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죽어있는 말(語)

유교와 불교가 어찌 처음부터 다른 도였겠는가. 요(堯)임금은 ‘넉넉하고 부드럽게 하여 스스로 깨닫게 한다’고 하였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本性)으로 돌이켜 그것을 구하면 능히 스승으로 삼을만한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배우는 자들은 마음에서 구하지 않고 문장(章句)의 부분만을 취하여 도리(道)를 추구하려고 하니, 어찌 대도(大道)와의 거리가 이미 까마득하지 않겠는가? 


중용(中庸) 책 한 권을 읽고 중용을 지키는 성인(聖人)의 경지를 이룬다면, 어떤 사람인들 자사(子思)가 되지 못할 것이며, 대학(大學) 책 한 편을 읽고 치국평천하(治國 平天下)의 도를 얻는다면 어떤 사람인들 증삼(曾參)이 되지 못하겠는가? 


성인(聖人)의 말은 간략하고, 현인( 賢人)의 말은 상세하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상세한 것이 말하고자 하는 본래의 뜻과 도리(箋註, 전주)를 잃어버리게 되면 하찮은 배움거리로 전락하고 만다. 간략한 것이 뜻을 분명하게 알아듣지 못할 선문답(禪寂)으로 흘러가 버리면, 도리(道)와 상관없는, 학문의 껍데기만 더듬는 배움거리로 전락되고 말 것이다. 어찌하여 오늘날의 학문은 살아있는 말을 버리고, 죽어 있는 말을 구하고 있단 말인가? (이하생략)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증건봉사승신은서(贈乾鳳寺僧信誾序)', 『어우집(於于集)』


※옮긴이 주: 옛글에서 말하는 학문(學問)의 의미는, 엄밀히 따지자면, 오늘 날 사전적 의미인, '어떤 분야를 체계적으로 배워서 익힘. 또는 그런 지식.'과는 약간 차이가 있다. 유교적 전통의 우리네 옛글에서 논하는 학문이란 주로 '인간됨의 도리와 이치', 즉 도덕에 관한 배움과 익힘에 특정하고 있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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