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술수학(術數學)은 학문이 아니라 사람을 미혹하는 술책이다
술수학(術數學)은 학문이 아니라 혹술(惑術, 사람을 미혹하는 술책)이다. 한밤중에 일어나 하늘을 쳐다보고 뜰을 거닐면서 사람들에게, “형혹성(熒惑星, 화성)이 심성(心星, 전갈자리의 안타레스, 붉은 빛을 띔)의 분야를 침범하였다. 이는 간신(奸臣)이 임금의 권세를 끼고 나라를 도모할 조짐이다.” 하기도 하고, 또, “천랑성(天狼星, 시리우스, 눈으로 볼 수 있는 항성중에 가장 밝음)이 자미성(紫微星, 북두칠성중 가장 밝은 별)을 범하였다. 내년에는 틀림없이 병란(兵亂)이 있을 것이다.” 하기도 하고, 또, “세성(歲星, 목성)이 기성(箕星, 옛 별자리 29개 중에 동쪽 7개의 별자리중 하나로 4개의 별이 마치 곡식을 터는 키처럼 보임. 바람을 주관한다고 보았음)의 분야에 와 있다. 우리나라가 이 때문에 편안할 수 있을 것이다.” 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갑자기 공포에 젖어 흐느끼며 도선(道詵)의《비기(秘記)》와《정감록(鄭鑑錄)》의 참설(讖說, 예언)을 말하면서, “아무 해에는 반드시 병란이 일어날 것이다.” 하거나, 또는, “아무 해에는 반드시 큰 옥사(獄事)가 일어나 피가 흘러 시내를 이룰 것이고, 이 때문에 인종(人種)이 끊어질 것이다.” 한다.
그리하여 자기의 인척(姻戚)과 친구들에게 토지와 가옥을 팔고 선조의 분묘(墳墓)를 저버린 채 호랑이와 표범이 득실거리는 깊은 산골짜기로 들어가 난(難)이 지나가길 기다리라고 권고한다.
또 갑자기 근심에 잠긴 안색으로 사이를 두었다가 말하기를, “예전에 우리 노선생(老先生)께서는 귀신과 통하였으므로 귀신을 부릴 수가 있었다. 그래서 편지를 발송한 지 한식경(食頃)이면 이미 8백 리까지 닿을 수가 있었기 때문에 멀리 있는 사람들이 즉시 편지를 뜯어보고는 자제들을 데리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난을 피하였다. 또 노선생께서는 나뭇잎을 소매 속에 넣었다가 냅다 뿌리면 이것이 모두 병사와 마필이 되어 떠들썩하였다.” 하고,
행장을 풀어 세 폭(幅)의 그림을 내어놓고는, “이것은 진인(眞人 도사(道士))이 옥황상제에게 조회하는 그림이고, 이것은 신선(神仙)이 학(鶴)을 타고 날아가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고, 이것은 목마른 말이 시내로 달려가는 그림이다. 이것들은 모두 명당(明堂) 자리인데,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모르고 나 혼자만이 그 혈(穴)과 좌향(坐向)을 알고 있다. 참으로 이 자리에다 묘를 쓴다면 자손들이 크게 길(吉)할 것이다.” 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세수를 깨끗이 하고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단정히 앉아서 태극도(太極圖)ㆍ하도(河圖)ㆍ낙서(洛書)ㆍ구궁(九宮)의 수(數)*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이기(理氣)와 선악(善惡)의 동이(同異, 같은 점과 다른 점)에 대하여 변론한다. 이럴 때는 그대로 점잖은 하나의 성리학(性理學) 선생인 것이다.
아, 실상이 없는 명예를 도둑질하여 무거운 명망(名望)을 짊어지고 여러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추대받는 사람은 바로 이 술수학을 하는 선생들인 것이다. 참되고 올바르고 거짓 없는 선비로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강명(講明, 배우고 익혀 밝힘)하면서 효제(孝悌)를 근본으로 삼고 보이지 않는 일에 삼가는 한편, 예악(禮樂)과 형정(刑政)의 글을 연구하는 이가 있으면, 이렇게 비웃는다.
