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펴면 부끄러움 아닌 것이 없다
"가장 두려운 것은 얼굴이 두툼하고 말을 간략하게 하는 소인(小人)이다. 그것은 그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려워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덕무(사소절-교접)-
어떤 사람이 나에게 경계하여 이르기를, “예부터 한 가지라도 조그마한 재주를 지니게 되면 비로소 눈앞에 보이는 사람이 없게 되고, 스스로 한쪽에 치우친 지식을 믿게 되면 차츰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생겨서 작게는 욕하는 소리가 몸을 덮게 되고 크게는 화환(禍患)이 따르게 된다. 이제 그대가 날로 글에다 마음을 두니 힘써 남을 업신여기는 자료를 마련하자는 것인가?” 하였다. 내가 두 손을 모으며 공손히 말하기를, “감히 조심하지 않겠는가.”하였다.
슬픔이 닥쳤을 때는 사방을 둘러보아도 막막하여, 오직 땅이라도 뚫고 들어가고만 싶고 한 치도 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진다. 다행히 내가 두 눈알을 지녀 자못 글자를 알므로, 손에 한 권의 책을 들고 마음을 자위(自慰)하며 보노라면, 조금 뒤엔 좌절되던 마음이 조금 안정된다. 만일 내가 눈이 비록 오색(五色 청ㆍ황ㆍ적ㆍ백ㆍ흑)을 볼 수 있지만 서책에 당해선 깜깜한 밤 같았다면, 장차 어떻게 마음을 쓰게 되었을는지.
지난번에 객(客)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을 나서면 모두가 욕(辱)이고 책을 펴면 부끄러움 아닌 것이 없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참 명언(名言)이다. 그러나 마음을 아주 조심하고 두터운 땅을 밟아도 빠질 것같이 하면 무슨 욕이 있겠으며, 비록 뜻밖의 욕이 있더라도 내가 불러들인 것은 아니다. 글을 읽을 때는 언제나 실천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아 골수에 젖게 하여 외면적인 일이 되지 않게 하면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날로 조금씩 부끄러움이 있다면 글을 제대로 읽는 것이 아니며 또한 사람이 옳게 되지도 못한 것이요, 글자만 공부했을 뿐이다.” 했다.
남을 가엾게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절로 왕성하게 일어나는 것은 성인(聖人)이나 어리석은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익을 추구하는 생각이 마음에 가득하면 결코 측은지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내가 일찍이 삼전도(三田渡) 얼음판을 건널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이 소에 곡식을 잔뜩 싣고 가는데 소가 뒤뚱거리며 미끄러져 빠지려 하므로, 그 사람은 고삐를 잡고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며 소리쳐 몰다가 거의 둘 다 물에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마침 강가에 있던 사람이 멀리서 외치기를, “내가 건네 줄 테니 내게 돈을 주겠소?” 하였다. 그가 ‘좋다’고 하자, 대가로 얼마를 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사이에 소는 드디어 빠지고 말았다.
재주 있고 경박한 사람은 기교(機巧)를 부림이 간사하고 천박하며, 어리석고 둔한 사람은 기교를 부림이 간휼하고 노골적이기 때문에, 군자들의 안목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그 중에 혹 간사하면서도 음침하거나 간휼하면서도 비밀스러우면, 이런 사람은 못할 짓이 없는 것이다. 아아, 고금에 기교 부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는지.
사람들의 병폐는 부박(천박하고 경솔함)하지 않으면 반드시 융통성이 없는 법인데, 두고 보건대, 이 두 가지를 면한 사람이 대개 얼마 되지 않는다. 부박함은 동(動)의 유폐(流弊)요, 융통성이 없음은 정(靜)의 유폐이니, 스스로 수양하려는 사람이나 남을 가르치려는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반드시 참작해야 한다. 뜻만 크고 곡진(정성이 지극함)하지 못한 사람은 허술한 짓을 하고, 재주가 거칠고 정밀하지 못한 사람은 외람(분수에 넘침)한 짓을 하는 것이다.
