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문장은 외적인데서 구할 수 없는 것

문장학(文章學)은 사도(斯道 유교의 도리와 도덕)의 큰 해독이다. 이른바 문장이란 어떤 것인가. 문장이라는 것이 허공에 걸려 있고 땅에 펼쳐져 있어 바라볼 수 있고 달려가 잡을 수 있는 것인가.


옛사람은 중화(中和, 온화함과 조화로움을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와 지용(祗庸, 공손한 가운데 상식적인 도리를 지키는 것, 즉 떳떳하고 당당함)으로 인격을 수양하고 효제(孝悌)와 충신(忠信)으로 행동을 성실히 하였다. 또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으로 기본을 배양했고 《춘추(春秋)》와《역경》의 상사(象辭, 기록된 것을 미루어 현상을 헤아림)로 사변(事變 천지만물의 변화, 천재지변 )을 통달하여 천지의 올바른 이치와 만물의 갖가지 실정을 두루 알았다. 


그리하여 마음속에 축적된 지식이, 대지가 만물을 짊어지고 대해가 온갖 물을 포용한 듯,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구름과 터져 나갈 것 같은 우레가 서린 듯하여, 끝내 그대로 축적하고만 있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렇게 된 뒤 어떤 사물(事物)을 만나게 되면, 동감을 느낄 수도 있고 동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어 감동하기도 하고 격분하는 데 따라 이를 서술하여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거대한 바닷물이 소용돌이치고 눈부신 태양이 찬란히 빛나는 것과 같아서, 가까이는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고 멀리는 천지와 귀신도 감동시킬 수 있다. 이것이 이른바 문장인 것이다. 


따라서 문장은 외적인 데서 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때문에 우주(宇宙)에 있는 문장(文章) 가운데 정미(精微)롭고 교묘(巧妙)한 것은 《역경(易經)》이고, 온유(溫柔)하면서 격절(激切)한 것은 《시경(詩經)》이고, 전아(典雅)하면서 치밀(緻密)한 것은 《서경(書經)》이고, 상세(詳細)하여 혼란시킬 수 없는 것은 《예기(禮記)》이고, 조목이 분명하여 뒤섞을 수 없는 것은 《주례(周禮)》이고, 내치고 허여하는 것이 괴기(瓌奇)하여 어길 수 없는 것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고, 현명하고 성스러워 전혀 하자가 없는 것은 《논어(論語)》이고, 참으로 성(性)과 도(道)의 본체(本體)를 알아서 줄기와 가지를 조리 있게 분석한 것은 《맹자(孟子)》이고, 엄격한 분석에 깊고도 그윽한 것은 《노자(老子)》이다. 이 이하는 순수한 것이 적다고 하겠다.


사마천(司馬遷)은 기이함을 좋아하고 의협(義俠)을 숭상하여 스스로 예의(禮義)를 외면하였고, 양웅(揚雄)은 도(道)를 몰랐고, 유향(劉向)은 참위(讖緯)에 빠졌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배우(俳優)처럼 스스로를 자랑하였다. 이 이하는 단편적인 아름다움이 있기는 하지만 비평할 가치가 없다.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은 문장의 중시조(中始祖)라고 일컬어왔으나 근본을 망각하였으니, 어떻게 중흥시킬 수 있었겠는가. 


문장은 가슴 깊은 곳에 축적되어 있는 것에서부터 발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모두 외형만 답습하여 스스로 걸출한 체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옛날의 이른바 문장이라는 것이겠는가.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歐陽脩)ㆍ소식(蘇軾)이 지은 이른바 서문(序文)ㆍ기문(記文) 등등의 글은 거개 모두가 화려하긴 해도 알맹이가 없고 기이하긴 해도 올바르지가 못하였다. 어려서 이 글들을 읽을 적엔 흔연히 기쁨을 느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안으로 몸을 수양하고 어버이를 섬길 수가 없으며, 밖으로 임금을 옳은 길로 보도(輔導, 잘 도와서 좋은데로 인도함)하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가 없다. 그래서 일생토록 읽어보아도 영락(零落, 세력이나 살림살이가 줄어들어 보잘것이 없이됨)된 채 실의에 빠지기만 할 뿐 끝내 이것으로 천하와 국가를 다스릴 수는 없으니, 이야말로 오도(吾道 유교(儒敎)의 도)를 좀먹는 좀벌레인 것이다. 이 문장의 해독은 양주(楊朱)ㆍ묵적(墨翟)ㆍ노자(老子)ㆍ불교(佛敎)보다도 더 심한 것이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양주ㆍ묵적ㆍ노자ㆍ불교는 각기 논지(論旨)의 차이점은 있지만, 궁극적인 요점은 모두가 자신을 억제하여 사욕을 끊음으로써 선(善)을 행하고 악(惡)을 버리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은 자신의 사명으로 여긴 것이 문장뿐이다. 문장이 어떻게 천성(天性)을 보전하여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온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고 향기로운 술이 몸 속에 스며들 듯한 짙은 열락(悅樂)에 빠져 함께 동화됨으로써 성명(性命)의 근본과 민국(民國 나라와 백성)의 일을 까마득히 잊게 만드는 것이 문장학(文章學)이다. 이것을 성인(聖人)이 취하겠는가.


지금에 이른바 문장학이란 것은, 또 저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의 저술은 너무 순박하고 올발라서 무미건조하다 하여 나관중(羅貫中, 삼국지연의, 수호전등을 지은 원대의 소설가)을 시조(始祖)로, 시내암(施耐菴, 명대의 소설가, 나관중과 함께 수호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음)을 원조(遠祖, 고조이전의 먼 조상)로, 김성탄(金聖歎, 청말의 문예비평가)을 하늘로, 곽청라(郭靑螺, 명대의 문인인 곽자장(郭子章), 성경을 번역한 이로 알려져 있음)를 땅으로 떠받들고 있다. 그리고 우통(尤侗)ㆍ전겸익(錢謙益)ㆍ원매(袁枚)ㆍ모신(毛甡) 등의 문장은 유학(儒學) 같기도 하고 불학(佛學) 같기도 하여 기괴하고 음란하기 그지없는 것으로, 일체가 남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을 스승으로 받들어 숭배하고 있다.


이들이 짓는 시(詩)나 사(詞)는 쓸쓸한 듯, 슬픈 듯, 그윽한 듯, 오열하는 듯, 숨막혀 비비꼬는 듯, 산의 기복이 극심한 듯하여, 한결같이 넋이 녹아버리고 창자가 끊어지게 한 다음에야 그만둔다. 그리고는 이것으로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높이면서 늙음이 이른다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거드름을 피우고 있으니, 이들이 오도(吾道)에 끼치는 폐해는 또 한유ㆍ유종원ㆍ구양수ㆍ소식 등의 정도가 아닌 것이다. 


입으로는 육경(六經)을 이야기하고 손으로는 천고(千古)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문장학을 하는 이런 사람들과는 끝내 같이 손잡고 요순(堯舜)과 주공(周公)ㆍ공자(孔子)의 문하로 들어갈 수가 없다.


※[역자 주]양주(楊朱)ㆍ묵적(墨翟) : 모두 전국 시대 사람들로 양주는 극단의 이기주의를 주장하였고 묵적은 극단의 박애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들은 모두 맹자(孟子)에게 이단(異端)으로 배척당하였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오학론 3(五學論三)',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1권/논(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역)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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