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권(原權 ): 권도에 대하여
권(權)은 저울대에 추를 맞추는 명칭으로, 추이(推移 무게에 따라 눈금이 옮겨 간다.)하는 물건이다. 저울에 아직 물건이 없을 때에는 저울추가 정해진 눈금에 있어 저울대와 수평이 되니 바른 것 중의 바름이다.(이는 태극(太極)의 진(眞)이고 천만 가지에 대한 하나의 이치이며, 조화의 근본이고 인성(人性)의 근본이다.)
저울에 물건을 올릴 적에 물건의 무게가 1근이면 저울추가 1근으로 옮겨 가서 저울대가 1근과 수평을 이루면 바름이 된다. 물건의 무게가 2, 3근이면 저울추가 2, 3근으로 옮겨 가서 저울대가 2, 3근과 수평을 이루면 바름이 된다. 아주 미세하게 조금 옮겨 바르게 되는 경우도 있고, 어느 정도 분량(分量)을 옮겨 바르게 되는 경우도 있다. 바르게 되는 이유는 애초 정해진 저울 눈금이 한 이치이기 때문에 단지 저울대가 수평임을 보고 바름을 삼는 것이다.
순(舜)이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를 든 것은 권도(權道)이다. 후사를 잇지 못해 부모를 불의(不義)에 빠뜨리는 것이 무겁기 때문에, 부모님께 알리지 않고 저울추를 장가간 데로 옮겨 집안을 잇는 저울대와 수평을 이루었다. 탕무(湯武)의 정벌은 권도이니, 천하가 도탄에 빠지는 것이 무겁기 때문에 저울추가 정벌로 옮겨 가서 세상을 구제하는 저울대와 수평이 되었다. 물에 빠진 형수에게 손을 건네는 것은 권도이니, 사람으로서 승냥이 같은 행동이 무겁기 때문에 저울추가 손을 건네는 데로 옮겨 가서 인도(人道)의 저울대와 수평이 되었다.
만일 저울추를 옮겼는데 저울대와 수평이 되지 않는다면 권도(權道)라고 말할 수 없다. 모르는 자는 권도와 정도(正道)가 서로 상대되는 것만 보고 마침내 반경합도(反經合道)의 학설을 하게 되었다. 정도에 반하자마자 도(道)가 아니니, 어찌 이른바 ‘합(合)’이라는 것이 있단 말인가.
당 태종(唐太宗)이 형을 살해한 일, 숙종(肅宗)이 현종(玄宗)에게 양위를 받아 즉위한 일, 양웅(揚雄)이 왕망(王莽)에게 벼슬한 일에 대해 세속에서는 이른바 ‘권(權)’이라고 하지만, 인륜의 저울대가 더욱 무너져 저울추가 옮겨 가도 바르지 못해 저울추가 저울추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장차 그런 저울을 어디에 쓰겠는가.
주(周)나라의 도가 쇠퇴하면서부터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 것이 권도를 사용하는 비결이 되어 삼강(三綱)이 몰락하고 오상(五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사라졌다. 아, 슬프도다. 아무리 일상생활의 사소한 일이라도 그럭저럭 권도를 쓰려는 의사가 있으면 모두 이는 구차하고 사사로운 계책이다. 더구나 큰일에 있어서이겠는가.
오직 인(仁)에 익숙하여 절대로 터럭 하나만큼의 사사로움이 없고, 의리가 정밀하여 모두 천리(天理)의 마름질이여야만 비로소 권도를 행할 수 있다. 성인이 아니면서 권도를 말하는 것은 모두 동쪽 담을 넘어 처녀를 끌어오는 격이니, 매우 두려운 일이다.(세속에서 어버이를 장사 지낼 적에 권장(權葬)이라고 칭하는 자가 있다. 스스로 극진히 해야 할 상황에서 ‘권(權)’이라고 칭하고 스스로 편안히 여긴다면, 또한 권도를 쓰지 않는 데가 없을 것이다. 권도가 사람을 빠뜨리고, 천지를 뒤집어 바다와 육지를 뒤바꾸는데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자이다. 항상 권도를 칭하기를 좋아하는 자는 선비가 더불어 벗해서는 안 된다.)