얼굴 위에 있는 사마귀 하나와 주름 한 줄에도 무한한 기관이 있다. 누구에게 아양을 부릴 때에 눈을 가늘게 깜박이고 그윽히 바라보며 이리저리 굴린다. 그러면서 의젓한 태도를 짓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곁들이면 시원하기가 이슬과 같고 따뜻하기가 봄과 같지만 거기에는 전부가 속임수 아님이 없다. 이때에는 비록 탐하는 것이 도척(盜跖) 같고 믿음이 미생(尾生)과 같더라도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끌리지 않는 자가 없으니, 이것은 온 도시와 큰 저자의 교활한 장사치와 약삭빠른 거간꾼이 일생 동안 연마한 공력이다.
말소리가 소 울음 같고 걸음걸이는 돼지가 뛰룩이는 것과 같으며 털구멍이 빽빽하고 뼈마디가 추하지 않은 것이 없어 밝고 시원한 기운을 조금도 찾을 수 없으며 실 한 올 쌀 한 톨을 생명처럼 아끼고 의관을 한 때라도 제대로 입지 못하며, 그리고 낯선 사람을 대하면 입을 벌리고도 말을 못하고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하니 그 까닭은 곧 무식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사마덕조(司馬德操)같이 너그럽고 동방삭(東方朔)처럼 추이(推移)를 잘하는 이라도 눈썹을 찡그리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니, 이는 농사에 파묻혀 나오지 않는 미련한 사람이다. 그는 한쪽에 빠져서 그 외에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글을 잘 읽어서 본심을 잃지 않는 자는 특별한 남자이다. 저 상고(商賈)와 전농(田農)의 무리들은 어째서 용렬하고 천한 것을 스스로 편안히 생각하고 힘쓰는가. 슬픈 것은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있으면 무엇이 불가하랴.
마음 갖기를 공평하게 하지 못하여 사랑하고 미워하는 것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매우 지각없는 사람이다. 3일에 5필(匹)을 짜내었는데도 시어머니는 고의적으로 느리다고 혐의하는 것은 미움에 치우친 것이고, 장인(丈人) 집에 있는 까마귀를 처가로 인해서 좋아하는 것은 사랑에 치우친 것이다. 또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있다. 기괴하고 간사한 것이 마음에 스며들어 생긴 고질은 고치기가 어려우니 또한 슬프지 아니한가. 창가(瘡痂)가 코에 이르자 씹어 먹으며 복어(鰒魚)와 같다 하였고, 활 줄이 지극히 곧은데 보고 곡척(曲尺) 같다고 걱정하였다. 호백(狐白)을 모아 갖옷을 만들었고 해당(海棠)이 향기 없음을 탄식하였다. 미워하는 가운데 착한 것을 고르고 사랑하는 가운데 나쁜 것을 알아야 아주 공정함이 있는 것이다.
한 마리 쥐가 닭장에 침입하여 네 발로 계란을 안고 누우면 다른 쥐가 그 쥐 꼬리를 물어 당겨서 닭장 밖으로 떨어진다. 그리고는 그 쥐 꼬리를 다시 물어 당겨서 쥐구멍으로 운반한다. 또 병에 기름이나 꿀이 있으면 병에 올라 앉아 꼬리로 묻혀내어 몸을 돌려 그 꼬리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 족제비가 온몸에 진흙을 발라 머리와 꼬리를 구분할 수 없도록 하고는 앞발을 모으고 썩은 말뚝처럼 사람같이 밭둑에 선다. 그러면 다른 족제비는 눈을 감고 죽은 듯이 그 밑에 누워 있다. 그때 까치가 와서 엿보고 죽은 줄 알고 한 번 찍는다. 짐짓 꿈틀하면 까치가 의심이 나서 재빨리 썩은 말뚝 같이 서 있는 놈 위에 앉는다. 그 놈이 입을 벌려 그 발을 깨문다. 까치는 그때야 족제비의 머리에 앉은 것을 알게 된다.
