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 / 홍석주

모계위(茅季韋, 밭을 갈며 생활했다는 高士, 포박자외편에 나온다)가 한 여름에 들에 나가 김을 매다가 틈이 나자 밭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밭두둑 사이에 그늘이 좋은 큰 나무가 있었는데, 아침에 그늘이 서쪽으로 지면 사람들이 앞다투어 그 아래로 가고, 얼마 뒤에 해를 따라 그늘이 동편으로 옮겨가면, 모두들 떠들썩하게 동편으로 몰려갔다. 뒤처져 온 이들 중에는 자리다툼에 신발을 잃거나 발꿈치를 상한 자도 계속 이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그늘에 다닥다닥 모여 앉은 자들이 들판에 홀로 우두커니 서 있는 모계위(季韋)를 일제히 바라다보았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모계위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그대는 동편에 홀로 서 있더니 이제 서편에 홀로 서 있다. 군자라고 자부하는 이가 어찌 그리도 지조가 없는가?” 

이 말을 들은 모계위는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그저 웃기만 할 뿐, 세 번의 연이은 질문에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말하던 자가 머쓱해 하다가, 잠시 후에 다시 말하기를, 

“생각해 보니 내 말이 지나쳤다.  사실 그대의 자리는 종일토록 변하지 않았다. 내 자리가 바뀌었을 따름이다. 내가 내 자리를 정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겨 다닌 것을 도리어 그대의 정해진 자리를 의심하고 탓하였으니, 나는 참으로 망령된 사람이다. 그러나 여름에 베옷을 입고 겨울에 털옷을 입으며, 비 오면 도롱이 입고 햇볕이 뜨거우면 가리는 천성(天性)은 성인(聖人)도 고치려고 하지 않았다.   ‘사람이 날짐슴과 들짐승, 길짐승하고 무리를 이루며 더불어 함께 살 수는 없다'고 공자께서도 말씀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런 성정(性情)을 가진 사람이 아니던가?  어찌하여 그대는 항상 사람들과 떨어져서 홀로 있고, 또 홀로 그것을 지켜서 꼼짝 않는가. 진실로 도리를 알고 때를 안다는 사람이 어찌 그러할 수 있는가? 

이에 모계위는 비로소 대답하였다. "그대 말이 일리가 있다. 나는 농부라서 어찌 도리를 알겠는가? 다만 나는 일찌기 서유자(徐孺子후한시대에 농사를 지으며 살았던 은거 高士)라는 사람에게서 농사일에 대해 듣고 배운 바가 있을 따름이다. 봄에 밭 갈고 여름에 김매고 가을 되면 수확하는 게 농사일이다. 나는 이로써 계절을 따른다. 홍수나 가뭄, 바람과 폭염의 햇볕은 오직 하늘에 달린 것이요, 밭 갈고 파종하며 김매고 수확하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린 것이다. 

나는 내게 달린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고, 하늘이 이루어 주는 대로 따를 뿐이다. 내 힘써 최선을 다한다면, 비로소 내 할 일은 다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마음속으로는 부끄럼이 없고, 밖으로는 내게 주어진 것 이외에는 달리 경영하거나 도모하는 것이 없다. 때문에 분수에 넘친 헛된 욕망이 발동하지 않고, 이해타산으로 마음이 들끓지 않는다. 내 마음은 마치 파도가 일지 않는 담담한 물과 같고, 사방으로 열리고 통하고 막힘이 없이 활달하다. 폭염의 햇빛에 처하여, 시원한 바람을 타거나 달콤한 단물을 마시지도 못하고,  또 한낮의 더위에 얼음을 쌓아 놓은 듯 시원하다고 말할 처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떠한 행위와 말로도 내 상쾌한 마음을 비유할 수가 없다. 

나는 하늘의 때를 기다리지만, 사람들은 서로 다른 사람과 시간을 다툰다. 폭염을 피하여 나는 마음속의 그늘로 들어가지만, 사람들은 모두 나무 그늘로 들어가기를 다툰다.  이렇듯 나와 달리한 것은 뭇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런데 어찌하여 내가 사람들을 떠나 홀로 있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  눈과 얼음 속에서 솜옷을 입고 있는 자도 여우 담비 털옷을 덮어 주면 사양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할진대 굳이 내가 그늘을 싫어하여 그늘로 들어가지 않는다고 여긴다면, 그것도 제대로 된 인정(人情)이 아닐 것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생각해 보지 않는가? 그대가 나무 그늘로 들어갔을 적에 과연 넉넉하게 조용하고 한가하였던가?  자연스럽게 그 그늘에 들어가 스스로 여유로움을 즐기며 노닐었던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앞다투어 경쟁한 다음에야 비로소 그늘에 들 수 있었던가? 그렇지 않았다면 그 누가 그대로 하여금 무릎을 부딪치면서 발을 뻗지 못하게 하였던가? 그 누가 그대의 팔을 움츠려서 맘껏 펴지 못하게 하였던가?  그 누가 그대에게 한 발자국 남짓한 자리를 마음대로 차지하지 못하게 하여, 마치 철창 속에 갇힌 원숭이처럼 답답하게 하였던가? 그 누가 서로를 꺼리게 하여 주변 사람을 마치 도적을 보듯 서로를 흘겨보며, 행여 한 사람이라도 나가서 내 자리를 좀 더 넓게 하여 주기를 바라게 하였던가? 이렇게 하여 그늘에 들어가는 것은 차라리 뜨거운 햇볕 아래 홀로 서 있는 것만도 못하지 않은가.  그대는 더 이상 말하지 말게나. 나는 다시 밭일이나 해야겠다."

이에 말을 건넸던 사람은 고개를 숙이니, 부끄러운 안색이 역력했다.  곽림종(郭林宗)이 이 일을 듣고서 말하였다.  "계위는 참으로 현명한 사람이구나!  비록 그러할지라도 서유자(徐孺子)에게는 못 미친다. 서유자는 한 마디 말조차 하지 않았던 사람이다."

-홍석주(洪奭周, 1774~ 1842),'밭을 사이에 두고 나눈 대화'(田間對)',  『연천집(淵泉集) 권25』 -

▲참고: 번역문은 홍석주 산문에 관한 여러 논문과 책에서 인용된 조각글들을 비교 참조하였다. 나름 이해하는 글로 다시 풀어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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