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을 경계하다
천리마의 한 오라기의 털이 희다고 해서 미리 그것이 백마(白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온 몸에 있는 수많은 털 중에서 누른 것도 있고 검은 것도 있을지 어찌 알겠는가. 그러니 어찌 사람의 일면만을 보고 그 모두를 평가하랴.
어떤 사람이 나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예부터 한 가지라도 조그마한 재주를 지니게 되면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되고, 스스로 한쪽에 치우친 지식을 믿게 되면 차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작게는 욕하는 소리가 몸을 덮게 되고 크게는 화환(禍患,재앙과 환난)이 따르게 된다. 이제 그대가 날로 글에다 마음을 두니 힘써 남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마련하자는 것인가?”하였다. 내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하기를,“감히 조심하지 않겠는가.”하였다.
도군석(陶君奭)이 말하기를, “집에서 맛 좋은 술을 빚으려면 반드시 진흙으로 술항아리의 주둥이를 봉하여 공기가 조금도 새들지 못하게 해서 몇 년을 묵혀두면 그 맛이 좋아지고, 조금이라도 공기가 새들면 못 쓰게 된다.” 하였다. 이 말은 재주 있는 자들의 경계를 삼기에 마땅하다. 세상에 재주가 있으면서 숨기고 있는 자는 드물다. 글 잘 짓는 잔재주를 가지고도 꾹 참고 가만히 있지 못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내세워서 남이 알아주지 않을까 염려하다가, 누가 저를 비난하면 크게 노하고 칭찬하면 크게 기뻐하니 슬픈 일이다.
김석여(金錫汝)가 말하기를, “대체로 인품(人品)은 변통성이 없어서는 안 되고 통활(通活, 편벽되거나 막히지 않고 두루 열려 있는 상태)을 귀히 여긴다. 이는 마치 어느 땅을 파든지 다 물이 있는 것과 같다. 또 밝은 달이 물을 비춤에 어디든지 모두 달빛이 있어서, 회수(淮水)를 비추는 달이 제수(濟水)를 비추지 않는 것도 아니며 강수(江水)를 비추는 달이 하수(河水)를 비추지 않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달은 하나 뿐이다. 이는 달이 능히 통활하기 때문이다.”하였다.
또 문장에 대하여 논하기를, “문장을 짓는 데는 깨달아 아는 곳이 없으면 안 된다. 동파(東坡) 같은 사람들은 묘오법(妙悟法)을 터득하였기 때문에 볼 만한 작품이 많은 것이다.《능엄경(楞嚴經)》과《장자(莊子)》는 한번 읽어야 한다. 또 한 가지 병통이 있으니 글 짓는 사람들이 정숙(精熟)한 경지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도리어 글자 수를 줄이는 것으로 급선무를 삼기 때문에 의사가 통하지 않는다.
비유하면 처음 시 짓는 법을 배우는 자가 먼저 정신과 의취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하는 것은 배우지 않고 율격(律格)의 높낮이에만 마음을 써서 도리어 이에 구애받지 않고 마음대로 쓸 때보다도 못하게 쓰는 것과 같다. 글을 짓는 것도 이와 같아서 지(之)ㆍ어(於)ㆍ호(乎)ㆍ야(也) 자와 같은 조자(助字)들이 많더라도 또한 부족한 경우가 있으니 단지 구법(句法)이 잘 맞느냐의 여부에 있는 것이다.”하였다.
정부(正夫, 이형상(李亨祥))가, “요즘 세상의 우의(友誼)는 덕성을 길러 인도할 수는 없고 다만 스스로 성취하기를 기다려 보는 것이다. 단지 앞장서서 비방과 칭찬을 따지고 시비를 가리기를 힘쓰면 도리어 변해서 성질이 비꼬이게 된다.” 하였다. 이에 내가, “이제 같은 세상에 태어나 재주와 뜻이 같고 또 서로 벗이 된다면 이미 십중팔구는 좋은 일인데 도리어 이 뜻을 모르고 먼저 시기하고 의심하며 멀어지려는 마음을 내어 서로 비웃고 비방하면 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쓸쓸해지기만 한다. 이렇게 되면 친지(親知 서로 잘 알고 친근(親近)하게 지내는 사람)가 좋다는 것이 조금도 없게 된다.” 하였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 51권/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4』 중에서 부분 발췌-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신승운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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