벼룩이 온몸을 물면 나무토막을 물고 먼저 꼬리를 시냇물에 담근다. 그러면 벼룩이 물을 피하여 허리와 잔등이로 모여든다. 담그면 피하고 담그면 피하고 하여 차츰 목까지 물속으로 넣는다. 벼룩이 모두 나무로 모이면 나무를 물에 버리고 언덕으로 뛰어오른다. 누가 가르친 것도 본래 언어로 서로 깨우쳐 준 것도 아니다. 가령 한 마리 쥐가 알을 안고 눕더라도 다른 쥐가 그 꼬리를 물고 끌 줄을 어떻게 아는가. 한 족제비가 말뚝처럼 섰는데 다른 족제비가 그 아래에 죽은 듯이 누울 줄을 어떻게 아는가. 이것이 자연이 아닌가. 그렇더라도 사람으로서 교묘한 꾀로 교활한 짓을 하는 자가 있으면 쥐와 족제비 같은 종류인 것이다.
사람이 사냥개를 시켜 사슴을 쫓게 하면 사슴이 빨리 달아나고 개가 그 뒤를 따른다. 거의 사슴을 물게 되었을 때에 사람이 개를 불러 밥을 주고 쉬게 한다. 사슴은 개가 오기를 기다리고 돌아다보며 서 있는다. 개가 다시 쫓다가 또 전과 같이 쉬면 사슴도 전과 같이 또 기다린다. 무릇 여러 번을 그렇게 하여 사슴이 기운이 빠져 거꾸러지면 개가 그때에 그 불알을 물어서 죽인다. 그것은 인(仁)인가 신(信)인가.
곰과 호랑이가 서로 싸울 때에 호랑이는 발톱과 어금니를 벌리고 오직 위세(威勢)로 힘을 쓰고 곰은 사람처럼 서서 위에 있는 큰 소나무를 꺾어서 힘껏 친다. 한 번 친 것은 버리고 쓰지 않는다. 그러고는 다시 소나무를 꺾는다. 노력은 많이 들고 힘이 부치어 끝내는 호랑이에게 죽고 마니 그것은 의(義)인가 정(貞)인가.
사람이 산 골짜기에 나무를 걸쳐 놓고 노끈으로 만든 올가미를 나무에 걸어 놓으면 담비[貂]가 고기떼처럼 나무를 건너는데 먼저 가는 놈이 거리낌없이 머리를 올가미 가운데에 넣는다. 그러면 뒤에 이르는 놈이 앞을 다투어 머리를 넣어 잠깐 사이에 주렁주렁 모두 목이 달려 죽어 있다. 그것은 순한 것인가 공손한 것인가. 오직 한쪽의 소견만 있고 이리저리 융통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만 명색 없는 일에 몸을 해치니 이것은 사슴이나 곰이나 담비로서 의관(衣冠)을 한 자이다.
송지문(宋之問)은 옛날의 간사(바르지 못하고 간교함)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시(詩)는 평온(平溫)하니, 과연 성정(性情)의 바른 데서 나온 것인가. 채경(蔡京)은 옛날의 간휼(간악하고 음흉함)한 사람이다. 그런데 그의 글씨는 굳세고 단아하니 과연 마음에서 우러나와 쓴 것인가. 이는 혹시 별종(別種)인가. 시나 글씨는 기예(技藝)일 따름이다. 단지 그 대체가 어떠한가만 보면 거짓과 바름을 구분할 수 있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는 하고, 남이 하는 것을 내가 하지 않는 것은 지나친 행동을 하려 해서가 아니라 선(善)함을 택하였을 뿐이다. 남이 하지 않는 것을 나 역시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나 역시 하는 것은 맹종하려 해서가 아니라 옳은 것을 따랐을 뿐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는 아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매화가 있는 감실(龕室)에 유자(柚子)를 놓아둠은 곧 매화를 모욕하는 짓이다. 전부터 매화는 맑은 덕과 조촐한 지조가 있다는 것인데, 어찌 차마 다른 것의 향기를 빌어다가 그를 돕게 하겠는가.
-이덕무(李德懋, 1741~ 1793), 『청장관전서 제48권』,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 중에서 발췌-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이석호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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