 수 없는 입장이나 물어 오신 좋은 뜻을 저버리기 어려워 조목조목 답하여 본 것일세. 그러나 결국 자기 힘을 헤아리지 않은 꼴이 되고 말았군. (ⓒ 한국고전번역원/양홍렬 (역) 1996)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권기명(철신)의 별지에 답함[答權旣明 哲身 別紙]', 『순암집(順菴集)/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제6권/서(書)』-
배움이란 뜻을 겸손히 갖는 것
(상략)독서하면서 의문을 갖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지. 의문이 적으면 진보도 적고, 의문이 많으면 진보도 많다는 주자의 말이 실로 바꿀 수 없는 정론이지. 그러나 계속 의심만 하고 일정한 귀결처(歸結處)가 없으면 마음이 점점 분란해져서 실효를 얻기가 어려운 법이라네.
나는 생각하기를 독서에 있어 자득(自得)이 비록 귀중한 것이지만 자득한 뜻이 먼저 마음 속을 가로막고 있으면, 선유(先儒)들 교훈에 대해 일부러 하자만을 찾아 내려는 병폐가 있을 염려가 있을 것일세. 따라서 우선 선유들의 주석대로 읽고 또 읽어 오래도록 침착하게 음미하고도 의문이 끝내 풀리지 않더라도 또 한번 생각하기를, “나의 일시적 얕은 견해가 선현들보다 나을 이치가 있겠는가. 이는 틀림없이 내가 잘못 본 것이지.”라 해야 하네.
그리고 또 오래도록 읽어도 의문이 종내 풀리지 않을 경우에는 다시 의리(義理)로 질정을 해 보기도 하고 선각자를 찾아 묻기도 하여 지극히 온당한 길을 찾아야 할 것일세. 그리하여 만약 내 견해가 그다지 틀리지 않다면 나도 일설(一說)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일세. 그러나 이 정도로 만족을 느껴 선현들을 경시하는 습관이 생겨서는 절대 안 되네.
학(學)이라는 글자는 《서경》 열명(說命)에 처음으로 보이지. 그 대목을 보면, “배움이란 뜻을 겸손히 갖는 것이니 노력하여 때로 민첩하라.[學遜志懋時敏]” 했거니와, 학문하는 태도는 반드시 겸허해야지만 고인의 교훈 또는 벗들의 말을 쉽게 받아들여 사심(私心)이 앞서는 병폐가 없게 되는 것이네. 이것이 바로 만세(萬世)를 두고 학자들이 맨 처음 학문할 때 받아들여야 할 최고의 교훈인 것일세.
가만히 학자들의 태도를 보면 몇 10권의 책을 읽고 몇 가지 의리를 강구하여, 다소 얻은 것이 있다 싶으면 그만 사사건건 선현들보다 앞서려고 하고, 심지어는 자구 해석이나 문장 단락에 있어 갈기갈기 찢어 발겨서 결국 여기저기서 따오고 이리저리 얽어매고 한다는 핀잔을 면치 못하는데, 그야말로 통렬히 징계해야 할 점이라 하겠네.(하략)
- 안정복(安鼎福, 1712~1791), '권기명에게 답함[答權旣明]', 『순암집(順菴集)/순암선생문집(順菴先生文集)제6권/서(書)』-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홍렬 (역) |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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