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오학론(五學論)

이 세상을 주관(主管)하면서 온 천하를 배우(俳優)가 연극을 연출하는 것과 같은 기교로 통솔하는 것이 과거학(科擧學)이다.


요순과 주공ㆍ공자의 글을 읽고 노자ㆍ불교ㆍ황교(黃敎)ㆍ회교(回敎)의 교리를 배척하며, 시례(詩禮)를 얘기하고 사전(史傳, 역사와 기록)을 논할 적에는 그대로 유관(儒冠)에 유복(儒服)을 입은 하나의 으젓한 선비이다. 그러나 그 실상을 조사하여 보면, 글귀를 표절하여 아름답게 꾸며서 한때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킨 것일 뿐, 요순을 진정으로 사모하고 있지도 않고 노자ㆍ불교를 진정으로 미워하지도 않음은 물론, 마음을 다스리고 행동을 검속하는 법과 임금의 잘못을 바루고 백성에게 은택을 베푸는 법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항우(項羽)와 패공(沛公 유방(劉邦)이 한 고조(漢高祖)가 되기 전의 칭호)의 일로 제목(題目)을 내걸고서 경박하고 패려한 단어들을 구사하여 글짓는 것을 능사로 여기고 있다.


실용성이 없는 말들을 남발, 허황하기 짝이 없는 내용의 글을 지어 스스로 자신의 풍부한 식견을 자랑함으로써 과거보는 날 급제(及第)의 영광을 따내는 것이 과거학이다. 이들은 성리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엉터리다.[詭 속일 궤]’ 라고 꾸짖고 훈고학을 하는 사람에게는 ‘괴벽하다.[僻 궁박할 피, 가볍고 천박함]’고 질타하는가 하면, 문장학을 하는 사람은 비루하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스스로 하는 것을 보면 모두가 문장학인 것이다. 그리하여 자기들의 격식에 맞게 지은 것은, ‘하, 잘 지었구나.’ 하고 격식에 벗어난 것은 ‘이것도 글이냐?’ 하는가 하면, 공교하게 지은 것은 신선처럼 떠받들고 졸렬하게 지은 것은 노예처럼 멸시한다. 어쩌다 요행으로 명성을 얻게 되면 아버지는 효자를 두었다고 대견해 하고 임금은 양신(良臣)을 얻었다고 경하(慶賀, 기쁘고 즐거운 일에 대하여 축하의 뜻을 표함)한다. 일가 친척들이 사랑하고 친구들도 존대한다. 


그러나 역경(逆境)에 빠져 뜻을 얻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증삼(曾參)과 미생(尾生) 같은 훌륭한 행실이 있고 저리자(樗里子 전국시대 진의 대신인 감무(甘茂))와 서수(犀首 전국시대 대표적 유세가인 공손연(公孫淵)을 가리키는 말) 같은 훌륭한 지혜를 지녔다 해도 거개가 실의에 빠져 초췌한 모습으로 슬픈 한을 안은 채 죽어가고 만다. 아, 이 얼마나 고르지 못한 일인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많은 백성들은 거개가 무지하고 무식하다. 때문에 경서(經書)와 사책(史冊)을 공부하여 정사(政事)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천 명이나 백 명 가운데 한 사람뿐이다. 지금 천하의 총명하고 슬기로운 재능이 있는 이들을 모아 일률적으로 모두 과거(科擧)라고 하는 격식에 집어넣고는 본인의 개성은 아랑곳없이 마구 짓이기고 있으니, 어찌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있겠는가.


일단 과거학에 빠져버리면, 예악(禮樂)은 자신과 관계 없는 일로 여기고 형정(刑政)을 잡된 일로 여긴다. 그리하여 지방관(地方官)에 제수(除授)되면 사무(事務)에 깜깜하여 아전들이 하자는 대로 따르기만 한다. 내직(內職)으로 들어와 재부(財賦, 국가의 세무를 관장하는 업무)나 옥송(獄訟, 사법과 형사재판 업무)을 담당하는 관원에 임명되면 우두커니 자리만 지키고 앉아 봉급만 타먹으면서 오직 전례(前例)만을 물어 일을 처리하려 하고, 외직(外職)으로 나아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적을 막는 권한을 맡기면 즉시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않았다고 하면서 무인(武人)을 추대하여 전열(前列, 전장의 최전방)에 세운다. 이런 사람을 천하에 어디다 쓸 수 있겠는가.


일본(日本)은 해외(海外)의 작은 나라이지만 그 나라에는 과거학이 없기 때문에 문학(文學)은 구이(九夷, 아홉 오랑캐 나라)*에서 으뜸이고 무력(武力)은 중국(中國)과 맞먹는다. 또 나라를 유지하여 가는 규모(規模)와 기강(紀綱)이 정제되어 문란하지 않고 조리가 있으니, 이것이 드러난 효험이 아닌가.


이제는 과거학도 이미 쇠진했다. 그래서 명문(名門) 거족(巨族)의 자제들은 이를 공부하려 하지 않고, 오직 저 시골 구석의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만이 공부하고 있다. 따라서 문예(文藝)를 겨루는 날에는 권세가의 자제들이 시정(市井)의 노예(奴隸)들을 불러모아 이들에게 접건(摺巾, 남성용 고깔모자로 하급 관리가 씀)과 단유(短襦, 짧고 가벼운 저고리, 요즘으로 말하면 같은 패거리가 입는 조끼형 유니폼)를 입힌다. 그러면 이들은 눈을 부라리고 주먹을 휘두르면서 자기 주인의 시험지를 먼저 올리기 위해 첨간(簽竿)*만 바라보고 서로 앞을 다투어 몽둥이질을 한다. 급기야 합격자를 발표할 적에 보면 시(豕) 자와 해(亥) 자도 분별하지 못하는 젖내나는 어린애가 나아가 장원(壯元)을 차지하게 되기 일쑤다. 


이러니 이 과거학이 쇠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하늘이 돌보아 과거학이 쇠진한 것을 인하여 달리 변경시키게 된다면, 이는 백성들의 복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과거학을 하는 사람과 같이 손잡고 요순(堯舜)의 문하로 들어갈 수가 없다.


※[역자 주]

1. 구이(九夷) : 동방(東方)의 오랑캐가 9종이 있다는 말로, 견이(畎夷)ㆍ어이(於夷)ㆍ방이(方夷)ㆍ황이(黃夷)ㆍ백이(白夷)ㆍ적이(赤夷)ㆍ현이(玄夷)ㆍ풍이(風夷)ㆍ양이(陽夷)라고도 하고, 현도(玄菟)ㆍ낙랑(樂浪)ㆍ고려(高麗)ㆍ만식(滿飾)ㆍ부유(鳧臾 부여(扶餘)임)ㆍ색가(索家)ㆍ동도(東屠)ㆍ왜인(倭人)ㆍ천비(天鄙)라고도 한다.

2. 첨간(簽竿) : 바구니를 장대에 달아 놓은 것인데, 시험지를 여기에다 넣어야 채점관 앞으로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세도가 자제들이 무뢰배를 동원하여 자기 것만 넣고 다른 사람은 못넣게 몽둥이질을 했다고 한다. 과거가 빚어낸 일종의 퇴폐적인 현상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오학론(五學論) 1',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1권/논(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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