※[역자 주]
1.숙종(肅宗)의 일 : 당나라 때 안녹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키자 당 현종(唐玄宗)은 촉(蜀)으로 파천하면서 태자인 숙종에 전위(傳位)하니, 숙종은 황제가 되고 아버지인 현종은 상황(上皇)이 되었다.
2. 양웅(揚雄)의 일 : 양웅의 자(字)는 자운(子雲)으로, 전한(前漢) 때의 유명한 학자이다. 왕망(王莽)이 신(新)나라를 세우자 벼슬하였다. 《漢書 卷87 揚雄傳》 훗날 주자(朱子)는 《통감강목(通鑑綱目)》에서 양웅을 폄하하여 “왕망의 대부 양웅이 죽었다.〔莽大夫揚雄死〕”라고 썼다.
3.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펴는 것 : 원문의 ‘왕척직심(枉尺直尋)’은 한 자를 굽혀 여덟 자를 편다는 말로, 큰 이익을 얻기 위하여 소소한 절개를 버린다는 뜻이다. 《孟子 滕文公下》
-위백규(魏伯珪, 1727~1798),'원권(原權), 존재집 제16권/ 잡저(雜著)/원류(原類)-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오항녕 (역) | 2013
※[옮긴이 주]
반경합도(反經合道): 권도를 이해하는 방식, 즉 반경합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대표적으로 한대의 학자들과 송대 주자를 중심으로 하는 학자들과 대립되는 해석을 보인다. 후대의 학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한대 학자들이 주장하는 반경합도를 비판하고 거부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이유가 있다. 권도를 반경합도로 풀이한 것을 이를 추종하는 이들이 왜곡하여 자기합리화의 명분으로 삼는 빌미를 제공한 까닭이다. 존재선생도 글에서 논하고 있듯이 후대에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반경합도에 근거하여 권도를 명분으로 삼고 곡학아세한 역사의 흔적은 그 해악의 심각함을 말해 준다. 요샛말로 하자면, 권도를 왜곡하여, '과정이 도리, 이치, 상식 등에 맞지 않고 악할지라도 동기와 결과가 선하고 좋으면 선'이라는 상황론적 자기 합리화와 자가당착이 바로 왜곡된 반경합도라 하겠다. 이러한 왜곡된 가치관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특별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보통사람들, 남녀노소 무론하고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존재선생은 송대 학자들인 정이천과 주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관점, 즉 성인이 아니면 권도는 어려운 것이라는 해석을 따르고 있다. 여튼 존재선생의 윗글은 권도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해를 도와 주는 글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해 보건대, 권도가 비록 어려운 것임에는 이해가 가지만 오직 성인(聖人)만이 제대로 베풀 수 있다는 것에는 나름 의문을 갖는다. 반경합도를 왜곡한 자들과 마찬가지로 치우치지 않는 정도(正道)를 강조하는 자들에게도, '실수는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등과 같은 나름의 자기 합리화의 명분을 제공하는 여지가 있기때문이다. 공자의 사상에서 경과 권은 인(仁)의 실천적 개념의 바탕이 되는 핵심주제다. 즉 경이 인(仁)으로 나가가기 위한 원리원칙이라면, 권은 융통성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어렵다고 했지 불가능하다고는 결코 논하지는 않았다. 유학을 포함하여 소위 인문학을 한다는 사람들이 생각만큼 그리 인(仁)하지 않다는 것은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이는 심리적 방어기제의 하나인 반동형성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여튼 인(仁)은 인간에 대한 신뢰를 기본바탕으로 두고 있다. 그 요체는 남의 생각이 아닌 자기 스스로 바른 것을 판단하고 선택하며 또 결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인 인간에 있다. 맹자도 "예답지 않은 예, 의답지 않은 의는 대인은 남이 그렇게 한다고 해서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권도는 개인의 인격에 좌우되고, 지식과 지혜의 역량에 달려 있다고 생각이 든다, 그 중에서 특히 인격은 그 핵심이다. 주석으로 시작한 글이 어쭙잖은 개인적 견해로 자꾸 길어진다. 까닭에 자료를 뒤지던 중에 마침 개인적인 의문과 또 비슷한 이해를 같이하는, 참고할만한 학술 논문이 하나 찾아진다. pdf 문서에 링크를 걸어둔다. <☞참조: '논어의 권(權)개념(홍익대/박성규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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