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땅히 알아야 할 것을 모르면서 어찌 안다고 할수 있는가?

(道)란 지극히 간단하고도 가까운 것이다. 멀리 있는게 아니라 사람의 일상생활 가운데에 있기 때문이다. 마당에 물뿌리고 빗자루질을 하는 것과 사람의 부름이나 물음에 대꾸하고 응답하는 방식만큼 간단한 것이 없고, 부모를 사랑과 존경으로 가까이 대하는 것과 윗어른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는 도(道)만큼 가까운 것이 없다. 


그런데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 하는 자들이 대부분 이것을 버리고 높고 큰 것만을 엿본다. 그래서 기본적인 것을 살피는 대신에 먼저 하늘의 도리(天道) 운운하고, 세상사의 이치(易理))를 논하려 한다. 등급을 뛰어 넘고 우선순위를 따르지 않는 폐단이 이러하다. 사람사이에 지켜야할 예와 도리(人道)를 모르는데, 어떻게 하늘의 도리와 이치(天道)를 알겠는가? 사람으로써 마땅히 지켜야할 이치(人理)를 모르는데 어떻게 세상사의 이치(易理)를 알겠는가?. 


슬프도다! 나는 세속에서 일컫기를 인생의 이치와 도리를 다 통달한 사람이 있다고 한다. 그런 이를 달인이라 부른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불리우는 사람이 과연 그러한 사람인지 아직도 이해를 못한다. 사람이 비록 70세의 세월을 살았을지라도 숱한 세월을 잡기(雜技)ㆍ음주(飮酒)ㆍ여색(女色)ㆍ서화(書畫)ㆍ과거시험장(科場)ㆍ세도(勢道)ㆍ낮잠(晝睡)ㆍ패설(稗說)에 보낸다. 그 사이에  질병걱정 근심 등이  있을 것이다. 이러할진대 어느 겨를에 자기 자신에 해당하는 본분의 일을 얼마나 제대로 닦았겠는가? 


질병과 걱정근심은 운명이므로 어찌할 수 없겠지만, 그밖의 다른 일은 누구나 다 자기 자유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천(伊川)의 “무위도식하는 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한마리 좀벌레(蠹)다.”는 말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그런데 어찌하여 이런 사람들을 달인(達人)이라고 하는 것인가? 달인들이여! 나는 그 '통달(達)했다' 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노라.


선창야화(船窓夜話)에 “배(腹)로 시서(詩書)를 배불리 먹지않는 것은 배고픔보다 못하며, 눈으로 앞서 배운 선현들을 접하지 않는 것은 소경이라 이른다. 몸이 이익과 명예(名利)를 멀리하지 않는 것은 함정에 빠진 것보다 못하고 몸가짐과 태도가 속물근성(俗氣)을 벗어나지 않는 것은 굳어버린 나쁜 버릇보다 못하다.”고 하였다. 나는 “입으로 사람됨의 도리(道學)을 말하지 않는 것은 벙어리보다 못하며 발로 자연의 조화를 이룬 깨끗한 물속의 을 밟지 않는 것은 절름발이보다 못하며, 마음이 정직함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악귀보다 못하며, 뜻을 조용한 산림에 두지 않는 것은 천한 하인보다 못하다.”고 보충하였다.


또한 양경중(楊敬仲)의 말에 “벼슬살이하는 데는 청빈한 것으로 몸의 편안함을 삼고, 글 읽는 데는 배고픈 것으로 도에 나아감을 삼고, 집에 있는 데는 일 없는 것으로 펑안함을 삼고, 벗 사이에는 뜸하게 만나는 것으로 오래까지 유지함을 삼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나는 “사람을 대하는 데는 따뜻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침을 삼고, 아내를 거느리는 데는 간결하고 묵묵한 것으로 공부를 삼고, 글을 짓는 데는 상세한 것으로 생각과 뜻을 구성하는 틀을 삼고, 병을 다스리는 데는 최선을 다해 약을 찾아 짓는 것으로 고침의 수단을 삼아야 한다.”고 보충하였다.


문(文)은 학문에 비하면 말(末)이며 외(外)이다. 그러므로 고금을 막론하고 문인(文人)들이란 거의가 다 마음이 들뜬 인물들로 가볍고 경솔하며 오만방자하고 교만하다. 문(文) 중에서도 시(詩)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심하고, 시 중에서도 과거시험용 시(科詩)를 잘하는 사람이 더욱 말(末) 중의 말이요 외(外) 중의 외이다. 비록 형편상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유의하게 되더라도 적당히 헤아려서 할 만한 좋은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남아의 평생 사업이 전부 문(文)에 있다고 착각하여, 우선순위가 뒤바껴서 거기에 도취되어 마음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세정석담(歲精惜譚)’ 부분발췌,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제5권/ 영처잡고 1(嬰處雜稿一)-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78


*[옮긴이 주/사족]

1. 어려운 한자말이 너무 많은 관계로 개인적 이해를 돕고자 나름 맥락에 맞게 일부 의역을 했다. 

2. '내가 아는 유일한 것은 내가 모른다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전자는 고대 철학자 소크라테스(대화록 Hippias)의 말이고, 후자는 현대분석철학의 거장 비트겐슈타인(논리철학논고)의 말이다. 공자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준다(논어/위정편). 약관 22세의 나이에 위의 글을 쓴, 책만 보는 바보 선생의 통찰과 식견은 이들과 못지 않다. 

3. 오만과 교만은 자아가 팽창된 사람들(전능환상, 속된 말로 중2병)과 왜곡된 엘리트의식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이다. 과도한 자기애를 뜻하는 나르시즘(공주병, 왕자병)과는 구별된다, 윗 글의 말미에서 선생이 비판적으로 강조하는 (文)이란, '글재주를 드러내어 남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흥미위주의 소품 문장 또는 글월'을 의미한다고 이해해 본다. 이런 점에서 선생이 비판하는 문인(文人)이란, '인간의 본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현대적 의미의 문인(文人)이 아니다. 문학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가치보다는 글을 상품가치로 여기는 글쟁이들. 즉 세상의 입맛에 맞는 글로써 이익과 명예, 출세와 성공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는 통속적인 글쟁이들을 특정한다고 볼 수 있다. 옮긴 글에서는 생략되었지만 전체글 속에 이에 관한 비판의 내용이 있다. 여기에서 문(文)이란 어떤 글이며 이 부류가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는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내가 가진 주관적인 편견과도 많이 닮아 있다. 이런 부류에게 글은 투자한 만큼 불특정 다수에게 가할 수 있는 영향력, 곧 힘이다. 권력이요, 권위다. 글 쓰는 목적, 문학을 하는 목적을 어디에 두고 출발했느냐에 따라 그 가치관과 정체성은 대부분 결정되게 마련이다. 전갈에게 "너는 왜 꼬리에 독침을 달고 있니?" 하고 묻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다. 다만 분별하고 경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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