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종일 시끄럽게 떠들어도 금하지 않는 것
내가 초천(苕川)의 농막(墅 농막 서, 농사짓는 데 편리하도록 논밭 근처에 간단하게 지은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날마다 형제ㆍ친척과 유산(酉山)의 정자에 모여 술을 마시고 오이를 먹으면서 시끄럽게 지껄이는 것으로 낙을 삼았다. 술이 얼큰하게 오르자, 어떤 사람이 술병을 두드리고 술상을 치면서 일어나 말하기를,
“어떤 사람은 이익을 좋아하여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권세와 영화를 잡는 데 미혹되어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며, 어떤 사람은 담담하게 인적을 멀리하고 자취를 감춰 현달하지 못하니 애석한 일이다.”하였다.
나는 벌주 한 잔을 부어 꿇어앉아 권하기를, “옛날에 반고(班固)는 지나간 사람들을 품평(品評)하고는 마침내 두헌(竇憲)의 잘못에 연루되었고, 허소(許劭)는 당시의 사람을 품평하여 마침내 조조(曹操)의 위협을 받았으니, 사람이란 품평(品評)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삼가 벌주를 드립니다.” 하였다.
얼마 뒤에 어떤 사람이 시끄럽게 떠들며 일어나 말하기를, “저 말은 장사할 쌀을 실어나르지 못하면서 꼴과 콩만 먹어 치우며, 저 개는 담장에 구멍을 뚫고 넘어오는 도둑을 막지도 못하면서 뼈다귀나 바라고 있다.” 고 했다.
나는 또 벌주 한 잔을 부어 꿇어앉아 권하기를, “옛날에 맹 상국(孟相國 맹사성(孟思誠)을 말함)은 두 소의 우열을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으니, 짐승도 품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가 벌주를 드립니다.” 하였다.
제공(諸公)이 눈쌀을 찌푸리고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자네의 정자에서 노닐기는 참으로 어렵구려! 우리는 입을 다물고 혀를 묶어 두어야 하겠소.”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이오. 종일 시끄럽게 떠들어도 금하지 않는 것이 있으니, 제공(諸公)을 위해 먼저 시험해 보이겠소. 부암(鳧巖)의 바위는 우뚝 삼엄하게 서 있어서 북쪽으로 고랑(皐狼)의 성난 파도를 막아주고, 남쪽으로 필탄(筆灘)의 명사(明沙)를 펼쳤으니, 이것은 돌이 이 정자에 공(功)이 있는 것이며, 남주(藍州)의 바위는 울퉁불퉁 늘어져서 꼬불꼬불한 이수(二水)의 분수계(分水界)를 만들고 오강(五江)의 돛단배를 받아들이니, 이것은 돌이 이 정자에 정(情)이 붙게 하는 것이며, 석호(石湖)의 바위는 울긋불긋 천태만상인데 새벽에는 엷은 안개가 감싸고 저녁에는 진한 노을이 둘러 있어서 난간과 서까래에 비치면 상쾌한 기운이 절로 일어나니, 이것은 돌이 이 정자에 운치가 있게 하는 것이오. 대체로 사물 가운데서 무지(無知)한 것은 돌입니다. 종일 품평하여도 화낼 줄을 모릅니다. 누가 그대에게 입을 다물고 혀를 묶으라고 말하겠소.”
어떤 사람이 나무라기를, “옛날에 유후(留侯, 장량(장자방)을 말함)는 돌을 보배로 여겨 제사를 지냈고,원장(元章)은 돌을 공경하여 절을 하였는데, 그대가 돌을 품평하는 것은 어찌된 일인가?” 하였다.
나는, “옳습니다. 당신의 말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돌을 칭찬한 것입니다. 내가 언제 돌을 모욕을 주며 불손하게 대하였소?” 하였다.
이 정자가 예전에는 이름이 없었는데, 이로부터는 ‘품석정(品石亭)’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손과 더불어 주고받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기(記)로 삼는다.
※[역자 주]
1. 두헌(竇憲)의 잘못 : 두헌은 후한(後漢) 평릉인(平陵人)으로 자는 백도(伯度). 《한서(漢書)》의 저자인 반고(班固)는, 대장군 두헌이 흉노(匈奴)를 칠 때 중호군(中護軍)으로 출전(出戰)했다가 패전하여 그 죄로 옥사(獄死)하였다고 했는데, 두헌은 곧 화제(和帝)의 어머니인 두 태후(竇太后)의 오빠였다.《後漢書 卷四十 班固傳》
2. 허소(許劭): 허소는 후한(後漢) 평여인(平輿人)으로 자는 자장(子將). 어려서부터 명망(名望)이 높았고, 특히 인물(人物) 평론(評論)하기를 좋아하였다. 일찍이 조조(曹操)가 미천했을 때 허소를 찾아가 아주 정중한 태도로 자신의 인물평을 해 주길 요구하였으나, 허소는 조조의 위인됨을 비루하게 여겨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조가 어떤 기회를 틈타 허소를 협박하므로, 허소가 마지 못하여 조조를 평하기를, “그대는 태평 시대의 간적(姦賊)이요, 난세의 영웅(英雄)이다.” 하였다.《後漢書 卷68 許劭傳》
3.유후(留侯) : 유후는 한 고조(漢高祖)의 명신(名臣) 장량(張良)의 봉호. 장량은 일찍이 신인(神人) 황석공(黃石公)에게서 병서(兵書)를 얻어 읽은 바 있는데, 이때 황석공이 “13년 뒤에 곡성산(穀城山) 아래서 황석(黃石)을 보거든 그것이 바로 나인 줄 알라.” 하였다. 장량은 13년 뒤에 그곳에 가보니, 과연 황석이 있으므로 이를 가져다가 모셔 놓고 제사를 지냈다는 고사이다.《史記 卷55 留侯世家》
4. 원장(元章): 원장은 송(宋) 나라 때의 서화가인 미불(米芾)의 자(字). 그는 금석(金石)과 고기(古器)를 애완(愛玩)하였고, 특히 기석(奇石)을 좋아하였으므로, “원장(元章)이 돌에 절하였다.”는 말까지 있었음.《宋史 卷444 米芾傳》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품석정기(品石亭記)',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3권/기(記)』-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김도련 (역)┃ 1984
"사람이 짐승보다 나은 이유는 말이 많은 까닭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말을 하지 않는다면 짐승이 사람보다 낫다. 어리석은 사람은 침묵하는 것이 가장 낫다. 하지만 자신이 어리석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미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사디(Saʽdi 1184~1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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