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

도연명의 감피백하시(感彼柏下詩)를 보면 평소 혜원(慧遠, 진나라 때 유학 에 정통했던 승려)의 현론(玄論, 사물의 근원을 따지는 논의)을 얻어 들은 걸 알겠으며, 소식(蘇軾)의 적벽부(赤壁賦)를 보면 당시 늘 참료자(參寥子, 송(宋)의 시승(詩僧) 도잠(道潛)의 호. 오잠인(於潛人))와 운치있는 이야기를 나눈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봄바람이 불어 초목이 싹트고 범나비가 홀연히 방초에 가득 모여들때면, 승려 몇사람과 함께 술을 가지고 옛 무덤 사이를 노닐었다. 무덤들이 연달아 총총히 있는 것을 보고는 술한잔 따라 붓고 나서 말하였다. 


"무덤 속의 사람들이여 이 술을 마셨는가? 옛날 세상에 있을 때 송곳 끝만한 이익을 다투고 티끌같은 재물을 모으느라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애쓰고 허덕허덕하며, 손에 움켜쥐려고만 했는가? 이성을 그리고 고운 짝을 찾아 육정은 불타고 음욕은 치솟아 온유향이 노닐며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단꿈을 꾸느라 천지간에 다시 다른 일이 있는 줄 알지 못했던가? 


가세(家勢)를 빙자하여 남을 오만스럽게 대하고 의지할데없는 사람에게 으르렁거리며 스스로를 높인 적이 없는가? 그대가 이 세상을 떠날 때 한 꾸러미의 돈이라도 가지고 갔는지 모르겠네. 그리고 지금 그대는 부부가 한 무덤 속에서 능히 예전처럼 즐기고 있는가?" 이와 같이 수작하고 돌아오면 해는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었다.


시(詩)라는 것은 뜻을 말하는 것이다. 본디 뜻이 저속하면 억지로 청고한 말을 하여도 조리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다. 본디 뜻이 편협(偏狹)하고 비루하면 억지로 달통(達通)한 말을 하여도 사정(事情)에 절실하지 못하게 된다. 시(詩)를 배움에 있어 그뜻을 헤아리지 않는 것은 썩은 땅에서 맑은 샘물을 걸러내려는 것과 같고 냄새나는 가죽나무에서 특이한 향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서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냐? 천인(天人)과 성명(性命)의 이치를 알고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의 나뉨을 살펴서, 찌꺼기를 걸러 맑고 참됨이 발현되게 하면 된다. 


그러면 도연명은 정신과 형체가 서로 부리는 이치를 알았으니 더 말할 게 있겠는가? 두보는 천품이 본디 높아서 사람됨이 충후하고 측은지심을 가져 어진데다가 호방하고 굳은 기상을 겸했다. 보통 사람들은 평생 마음을 닦아도 본원이 맑고 투명한 것이 두보의 경지에 이르기는 쉽지 않다, 그 아래 급에 있는 여러 시인도 모두 당할 수 없는 기상(氣象)과 모방할 수 없는 재사(材思)가 있다.


역(易)이란 책은 한 글자 한 구절이라도 괘상(卦象, 주역 점을 칠때 길흉을 나타내는 象)에 말미암지않은 것이 없다. 만약 성인(聖人)이 허구로 꾸며 설법하기를 마치 선가의 참선의 화두가 한 사물에만 전적으로 집중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스스로 통하기 어렵다. 왕필((王弼)이 설괘(說卦)를 버리고 역(易)을 풀이하려 하였으니, 또한 어리석지 아니한가?


천책선사(天頙禪師,13세기 고려의 고승인 진정국사(眞靜國師))가, "시장을 지나가다 보면 좌상이나 행상이 조그만 엽전을 가지고 와글와글 떠들면서 시장의 이끗을 독점하려고 다투는데, 이는 수많은 모기가 항아리속에서 어지러이 앵앵거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선(禪)에 빠져서 그렇지 말인즉 옳다.


천책선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부잣집아이가 평생 한 글자도 읽지 않고 오로지 교만한 자세로 협객노릇만을 일삼아, 월장(月杖)과 성구에 금안장, 옥굴레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주야로 큰 거리를 배회하면서서 휘젓고 다니는데, 이를 구경하는 자들이 담처럼 늘어서 있으니, 딱하도다. 나는 저들과 환세(幻世, 덧없는 세상)에서 환생(幻生, 허깨비같은 삶)하고 있다. 저들이 어떻게 환신(幻身, 껍데기 몸뚱아리, 허깨비 몸. 이하 같은 의미)으로 환마(幻馬)를 타고 환로(幻路)를 달리고 환기(幻技)를 잘하여 환인(幻人)으로 하여금 환사(幻事)를 보게 하는 것이 다시 환(幻) 위에 환(幻)이 또 환(幻)이 된다는 것을 알겠는가? 이래서 밖에 나갔다가 번거로이 떠드는 것을 보면 서글픈 마음만 더할 뿐이다." (원문생략, 박철상 역)


-정약용(丁若鏞, 1762~ 1836), '초의선사 의순에게 주는 권면의 글(위초의승의순증언 爲草衣僧意洵贈言)',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증언(贈言)-


▲옮긴 글출처: 박철상 지음, '서재 에 살다: 조선 지식인 24인 의 서재 이야기'(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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