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용모로 사람을 판단하고 취하는 어리석음
상(相 용모(容貌)를 말함)은 익히는 것[習]으로 인하여 변(變)하고, 형세는 상(相)으로 인하여 이루어지는데, 그 형국(形局, 사람이나 사물의 모양이나 상태)이다 유년(流年, 해마다보는 사주, 즉 사주팔자)이다의 설(說)을 하는 사람은 거짓이다. 아주 어린아이가 배를 땅에 대고 엉금엉금 길 적에 그 용모를 보면 예쁠 뿐이다. 하지만 그가 장성해서는 무리가 나누어지게 되는데, 무리가 나누어짐으로써 익히는 것이 서로 달라지고, 익히는 것이 서로 달라짐으로써 상(相)도 이로 인해 변하게 된다.(옮긴이 주: 사람의 상相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고정관념에 따라 그 용모를 보고 사람을 이러쿵 저러쿵 판단하는 결정론적 사회 통념을 비판하고 있다)
서당(書堂)의 무리는 그 상이 아름답고, 시장(市場)의 무리는 그 상이 검고, 목동(牧童)의 무리는 그 상이 산란(散亂)하고, 강패(江牌 뱃사공)나 마조(馬弔 마부(馬夫)) 같은 무리는 그 상이 사납고 약빠르다. 대체로 그 익히는 것이 오래됨으로써 그 성품이 날로 옮겨가게 되니, 그 마음속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 겉으로 나타나서, 상이 이로 인하여 변하게 되는데, 사람들은 그 상의 변한 것을 보고는 또한 말하기를 ‘그 상이 이렇게 생겼기 때문에 그 익히는 것이 저와 같다.’ 하니, 아 그것은 틀린 말이다.
대저 학문을 익힌 사람은 사리를 통달하는 데 효과가 있고, 이(利)를 익힌 사람은 재물을 모으는 데 효과가 있고, 힘을 익힌 사람은 비천한 일에 몸을 마치고, 악(惡)을 익힌 사람은 패망(敗亡)한 데 몸을 마치게 되니, 익힘과 효과가 아울러 진보(進步)함으로써 효과와 상이 모두 변하게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상의 변하는 것을 보고 또한 말하기를 ‘그 상이 이러하기 때문에 그 효과가 저와 같은 것이다.’ 하니, 아 어쩌면 그렇게 어리석단 말인가?
어린아이가 있는데 그의 눈동자[眸]가 빛나면 부모(父母)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가르칠 만하다.’ 하고, 그 아이를 위해서 서적(書籍)을 사들이고, 그 아이를 위해서 스승을 정하게 되고, 선생(先生)은 말하기를 ‘이 아이는 가르칠 만하다.’ 하여, 그 아이에게 붓[筆]ㆍ먹[墨]ㆍ연분(鉛粉)ㆍ서판(書板)을 더욱더 주게 되니, 이 아이는 더욱 공부에 힘쓰고 날로 더 부지런하게 된다. 대부(大夫)는 이 사람을 천거하기를 ‘이 사람은 쓸 만합니다.’ 하고, 임금은 그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대우할 만하다.’ 하여, 그를 권장하고 추켜세우고 칭찬하고 선발(選拔)하여 이윽고 재상(宰相)에 이르게 된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얼굴이 풍만하게 생겼으면 아이의 부모는 말하기를 ‘이 아이는 부자(富者)가 될 만하다.’ 하여, 재산을 더욱더 주고, 부인(富人)은 그 아이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부릴 만하다.’ 하여, 자본(資本)을 더욱더 주게 되니, 이 아이는 더욱 힘쓰고 날로 부지런하여 사방(四方)으로 장사를 다닌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가 상업(商業)을 부흥시킬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를 주인(主人)으로 삼으니 잘될 사람을 더욱 도와주어 조금 뒤에는 백만장자가 되어버린다.
