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칠정에 대하여

이(理)와 기(氣)는 비록 하나의 사물이 아니지만, 또한 두 가지 사물도 아니다. 기(氣)라고 말하자마자 이(理)가 있고, 이(理)라고 말하자마자 기(氣)가 있으니, 원래 기에서 분리된 이(理)가 없고 또한 이에서 분리된 기(氣)가 없다. 전(傳)에 이른 바 “기(氣)로 형체를 이루고 이(理) 또한 부여된다.”라는 것은 형체를 이룬 기(氣)가 홀로 행하여 스스로 이루고 이(理)가 금세 그 안에 타고 들어가 마치 소씨(蘇氏)가 '집은 사람의 몸이고 달은 사람의 본성'이라고 한 말과 같은 것이 아니다.


기(氣)가 형체를 이룰 수 있는 까닭은 원래 이(理)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니, 이(理)가 스스로 이와 같기 때문에 이처럼 스스로 형체를 이루고 성(性) 역시 이와 같다. 이미 성(性)이 있어 감응에 따라 움직이니, 움직이는 것은 기(氣)이고, 움직이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이(理)가 움직이게 하지 않으면, 기(氣)가 어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이(理)의 본체는 비록 소리나 냄새가 없더라도 원래 기(氣)와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사물이 와서 접촉하면 저절로 감응하여 움직인다. 기(氣)가 움직이지 않으면 이(理)가 어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감응하자마자 움직이고, 즉시 감응하고 움직이는 것, 이를 정(情)이라고 말하니, 정(情)은 성(性) 밖의 사물이 아니다. 비유하면 종(鍾)은 성(性)이고, 소리는 정(情)이다. 종을 치지 않았을 때에는 종에 비록 소리가 없더라도 종 속에 소리가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성(性)에 비록 정(情)이 없더라도 성 속에 정이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망치로 종을 치면 종이 바로 소리를 낸다. 그 소리는 기(氣)이고, 소리를 나게 하는 것은 이(理)이다. 이발(理發 이가 발함)이니 기발(氣發 기가 발함)이니 말할 무슨 겨를이 있겠는가?


망치로 칠 적에 망치의 크고 작음과 평평하고 도드라짐의 차이가 있고, 악기의 두텁고 얇음과 완전하고 이지러짐의 차이가 있어야 소리에 선악(善惡)의 다름이 있다. 이런 뒤에 선악에 나아가 논한다면, 그 선한 것은 본연(本然)에서 나온 일원(一元)의 이기(理氣)이다. 그 악한 것은 기(氣)가 가지런하지 않고 이(理)도 만 가지로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사단(四端)과 칠정(七情) 역시 이와 같다.


성(性) 가운데 원래 희로애락(喜怒愛樂)의 이치가 있어 감응에 따라 발동하여 희로애락이 된다. 한갓 이(理)만으로 감응할 수 없고, 한갓 기(氣)만으로 발동할 수 없다. 오직 두 가지가 모두 있어 함께 발동하기 때문에 드디어 칠정(七情)이 있다. 칠정은 애당초 성(性) 밖의 사물이 아니다.


만일 성(性) 가운데에 원래 일곱 가지의 이(理)가 없다면, 기(氣)가 어떻게 스스로 움직일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칠정은 원래 악한 일이 아니다. 다만 감응에 깊고 얕음과 완만하고 급함의 차이가 있고, 마음에 순수하고 잡됨과 맑고 탁함의 차이가 있어서 정에 선악의 다름이 있을 뿐이다.


만일 선악에 나아가 논한다면, 그중 선한 것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단서인데, 칠정 밖에 별도로 사단(四端)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맹자는 단지 세상 사람들이 본성(本性) 가운데 이 사상(四常)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까 근심하여 특별히 칠정 중 자신을 돌이켜 쉽게 깨달을 수 있는 네 가지 조목을 집어냈기 때문에 ‘사정(四情)’이라고 칭하지 않고 ‘사단(四端)’이라고 칭하였다. 이는 정 가운데 증험할 만한 단서가 있다고 말한 것이다. 측은(惻隱)은 인(仁)이 아니지만,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인(仁)의 이치에서 발동하기 때문에 ‘인의 단서(仁之端)’라고 말하였다. 이하 다른 세 가지도 모두 이와 같다.


만일 사단(四端)은 순수한 선이고, 칠정은 선악이 섞여 있는 것이라고 해서 드디어 구분하여 둘로 나눈다면, 이는 11가지의 정(情)이 되는 것이니, 아,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더구나 이발(理發)ㆍ기발(氣發)을 나누어 말한다면 더욱 많은 말로 변론하지 않을 수 없다. 단, 이 학설을 변론한 선배들은 대개는 이기(理氣)를 두 가지로 여겨 사단칠정이 각기 발동한다고 보는 데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무엇 때문인지 모르겠다.


측은의 뿌리는 사랑에 근원하고, 측은의 지극함은 슬픔에 이른다. 수오(羞惡)의 실제는 싫어함에 속하고, 사양(辭讓)의 뿌리는 싫어함에서 확충된 것이다. 옳음을 보고 옳음을 알면 바로 기뻐하고 사랑한다. 그릇됨을 보고 그릇됨을 알면 바로 화를 내고 싫어한다. 사단이 과연 칠정과 구별되겠는가?


