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무명변(無命辯) / 홍석주
그렇게 해야 할 것이 그렇게 되는 것은 의(義)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되는 것은 명(命)이다. 성인(聖人)은 의를 말미암는데 명이 그 가운데 있고, 군자는 의로써 명에 순종하고, 보통 사람 이상은 명으로써 의를 단정하고, 중인 이하는 명(命)을 알지도 못하고 그 의도 잊어버리고 있다. 이 때문에 명을 알지 못하고서 의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드물고, 의에 통달하지 못하고서 명에 편안할 수 있는 자는 없다.
그러나 명(命)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으나, 의는 어디를 가나 행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효로써 어버이를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충(忠)으로써 임금을 섬기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경(敬)으로써 자기 몸을 닦으면서 그 명은 따지지 않고, 부지런히 행실을 닦으며 그 명은 따지지 않는다.
그러하나 명(命)은 말을 하지 않을 때가 있으나, 또한 때로는 말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궁색하고 영달(榮達)함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구할 수는 없는 것이요,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도피할 수는 없는 것이요, 귀천은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영위할 수는 없는 것이요, 빈부는 명에 달려 있어 무리하게 도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명(命)은 성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인(中人)은 격려할 수는 있는 것이며, 보통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화복(禍福)은 단정할 수 있다. 그러니 명을 억지로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안다면 내가 그에 대해 기교를 베풀 것이 없고, 명이 계획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안다면 내가 그에 대해 마음 쓸 바[所用]가 없다.
어깨를 움츠리며 아첨하는 웃음을 웃고서 부귀를 취하는 자가 있는가 하면, 의(義)를 잡고 어려운 일을 실천하다가 몸이 죽어간 자도 있다. 그러나 때가 부귀해지게 되면 도를 지키는 자도 영달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고, 운명은 사망에 직면하면 수치스러운 짓을 차마 해내는 자라 할지라도 반드시 목숨을 보전하는 것은 아니다.
운명은 진실로 이와 같아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진실로 이 이치에 대하여 밝게 알고, 이 이치를 독실히 믿는다면, 어느 누가 마음으로 애를 쓰면서 이익을 구하고, 수치를 무릅쓰면서까지 구차스럽게 더 살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진실로 의(義)를 알지 못하면 명(命)은 쓸모가 없으며, 진실로 의를 안다면 명이 세상의 가르침에 도움됨이 또한 클 것이다. 명이 없다는 설이 일어나면서부터 명을 믿지 않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자 순박함이 없어지고 꾀만 많아져 천도(天道)는 허망한 것이 되고 인사(人事)는 더럽혀져, 봉록이나 구하고 이익이나 추종하며 삶을 탐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무리들이 불어나서 천하가 어지러워졌다. 이것이 이른바 명(命)이 없다는 설의 해독이다. 오직 군자라야 명(命)에 맡겨 두면서도 의(義)만을 따르는 것이다.//
명(命)은 알 수는 있어도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는 것이며, 믿을 수는 있어도 꼭 기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해 볼 수는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자연스러운 것이 천(天)이요, 인위적인 것이 인간이니, 명이란 것은 인간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천이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기(氣)는 사세(事勢)와 합하고 운은 때로 이동하여 시키는 것이 있는 듯하면서도 실은 아무 것도 시키는 것이 없으니, 억지로 이름을 지어 명이라 하였을 따름이지, 진실로 주재(主宰)가 있어 안배(安排)하고 더하거나 덜거나 하면서 주었다 빼앗았다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어떻게든지 해 보려고 하면서 남에게 구하는 자가 망녕된 것뿐만 아니라, 빌거나 푸닥거리하면서 하늘에 구하는 자도 그것이 무익한 것임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오늘날 저 무당과 소경들이 술수를 부려 사람들을 현혹해서 제물(祭物)을 팔아대게 하여 재주를 뽐내려 하니, 음사(淫祀)가 번성하여 귀신과 사람이 뒤섞이고, 부적(符籍)과 주문(呪文)이 극성을 부려 간악함이 불어나고 있다. 명(命)을 이어가게 할 수 있다 하거나 명을 헤아릴 수 있다고 하나, 명을 이어갈 수 있다거나 명을 더 늘릴 수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명이라 할 수 있으며, 어떻게 자연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명이란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믿을 수는 있어도 꼭 기필할 수는 없다는 것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필할 수 있는 것은 이치[理]이고 기필할 수 없는 것은 일[事]이다. 주(周) 나라 무왕(武王)의 질병은 운수가 하늘에 달려 있었던 것이요, 금등(金縢)의 글*은 주공(周公)이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주공의 도는 행해지지 못했고, 공자는 진(陳)ㆍ채(蔡)의 액(厄)*을 면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비록 반드시 흥창(興昌)할 운(運)에 처할지라도 명군(明君)은 그 두려워 경계함을 잊지 않고, 멸망할 때를 당해서도 충신은 반드시 그 힘을 다하는 것이다.
만일 피할 수 없는 운명임을 알고 나의 의를 닦지 않는다면, 태보(太保)*는 하늘에 기원(祈願)하는 말씀이 없었을 것이고, 소사(少師)*는 심장이 쪼개지는 일을 당하기까지 한 절개가 없었을 것이니, 온 천하를 가져다 크게 어지럽히는 것은 분명 이 명이 없다는 설(說)일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이 지(知)를 말하면서는 곧 기미(幾微)를 아는 것이 신(神)과 같다고 말하였을 뿐이고, 명(命)을 말하면서는 몸을 닦고서 그것을 기다린다고 말하였을 뿐이니, 그것은 항상 그 근원을 막은 것이다.
