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인( 仁) 또는 의(義)라는 이름이 성립하려면/ 정약용
인의예지(仁義禮智)의 이름은 일이 행위로 실천된 이후에 성립한다. 사람들을 사랑하는 행위가 있고 나서 비로소 그것을 인(仁)하다고 부를 수 있기때문이다. 사람을 사랑하기 이전에는 인(仁)이라는 이름이 성립되지 않는다.
나를 선하게 하고 나서 이를 행동으로 실천한 것을 두고 의롭다고 한다. 나를 선하게 하기 전에는 의(義)라는 이름이 성립하지 않는다.
주인과 손님이 서로 절하는 행동이 있고 나서 비로소 예(禮,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와 질서)라는 이름이 성립한다. 여러 현상과 사물에 대한 분별이 뚜렷하고 명확해진 다음에 지(智, 지혜 지)라는 이름이 성립한다. 이런즉, 마치 복숭아씨나 살구씨처럼 어떻게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의 알맹이가 사람의 마음속에 이미 잠재하고 있다고 하겠는가?
안연이 공자에게 인(仁)에 대해 물으니,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는 것이 인(仁)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인(仁)이라는 것이 사람의 공부로부터 이루어진 것이지, 태생적으로 하늘이 사람의 마음 속에다 한 덩어리의 인(仁)을 끼워 넣은 것이 아님을 밝히는 대목이다. 이럴진대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예(禮)로 돌아가고자 할 때, 어찌 많은 노력이 뒤따르지 않겠는가?...
단(端)이라는 것은 곧 '시작'을 뜻한다. 사물의 본말(本末, 사물이나 일의 처음과 끝)을 가리켜 양단(兩端)이라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처음 일어나는 것으로 단(端)을 삼았기때문에 중용에 이르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관계에서 시작되고(造端乎夫婦), 그 지극한데 이르러서는 그 도리가 천지 간에 환하게 드러나게 된다"고 하였다. 이는 이전부터 단(端)이 '시작'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음을 명백하게 해주는 한 대목이다....이외에도 그 쓰임에서 무릇 머리(頭)를 단(端)이라고 한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런즉 어찌 꼬리(尾)를 가리켜 단(端)이라 칭할 수 있겠는가? ...
측은지심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 이것을 끌어다가 키우면 인정(仁政, 어질게 다스리고 펼침)을 행할 수 있다. 인정(仁政)이 시작되는 근원이 바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아니겠는가? 사양지심(辭讓之心)이 마음 속에서 일어나고 이것을 끌어다가 키우면 예법을 행할 수 있다. 사양지심이란 곧 예법이 시작되는 근원을 뜻하는 바가 아니겠는가?
수오지심(羞惡之心)이 근본이 됨으로 백이(伯夷)가 불의하고 더러운 군주를 섬기지 않은 것은 그 말(末)이 된다.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머리가 되어, 전금(展禽, 노나라의 현자인 유하혜, 공자의 친구)이 전거(爰居, 희귀한 바다새의 이름)를 제사지내지 않은 것은 그 꼬리가 된다.
이것을 실에 비유하면 측은한 마음은 마치 실 꾸러미와 같다. 이것을 뽑아내면 효제(孝第, 부모를 정성껏 잘 섬기고 받들며 형제와 뭇 사람들을 존중하며 화합하는 것 , 이는 공자 사상에서 사람됨의 핵심이 되는 실천 명제인 '충신예의염치'의 근본이 된다)를 할 수도 있고, 과부나 홀아비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다. 어느 것이 근본이 되고 어느 것이 그 끝이 되며, 어느 것이 그 머리가 되고, 어느 것이 그 꼬리가 되겠는가?
사단(四端)의 뜻은 맹자가 직접 스스로 주석을 내어 설명하기를, "불이 처음 타오르기 시작하는 것과 같고 샘물이 처음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若火之始然 泉之始達)"고 하였다. 맹자의 설명에서 두 개의 시(始)가 뚜렷이 그 뜻을 드러내고 있는 까닭에, 이미 단(端)이 '시작'의 뜻을 가지고 있음이 또한 분명해 진다.
다시 말해, 사단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근본이 되는 까닭에, 성인이 사람을 가르침에 여기서부터 공부를 일으키고 여기서부터 기초를 닦아 인간됨을 더욱 펼치고 확충하도록 인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맹자요의(孟子要義) 공손추 상 (여유당전서 與猶堂全書, 제2책)
※[옮긴이 주(참고)
맹자는 공손추 상편에서, 인간의 심성에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제시하는데, 이는 곧 성선설의 핵심이 된다.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 이란,
' 사람에게 차마 할 수 없는 마음'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태생적으로 내재된 도덕심을 말한다. 이는 그 어떤 '이유',
'조건', 목적'을 가지고 의도적으로 발동되는 마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할 수 없이 그냥 절로 우러나오는 마음이다.
그 구체적인 사례로 측은지심을 들고 있다. 맹자는 측은지심 이외에도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이 인간의 본성안에 내재되어
있다고 통찰하였다. 이 4가지를 사단(四端)이라고 한다. 맹자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사단(四端)으로 구체화하여 말하기를, "측은 지심은 인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의 단서이다."하였다. 측은지심은 그 시초가 된다. 도덕의 기본인 사덕(四德), 즉 인의예지는 사단(四端)을 근간으로 성립된다. 여기서 단(端)의 해석을 실마리, 즉 단서로 보느냐, 아니면 '시작(始)' 혹은 '바탕(本始)' 의미로 해석하느냐에 따라 사덕(四德)에 대한 이해가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 사단과 똑같이 사덕은 인간 본성속에 태생적으로 내재한 것이 되고, 후자의 경우 사단의 실천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곧 사덕이 된다. 전자는 성리학의 전통적인 해석이다. 이에 반해 정약용 선생은 '시작'의 의미로 해석하여 사덕은 인간의 본성 속에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하는 글이 위의 글이다. 즉 사덕은 인간의 마음 속에 내재된 것이 아니라 사단을 근본으로 하여 실천하고 행함으로써 나타나는 결과로 이해했다. 다시 말해 인의예지는 인간의 본성 속에 태생적으로 내재한 덕이 아니라 자유의지에
따른 선택의 결과다. 사덕은 실천 행위를 통해 이루어지는 현실적인 것임을 강조한다. 덕이 가능해지는 것은 그 뿌리가 되는 사단이
인간속에 내재하고 있기때문이다. 정약용 선생의 이러한 견해는 이여홍과 주고 받은 편지(답이여홍서)에도 나온다. "사람을 사랑하기 이전에는 인(仁)이라는 이름이 성립되지 않고, 나를 선하게 하기 전에는 의(義)라는 이름이 성립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다산 선생의 통찰은, 마치 고장난 레코드판 처럼 도덕과 정의를 내세우지만 실상은 금수보다 못한 비도덕적인 인간의 민낯을 좀 더 잘 이해하고, 보다 선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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