어떤 아이가 있는데 미모(眉毛 눈썹)가 더부룩하고, 또 어떤 아이는 콧구멍이 밖으로 드러났으면, 그 아이의 부모와 사장(師長)들은 양성(養成)하고 협조(協助)하는 것을 일체 이상의 것과 반대로 하니, 이들이 어찌 자기 몸을 귀(貴)하고 부(富)하게 할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것은 그 상(相)으로 인하여 그 형세를 이루고, 그 형세로 인하여 그 상을 이루게 된 것인데, 사람들은 그 상의 이루어진 것을 보고는 또 말하기를 ‘그 상이 이와 같기 때문에 그 이룬 것이 저와 같다.’ 하니, 아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단 말인가?
세상에는 진실로 재덕(才德)을 충분히 간직하고도 액궁(阨窮)하여 그 재덕을 발휘하지 못한 사람이 있는데, 상에다 그 허물을 돌리지만, 그 상을 따지지 않고 이 사람을 우대(優待)했더라면 이 사람도 재상(宰相)이 되었을 것이요, 이해에 밝고 귀천에 밝았는데도 종신토록 곤궁한 사람이 있는데, 역시 상에다가 허물을 돌리지만, 그 상을 따지지 않고 이 사람에게 자본(資本)을 대주었더라면 또한 부자(富者)가 되었을 것이다.
하물며 거처(居處)는 기질(氣質)을 변화시키고, 봉양(奉養, 윗어른을 모시는 일 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보전하는 일)은 신체를 변화시키며, 부귀는 그 뜻을 음란하게 하고, 우환(憂患)은 그 마음을 슬프게 하여 아침에는 무성하다가 저녁에는 시들게 된 사람도 있고, 어제는 초췌(憔悴)했다가 오늘은 살쪄서 윤택해진 사람도 있게 되니, 상(相)을 어떻게 정할 것인가?
사서인(士庶人)이 상(相)을 믿으면 직업을 잃게 되고, 경대부(卿大夫)가 상을 믿으면 그 친구를 잃게 되고, 임금이 상을 믿으면 신하를 잃게 된다. 공자가 말하기를,
“용모(容貌)로써 사람을 취했더라면 자우(子羽)에게 실수할 뻔했다.” 하였으니, 참으로 성인(聖人)이다.
**[역자 주]자우(子羽) : 춘추(春秋) 시대 노(魯) 나라 사람 담대멸명(澹臺滅明)의 자(字)인데, 담대멸명은 얼굴이 매우 못생겼다고 한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상론(相論)',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1권/논(論)-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임정기 (역) ┃ 1983
"옛사람이 말하기를, "면상(面相, 앞얼굴)이 배상(背相, 뒷모습, 직접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진 부분)만 못하고 배상이 심상(心相)만 못하다." 하였으나 내가 생각하건대, 심상(心相)은 오히려 미진(애매모호)한 데가 있으므로 '심상이 행사(行事)의 상(相, 행사상이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구체적인 행위로 드러나는 상)만 못하다.'라고 하겠다. 면상(面相)의 길흉은 마침내는 행사에 나타나고, 배상의 길흉도 행사에 나타나고, 심상의 길흉도 반드시 행사에 나타나니, 행사를 버리고서 사람의 상을 헤아리고자 하는 것은 곧 마감하지 않은 문기(文記)와 같은 것이다. 전일의 행사는 곧 이미 징험한 상이고, 오늘날의 행사는 곧 바야흐로 시험하고 있는 상이고, 장래의 행사는 징험을 기다리는 상이 된다. 이 세 상(相) 중에 그 두 상을 알면, 그 나머지 한 상은 사례를 견주어 헤아릴 수 있다. 앞을 미루어서 뒤를 헤아리는 데는 변통하는 방법이 있고, 이것을 들어 저것을 밝히는 데는 손을 쓰는 방법이 있다. 면상ㆍ배상ㆍ심상은 다 행사의 상에서 참험(參驗, 참고하여 조사함)한다. 면상은 인거(引據, 인용의 근거)하는 단서가 있고, 배상은 정명(訂明 바로잡아 밝힘)하는 단서가 있고, 심상은 지적(指的 지향하는 표준)하는 실지가 있으니 다 쓸 만한 상이 된다. 만약 행사를 참험하지 않으면, 비유컨대 사람이 보지 않는 방안에서 세상 일을 배포하는 것과 같다. -혜강 최한기, 행사상(行事相)/인정(人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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