성인이 말하지 않은 것인데도 무당과 소경이 언제나 말하고, 성인이 알지 못하는 것인데도 무당과 소경이 알아맞히기도 한다. 반드시 식례(式例)에 따라서 사생(死生)을 판결하고 며칠 전에 부귀를 알아맞힌 뒤에라야 지혜롭다 말한다면, 이것은 관로(管輅 위(魏)나라의 점상(占相)으로 이름난 인물)가 원성(元聖 주공(周公)을 가리킴)보다 현명하고 당거(唐擧 양(梁나라)의 관상가)가 선니(宣尼 공자를 말함)보다 슬기롭다는 것이니, 어찌 도리에 어그러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명은 기필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저 반첩여(班婕妤 한 성제(漢成帝)의 후궁)가 말하기를,“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려 있고 부귀는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다. 올바른 일을 닦아도 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악을 행하고서야 장차 무엇을 구하겠는가?” 하고,
제갈 무후(諸葛武侯 무후는 제갈량(諸葛亮))도 또한 말하기를, “몸이 다하도록 하여 죽은 뒤에야 그만둘 것이니, 성패(成敗)와 이로움과 불리함의 결과에 이르러서는 신(臣)이 미리 알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하였으니, 이것이 진실로 의(義)의 지극함이요, 지(知)의 완성이다. 그러니 왜 하필 명(命)이란 없다고 말한 뒤에라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역자 주]
1.무명변(無命辯) : 이 논제(論題)는 명(命)이 없음을 주장하며 논한 변(辯)이 아니라, 명(命)이 없다는 무명(無命)의 주장에 대한 변론이라는 뜻이다. 명(命)은 운명, 숙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2.금등(金縢)의 글 : 주공이 무왕 대신 죽기를 하늘에 기도한 축문(祝文)이다. 금속의 노끈으로 꿰맨 상자에 보관하였으므로 금등의 글이라 한다. 《書經 金縢篇》
3.진(陳)ㆍ채(蔡)의 액(厄) : 공자(孔子)가 진ㆍ채의 들에서 포위되어 식량이 끊기는 곤액(困厄)을 당한 것을 말한다. 노(魯) 나라 애공(哀公) 7년, 공자 63세 때의 일이다.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에, “진ㆍ채에서 나를 따르던 자는 지금 모두 여기에 있지 않다.[從我於陳蔡者 皆不及門也]”란 말이 보이고, 역시 《논어》의 위령공(衛靈公) 편에 보면, “진에 있을 때 양식이 떨어지니[在陳絶糧]”란 말이 보인다.
4.태보(太保) : 주 나라 소공(召公)을 말한다. 《서경》 소고(召誥)에 “하늘에 영명(永命)을 기원함[祈天永命]”이란 구절이 있다.
5.소사(少師) : 은(殷) 나라 삼인(三仁)의 한 사람인 비간(比干)을 말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에 “주(紂)가 더욱 음란하여 그치지 않자 비간이 간언(諫言)을 하였는데, 주가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성인의 심장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하고 그를 죽여 심장을 해부하여 보았다.[紂愈淫亂不止 比干 迺强諫紂 紂怒曰 吾聞聖人心 有七竅 剖比干 觀其心]”는 내용이 있다.
-홍석주(洪奭周 1774~1842), '무명변(無命辯)', 여한십가문초(麗韓十家文鈔) 제8권 /한 연천 홍석주 문[韓洪淵泉文]-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안병주 (역) ┃ 1977
"오늘날 사람들은 겨우 구두나 떼는 자가, 다른 사람이 지은 글을 보면 그 글이 적혀 있는 종이를 펴고 비바람이 휘몰아치듯 빨리 읽거나 눈으로 한번 힐끗 보기만 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보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서 제멋대로 말이 많아 비판하는 말을 하니, 문장의 참뜻을 알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는가?"-홍석주('사제(舍弟) 헌중(憲仲)에게 답하는 글')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大衡]이 있는데 하나는 시비(是非)의 기준이요, 다른 하나는 이해(利害)의 기준이다. 이 두 가지 큰 기준에서 네 종류의 큰 등급이 생기는 것이다. 옳은 것을 지켜서 이익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등급이요, 그 다음은 옳은 것을 지켜서 해를 받는 것이며, 그 다음은 나쁜 것을 좇아 이익을 얻는 것이며, 가장 낮은 등급은 나쁜 것을 좇아서 해를 받는 것이다."-정약용('아들 연아에게 답함答淵兒')-
'고전산문 > 연천 홍석주'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전산문] 문장의 4가지 폐단 / 홍석주 (0) | 2018.06.11 |
---|---|
[고전산문]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 / 홍석주 (0) | 2018.06.11 |
[고전산문] 타인이 행한 일에서 선한 점을 인정하는 기준 / 홍석주 (0) | 2018.06.11 |
[고전산문] 용(庸)이라는 글자에 담긴 '한결같음'의 의미/ 홍석주 (0) | 2018.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