“저 사람은 내일의 일도 모른 채 불이 붙은 나뭇더미 위에 앉아서 시(詩)와 예(禮)를 얘기하고 있으니, 어떻게 우리와 함께 할 수 있겠는가.”
성인(聖人)은 글을 천하 사람에 남겨 깊은 뜻을 담아 각기 스스로 사용할 수 있게 하였다. 때문에 공자(孔子)는 《주역(周易)》의 십익(十翼,역(易)의 뜻을 알기 쉽게 설명한 책)을 지었고 주자(朱子)는 《참동계(參同契 역(易)의 원리로써 풀이한 책)》의 주석(註釋)을 내었으나 뒷사람들은 그 깊은 뜻을 몰랐다. 그리하여 저 우매하고 슬기롭지 못한 사람들은 술수학만을 높이고 《주역》과 《참동계》는 하찮게 여기면서 날로 유음(幽陰, 버들의 그늘, 즉 음침한 그늘을 의미)하고 사벽(邪僻, 마음이 간사하고 한쪽으로만 치우침)한 데로만 줄달음치니 누가 이를 금지할 수 있겠는가.
천문지(天文志)와 오행지(五行志)에 기록된 내용을 역대(歷代)로 견강부회(牽强傅會)하여 왔지만 하나도 증험된 것이 없다. 별의 행로(行路)는 일정한 도수(度數)가 있어 이를 문란시킬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미혹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중국의 연경(燕京)에서 마술을 부리는 사람들은 은전(銀錢) 한두 닢을 받고 그 기술을 연출해 보여주는데, 통역관(通譯官)으로 갔던 사람들이 해마다 이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말하여 주고 있다. 따라서 이 마술에 미혹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청(淸) 나라의 학자 서건학(徐乾學)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葬事)지낼 적에 풍수설(風水說)을 배척하면서 이는《주역》에 참여시킬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풍수설에 미혹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에 의거 미루어 나간다면, 복서(卜筮 다양항 방식으로 점치는 행위)ㆍ간상(看相, 관상을 보는 것)ㆍ성요(星耀, 별점)ㆍ두수(斗數, 숫자점) 등 술수(術數)로 부연하는 모든 것은 다 혹술(惑術)일 뿐 학문이 아니다.
요(堯) 임금은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곤(鯀)에게 일을 맡겼다가 실패하였고, 순(舜) 임금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남방을 순행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붕(崩)하였고, 주공(周公)도 반역할 것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관숙(管叔 주공의 형)으로 하여금 은(殷)을 감시하게 하였고, 공자(孔子)도 미리 알지 못했기 때문에 광(匡) 땅에서 양호(陽虎) 때문에 액(厄)을 당하여 죽음을 당할 뻔하였다.
그런데 이제 미리 알지 못하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 기필코 미리 아는 자를 찾아서 귀의하려 하니, 이 어찌 미혹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저들은 괴이한 일만을 좋아하면서 은연중 스스로 미리 아는 성인(聖人)인 것처럼 자처함은 물론,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인 줄 전혀 모르고 있다. 이런 사람과 어떻게 손잡고 같이 요순의 문하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이하 생략)
※[역자 주]
1. 태극도(太極圖)ㆍ하도(河圖)ㆍ낙서(洛書)ㆍ구궁(九宮) : 태극도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가 무극(無極)인 태극에서부터 음양(陰陽)ㆍ오행(五行)과 만물의 생성 과정을 그린 그림. 하도(河圖)는 복희씨(伏羲氏) 때 황하(黃河)에서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왔다는 52개의 점(點)을 말하고, 낙서(洛書)는 우(禹) 임금 때 낙수(洛水)에서 나온 신귀(神龜)의 등에 있었다고 하는 45개의 점인데, 이 두 가지가 《주역(周易)》의 기본 이치가 된다. 구궁은 음양가(陰陽家)들이 구성(九星)을 오행(五行)과 팔괘(八卦)의 방위(方位)에 맞추어 길흉과 화복을 판단해 내는 것을 말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술수학(術數學)',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1권/논(論)/오학론(五學論)5-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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