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이는 자들에 대하여
마음으로 사귀고 만나 보지 못한 터에 살아 있을 날이 얼마 아니 된다고 하신 말씀은 사람을 우러러 슬퍼하고 굽어 탄식하여 마지않게 하였습니다. 내가 오래 의령(宜寧) 길을 떠나지 못하였으니, 인정에 어긋난 점이 있습니다. 이는 다만 몸이 세상과 맞지 않고 쇠함과 병이 서로 얽히어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인데, 결국 천리 길을 떠나려던 뜻마저도 같은 세상에 살면서도 만나지 못하는 탄식으로 되어 버렸으니, 어찌 오로지 조물주의 처분으로만 돌릴 수 있겠습니까. 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부끄럽습니다.
보내 주신 편지에 이른바 학자가 실력도 없이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이는 데 대한 말씀은, 그대만 염려하는 문제가 아니라 나도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꾸짖어 억제하고자 하는 것도 용이한 일이 아니니, 어째서 그렇겠습니까? 마음가짐이 본래부터 세상을 속이고 실력도 없이 이름을 훔치려고 하는 자는 말할 필요도 없고, 다만 생각건대 하늘이 떳떳한 마음을 내려 주어 사람들이 모두 선(善)을 좋아하니, 천하의 영재(英才)로서 성심으로 학문을 원하는 자가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만일 세환(世患)을 범할 염려가 있다 해서 일체 꾸짖어 그만두게 한다면, 이것은 상제가 선을 내려 주신 뜻을 위반하고 천하 사람들이 도(道)를 지향하는 길을 끊어 버리는 것이니, 내가 하늘과 성인의 문정(門庭)에 죄를 얻은 것이 너무 많은데 어느 겨를에 다른 사람이 속이고 훔치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가령 이것을 따져서 구별하고 꾸짖어서 억제하고자 한들 사람의 자품이 만 가지로 달라, 처음 배울 때 예리한 자는 등급을 뛰어넘고 둔한 자는 막혀서 통하지 않으며, 옛것을 사모하는 자는 꾸미는 것 같고 큰 데 뜻을 둔 자는 미친 것 같으며, 익힘이 미숙한 자는 거짓 같고 미끄러졌다 다시 일어난 자는 속이는 것 같으며, 처음에는 정성껏 하다가 끝에 가서는 소홀히 하는 자도 있고 금새 그만두었다가 바로 회복하는 자도 있으며, 병이 겉에 있는 자도 있고 속에 있는 자도 있으니, 무릇 이와 같은 유형을 일일이 들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뜻을 다하여 성취하려고 애쓰지 않는 자는 실로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마음은 가상합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은 일부에 불과한데 어찌 일률적으로 세상을 속이고 이름을 훔친다고 몰아서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 역시 서로 어울려 같이 힘쓸 처지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치를 논해 보면 이렇다는 것뿐이지 이런 책임을 맡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따로 있습니다. 결코 나같이 병으로 쓸모없어져 숨어 살며 도에 어둡고 학문에 어두운 사람에게 있지 않은데, 공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당치도 않은 말을 하신단 말입니까.
대체 공께서 지목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비록 정당하지 못할지라도 그의 병세가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자라면 그렇게 꾸짖어 억제해서는 안 됩니다. 혹 불행히도 참으로 속이고 훔칠 마음이 있는 자라면, 우리가 그에게 꾸짖음과 억제를 당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인데 또 어찌 감히 억지로 기세(氣勢)를 부려서 도리어 그를 꾸짖고 억제할 수가 있겠습니까.
화와 복이 오는 것은 원래 조물주의 처분에 의하기 마련이니, 실로 '생명의 장단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惟思昔人殀壽不貳)는 옛사람의 교훈을 생각하여 스스로 처신하고 그에 따를 뿐이지, 그 밖에야 어찌 우리의 힘이 용납되겠습니까.
나의 이러한 견해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 교수가 돌아가는 편에 급하게 적어 올리느라 세세하게 말씀드리지는 못합니다.
-이황(李滉, 1502~1571), '조건중에게 답하다 갑자년(答曹楗仲 1564, 명종19)', 퇴계집(退溪集)/ 퇴계선생문집 제10권/ 서(書) 1-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오돈 권태익 김용국 김익현 남만성 성낙훈 안병주 이동환 이식 이재호 이지형 하성재 (공역) ┃ 1968
▲옮긴이 주: 이 편지의 대상인 조건중(曹楗仲)은 남명 조식선생(1501~1572)이다. 건중은 남명선생의 자(子)다. 퇴계선생과 남명선생은 조선유학에서 영남학파의 양대산맥으로 일컬어지는 조선의 대유학자다. 남명선생은 평소 허리에 칼을 차고다닐 정도로 청렴강직한 인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실천궁행의 삶 그리고 절개와 의리를 중시하고 특히 수기와 치인을 학문의 본령으로 삼았다. 백성을 치국의 근원으로 인식한 선생은 제도적으로 부패한 정치와 타락한 세속 권세를 비판하며 평생 벼슬을 거부하며 날선 비판의 상소문을 조정에 올리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물론 퇴계선생도 몇 차례 벼슬에 임하긴 했지만, 후반엔 인재를 천거하되 정작 자신은 갖은 핑계를 대며 벼슬하기를 거부하였다. 임진왜란 때 학봉 김성일 중심으로 한 퇴계선생의 제자들도 의병장으로 활약하였지만 유독 남명선생의 제자들은 대거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제자이자 외손인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해 수제자(首門) 격인 정인홍(鄭仁弘)과 김면(金沔), 그리고 조종도(趙宗道)·이노(李魯)·하락(河洛)·전치원(全致遠)·이대기(李大期)·박성무(朴成茂) 등이 모두 남명선생의 제자였다(이덕일)'. 개인적으로 남명선생에게서 겸애(兼愛)와 실천궁행의 삶을 중시한 묵자(墨子)의 이미지를 느끼는 것은 바로 이때문이다. 남명선생을 절개와 의리로 대표되는 조선선비의 자존심이라 한다면, 퇴계선생은 예와 인으로 대표되는 조선선비의 인격이다. 퇴계선생과 남명선생은 공히 조선선비의 정신을 대표한다 하겠다.
편지는 “요즘 공부하는 자들을 보건대, 손으로 물 뿌리고 빗질하는 법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를 담론하여 헛된 이름이나 훔쳐서 남들을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남에게서 사기나 당하고 그 피해가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칩니다.”<‘퇴계에게 드립니다’(與答退溪書 1564)>에 대한 퇴계선생의 답글이다. 이때 남명선생의 연세는 64세, 퇴계선생은 63세다. 후일 다산 정약용은 퇴계선생의 편지글을 큐티하듯 매일 한편씩 읽으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성찰하는 수기(修己)의 방편으로 삼아 그 소회를 기록한 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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