부모님의 장수(長壽)를 기뻐하고, 불효(不孝)에 화를 내고, 죽어 상례를 치르는 데에 슬퍼하고, 좋은 말을 즐거워하고, 부모를 사랑하고, 불선한 이를 미워하고, 좋은 도리를 행하고자 하는 것 또한 모두 사단이 아니고 이(理)가 발동한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또 양귀비(楊貴妃)가 치통을 앓자 당황(唐皇 당 현종(唐玄宗))이 측은한 마음이 들었던 일, 초나라 식객의 구슬 달린 신발에 조나라 식객이 부끄러워했던 일, 개보(介甫 왕안석의 자(字))가 관작을 사양하거나 자첨(子瞻 소식(蘇軾)의 자(字))이 이천(伊川)을 비웃은 일의 경우, 사단은 이(理)가 발동한 순수한 선이라는 점이 어디에 있는가?


맹자는 단지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는 상황을 가리켜 사람의 마음에 원래 인(仁)이 있음을 깨닫고 이를 ‘측은지심’이라고 이름하였다. 욕하면서 음식을 주면 받지 않는 일을 가리켜 원래 사람의 마음에 의(義)가 있음을 깨닫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이라고 이름하였다. 언제 일찍이 칠정 이외에 사단을 새로 만들어 낸 적이 있었던가. 말류(末流)의 지리한 폐단을 성선설(性善說)과 같이 여겨 담론하는 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이기(理氣)를 두 가지 사물로 나누니, 애석하도다.


‘이승기행(理乘氣行 이가 타니 기가 행한다)’의 ‘승(乘)’ 자는 실로 바보 앞에서 꿈 이야기를 하는 격이다. 이(理)와 기(氣)는 원래 함께 행하기에 둘이라고 말하지만 두 가지가 아니고, 하나라고 말하지만 하나가 아니다. 단지 이(理) 하나만으로는 형체를 이루지도 못하고 스스로 행하지도 못하여 기(氣)로써 행하기 때문에 ‘승’ 자를 빌려 사람들을 깨우쳐 주었다. 진실로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양을 낳고 음을 낳는다.〔生陽生陰〕”라는 구절의 ‘생(生)’ 자와 같이 드디어 후세 사람들의 끝없는 갈등을 초래했다.(옮긴이 註: 이는 선생이 율곡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과 그 사유적 맥락을 같이 함을 뜻한다. 태극도설은 주자의 세상이치와 도에 대한 사유론적 철학사상으로 주자 이후의 사람들이 거기에 표현된 몇몇 문자에 천착하여 다양한 해석과 사색 그리고 숱한 사설을 이끌어 내었다.)


옛사람은 해파리와 새우 눈을 좋은 비유로 여겼는데 이 역시 좋은 비유가 아니다. 해파리와 새우는 별종의 동물이 서로 붙어 있는 것이다. 해파리의 시력은 진실로 새우의 눈이 필요하지만, 새우의 눈은 해파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기(理氣)의 경우에는 이(理)에서 분리된 기(氣)가 없고, 기에서 분리된 이가 없으니, 어찌 해파리와 새우의 눈에 비유할 수 있겠는가. 공자가 드물게 말한 것은 진실로 이유가 있다.


공자가 이에 대해 말하기를 “성(性)은 서로 가깝다.〔性相近〕”라고 했고, 또 “형이상(形以上)을 이(理)라고 하고, 형이하(形以下)를 기(氣)라고 한다.”라고 하였다. 이상, 이하라고 했으니 하나의 사물이 아님을 알 수 있고, 형이상, 형이하라고 했으니 두 가지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사람이 처음에는 수준을 뛰어넘어 천착(穿鑿,깊이 연구함,후벼서 파서 구멍을 뚫음, 공연히 이치에 맞지 않게 이러쿵저러쿵함)하기를 좋아해서 마침내는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여 대립하면서 이기려고 하다가 서로 어둠에 빠져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니, 또한 어찌할 수 없는 상태이다.


<역자 註>

1. "욕하면서 음식을 주면 받지 않는 일": 《맹자》 〈고자 상〉에 나오는 말로 “욕하면서 주면 길 가는 사람도 받지 않고, 발로 차서 주면 걸인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라고 하였다.

2. "옛사람은 해파리와 새우 눈을 좋은 비유로 여겼는데" : 《맹자》 〈만장 하〉에 “지혜는 기교에 비유할 수 있고, 성(聖)은 힘에 비유할 수 있다. 백 보 밖에서 활을 쏠 때에 목표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은 그대의 힘 덕분이라고 하겠지만, 적중시키는 것은 그대의 힘이 아닌 것과 같다.〔智譬則巧也 聖譬則力也 由射於百步之外也 其至爾力也 其中非爾力也〕”라고 하였다. 해당 구절의 소주(小註)에서 주자는 성인(聖人)이면서 지혜롭지 못한 경우 새우가 없는 해파리와 같아 어디로 향할 줄을 모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하였다. 원래 이 말은 곽박(郭璞)의 〈강부(江賦)〉에 “해파리의 눈은 새우이다.〔水母目蝦〕”라고 한 데서 나온 표현이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사단칠정에 대한 변〔四端七情辨〕',「존재집(存齋集) 제17권/ 잡저(雜著)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서종태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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