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밝히기를 거울같이

선비는 마음 밝히기를 거울같이 해야 하고 몸 규제하기를 먹줄같이 해야한다. 거울은 닦지 않으면 먼지가 끼기 쉽고 먹줄이 바르지 않으면 나무가 굽기 쉽듯이, 마음을 밝히지 않으면 사욕이 절로 가리우고 몸을 규제하지 않으면 게으름이 절로 생기므로 마음과 몸을 다스리는 데도 마땅히 거울처럼 닦아야 하고 먹줄처럼 곧게 해야 한다.


마음[虛靈不昧]이란 서쪽으로 유도하면 서쪽으로 쏠리고 동쪽으로 유도하면 동쪽으로 쏠리며, 이(利)로 향하면 이에 따르고 의(義)로 향하면 의에 따르므로, 쏠리고 따르는 데에 반드시 그 시작을 삼가야 한다.


물건이 적중하면 저울대가 반듯하고 물건이 적중하지 못하면 저울대가 기울며, 돛이 순풍을 만나면 배가 가고 돛이 순풍을 만나지 못하면 배가 가로선다, 반듯하고 기울며 가고 가로서게 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저울대나 배에 있지 않다. 마음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마음이 차분한 자는 말도 차분하고 마음이 조급한 자는 말도 조급하다. 그 사람의 말의 차분하고 조급한 것을 들어 보면 그 마음의 차분하고 조급한 것을 알 수 있다.


공자가 “공교로운 말과 곱게 꾸민 얼굴치고는 인(仁)하는 자가 적다.[巧言令色 鮮矣仁 교언영색 선의인]”하였고, 또 “궂은 의복과 궂은 음식을 부끄럽게 여기는 자와는 도를 의논할 여지가 없다.[恥惡衣惡食者 不足與言 치악의악식자 부족여언]”고 하였으니, 훌륭하다 이 말들이여! 세상 사람들에게 곱게 보이면서 세도(勢途)에 출몰하며, 산뜻한 의복과 고운 신발 차림으로 저 혼자 뽐내고 과시하는 것은, 그 겉은 비단결처럼 번지르르하지만 그 속은 옻칠처럼 검은 자이니, 남을 속이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신의 마음까지 속이는 짓인 줄을 깨닫지 못한다.


말을 공교로이 하고 얼굴을 곱게 꾸미는 자는, 순수한 선비[醇士]의 베옷과 가죽띠와 허술한 갓[冠]에 허름한 신발 차림으로 말을 더듬거리고 행색이 겁먹은 듯한 것을 보면 반드시 힐끗거리고 웃어대면서, 마치 뒷간 속에서 나온 사람 같이만 여길 뿐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순수한 선비가 도리어 그런 자들을 마치 썩은 쥐나 죽은 개처럼 취급하는 줄을 어찌 알겠는가? 가엾다, 목궤 와독(木匱瓦櫝 목궤 와독은 모두 선비의 소박한 것을 비유한다, 목궤는 나무로 만든 상자, 와독은 질그릇으로 만든 함) 속에 성(城)과도 바꾸지 않을 구슬[璧]과 수레[乘]를 비출 만한 명주(明珠)가 감추어져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


사람이 태어남에 일곱 구멍[七竅]과 오장(五臟)이 갖추어지고 또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智)의 사단(四端)도 부여받게 된다. 만일 어렸을 때 잘 교도하지 않으면 장성함에 따라 점차 무뢰한이 되어 본래의 선한 성(性)을 가지고 점차 갓쓴 금수와 옷입은 마소의 세계로 들어가게 되니, 한심스러운 일이다. 하늘이여, 어찌 이런 자들을 내어 일곱 구멍과 오장까지 갖추어 주었는가?


사람의 성(性)은 고요한 것이므로 고요한 것으로써 번거로움을 제어하면 저절로 정상에 돌아가게 된다. 더러는 사람들이 번거로움을 좋아하고 고요함을 싫어하여 게으르고 방탕하며, 말이 질서가 없어 가끔 허황된 말로 남의 귀를 교란시키고 웃지 않을 데 웃어대면서 손뼉을 치고 몸을 까불고 손을 휘젓고 무릎을 흔들며 광대[俳優] 노릇하기를 달게 여겨 실속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니, 고요함을 힘쓰는 것이 어찌 소중하지 않겠는가?


비유하건대, 마음은 불이고 물욕(物欲)은 연료[薪]이고 염치(廉恥)는 물이다. 그러므로 물욕을 마음에 둘 적에 염치로 제어하기 어려운 것이 마치 연료에 불을 질렀을 때 물로써 제어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남의 사납고 오만함을 보면 나의 마음을 검찰하고, 남의 부지런하고 조심성 있음을 보면 나의 몸을 닦을 줄 알아야 향당(鄕黨, 고향마을로 현재 살고 있는 곳)과 주려(州閭, 여타의 다른 고을과 마을)에서라도 거의 처신할 수 있다.


남에게 조그만 선(善)이 있더라도 반드시 잊지 않아서 나의 마음에 사모하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시켜야 하며, 남에게 사소한 허물이 있더라도 반드시 드러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고 또 나의 마음에 경계하여야 한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 ‘무인편(戊寅篇)’ 부분,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제5권/영처잡고 1(嬰處雜稿一) /무인편(戊寅篇))』-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78


**[옮긴이주]선생은 무인편의 서두에 이 글의 기록 의의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무인편(戊寅篇)이란 세시(歲時)를 기록한 것이다. 그해 겨울에 삼호(三湖)의 수명정(水明亭)에 우거(寓居)하면서 글을 지어 '스스로의 경계[(針石)'를 삼은 것이 수십 조(항목)였다. 그 후로 그 글을 보지 못한 지가 5년이나 되므로, 없어지고 유실되었으리라 여겨지면서도 아까워하는 마음에서 좀처럼 잊혀지지도 않고 또 기억할 수도 없었는데, 이제야 우연히 서상(書箱)을 점검하다가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뒤적여 보니 마치 친구를 다시 만난 듯한 심정이었다. 이 글이 비록 남을 교화하고 세상에 남길 만한 것은 될 수 없지만 스스로의 경계를 삼는 것은 매우 깊으니, 나의 어려서부터 학(學)에 뜻을 둔 본심이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다. 지금 나이를 헤아려 보면 겨우 18세 남짓하다. 비록 삼대(三代 하(夏)ㆍ은(殷)ㆍ주(周)) 때의 8세에 소학(小學)에 들어가고 15세에 대학(大學)에 들어가던 절차는 따르지 못하였으나 어린 시절의 말이 도리에 가까운 듯한 것을 혹 가상하게 여길 것이다. 아, 나같이 엄격한 사우(師友)의 교도하는 도움도 없이 학을 하고 선인(善人)이 되는 방법을 약간이나마 짐작하게 된 것은 가정의 훈계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에 다시 이 글을 정서하여 두고 제목을 ‘무인편’이라 한다. 임오년(1762, 영조 38) 2월 7일 아침에 화암(和菴)에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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