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를 취하되 문장을 흉내내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요즘은 산골이나 바닷가 촌구석이라도 모두 한양 옷을 입고 한양 말을 쓸 수 있으니, 비루하고 속된 풍속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기뻐할 만한 일이다.”라고 한다. 나는 기뻐할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든 존재는 바탕이 있은 뒤에 문채를 내고 멀리까지 지속될 수 있다. 요즘 풍속에 유행하는 한양 말과 한양 옷은 백성들의 마음이 불안하여 모두 겉으로 번다하게 꾸미기에 바빠 그 바탕이 전부 손상된 결과이니, 온 세상 애나 어른이나 충후(忠厚)하고 신실(信實)한 사람이 없다. 가죽이 없으면 털이 어디에 붙을 수 있겠는가? 절대 붙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퇴옹(退翁 이황(李滉))이 영남의 발음을 고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옛 의미가 있다. 《주역》에 “위는 하늘이고 아래는 연못인 것이 이괘(履卦)이니, 군자가 이를 보고서 위아래를 판단하고 백성들의 마음을 안정시킨다.〔上天下澤履 君子以 辨上下 定民志〕”라고 했으니, 그 말이 지극하다.(중략)


천지인(天地人)이 유구하면서 무너지지 않는 까닭은 거기에 당연한 법칙이 있기 때문인데, 당연한 법칙이 바로 이른바 도(道)이다. 도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성인이 설명하여 글에 실었다. 크게는 천지와 일월, 산악과 하해(河海), 세세하게는 금수와 곤충, 초목과 진흙이나 모래먼지까지 경서의 뜻을 벗어난 것이 없다. 인간의 경우, 크게는 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나 삼강오상(三綱五常), 세세하게는 먹고 마시는 일, 말과 웃음, 행동거지, 똥을 싸고 오줌 누는 일, 침을 뱉고 콧물을 흘리는 일까지 경서의 뜻을 벗어난 것이 없으니, 글로써 도를 실었고 천하에 도 밖에 있는 존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경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은 연구, 사색하여 그 뜻에 통달하며, 도를 인식하고 실천에 통달할 수 있다. 그렇지만 맹자 이후 경서를 제대로 읽은 사람이 1천 5백 년 동안 없었는데, 염락(濂洛 주돈이(周敦頤)와 이정(二程))의 여러 현자가 비로소 맹자의 독법(讀法)을 터득했고, 주자에 이르러 크게 천명(闡明)했다. 그래서 성인의 은미한 말씀과 심오한 뜻이 해와 별처럼 환해졌고, 이때부터 배우는 사람들이 그 학설을 대대로 지켜 오면서 경서를 읽는 법에 대해 알 수 있는 사람이 많아졌다.


지금도 성인의 경전이 여전히 남아 있고 정자와 주자의 학설이 모두 있는데, 배우는 사람은 도대체 누가 막고 있기에 제대로 읽으려고 하지 않는가. 아아, 이상한 일이다. 〈탕고(湯誥)〉에 “상제께서 하민들에게 충(忠)을 내려 주어 그것에 따라서 떳떳한 본성을 갖게 했다.”라고 했으니, 여기서 말한 본성이 어찌 명백하지 않겠는가만, 순경(荀卿)으로부터 한당(漢唐)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본성을 인식한 사람이 없으니, 〈탕고〉를 잘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 한(漢)나라 이래 《논어》ㆍ《대학》ㆍ《중용》ㆍ《맹자》를 모두 읽고도 여전히 알지 못했으니, 제대로 읽지 않은 것이 더욱 심했다. -


《논어》와 《맹자》는 모두 도(道)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정녕코 지극히 절실한 것은 《중용》에서 다했다. 동자(董子 동중서(董仲舒))는 다만 “도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大原出於天〕”라고 했고, 한자(韓子 한유(韓愈))는 다만 “요 임금이 도를 순에게 전했다.〔堯以是傳之舜〕”라고 했는데, 모두 그 체용(體用)을 상세히 연구하지는 못했다. 유종원(柳宗元) 이하 세 소씨(蘇氏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에 이르기까지는 도가 무엇인지 전연 몰랐고, 청색도 백색도 아닌 하나의 덩어리가 어딘가에 있는 것을 도라고 부른다고 이해하면서, 자신은 높이 올라가서 도를 얻어 가지고 놀며 스스로 좋아하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어찌 책을 읽은 사람들이 아니겠는가마는, 모두 신을 신고 가려운 데를 긁고 있으면서 끝까지 연구해 내지 못하였다. 또한 그 마음이 문장이라는 작은 기량에 들뜨고 자만이 넘쳐, 곧 성인의 문장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의심을 갖고 이치를 탐색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그들이 쓴 문장은 기이하고 난삽하지 않으면 허튼 말로 속이고 애매하게 늘어진다. 한 편의 글이나 한 문단의 글도 이치에 통달한 말이 없었으니, 모두 경서를 제대로 읽지 않은 폐해이다.


선비로서 도(道)를 알지 못하면 문장도 아름다움을 다할 수 없다. 고금의 문장가로는 오직 퇴지(退之 한유(韓愈))의 문장을 아름답다고 했고, 시인으로는 오직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시를 아름답다고 했는데, 자미는 그 자체로 하늘이 내린 자질로 도에 근접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시문을 짓는 사람은 일체 그런 자질이 없다고 해야겠지만, 양웅(揚雄) 같은 경우에는 어찌 문재(文才)가 탁월했던 자가 아니겠는가만, 그의 좋지 않은 독서는 더욱 심했다. 《주역》과 《논어》는 마음을 붙이고 100번을 읽어 보면 어찌 의심할 수 있는 문장이겠는가? 그런데도 의심하려고 했으니, 이는 잘못된 독서 때문이다. 그가 말한 태현(大玄)은 더욱 이치가 없으니, 오로지 《주역》을 호로(葫蘆)라고 생각하여 수묵(水墨)으로 모호하게 그려 냈다. 그러나 장(章)을 그리고 구(句)를 그렸지만, 오직 글자는 그리지 못한 격이다.


성인의 경서는 단지 평이한 말만 썼지만 한 글자에 많은 오묘한 뜻이 담겨 있다. 이는 마음에 이치가 밝기 때문에 말을 토해 내면 이렇게 된 것이지, 억지로 의식하고 생각해서 찾아내 쓴 것이 아니다. 양웅은 이치의 유무에 대해 마치 안개 속에서 꽃을 보듯이 대충 살펴보고 평이한 글자를 쓰면 혹시 사람들이 가볍게 볼까 두려워 몽롱한 그림자 속에서 궁극적인 의미를 찾았다. 이 때문에 부득불 난삽한 글자를 써서 옆 사람을 협박했던 것이니, 아이들이 술래잡기를 하거나 전투마가 섶을 끌고 다니는 듯하여, 기실 건조하고 메말라서 단조로운 맛뿐이며 더 이상 여운이 담긴 뜻이 없다.(중략)


《논어》의 문장은 쉬우면서도 엄격하고 간략하면서도 밀도가 있어서, 말은 땅처럼 가깝지만 뜻은 하늘처럼 멀다. 성인이 말하고 성인의 문도가 기록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같은 공자의 말이지만 다른 저서에 흩어져 나오는 말은 순수함과 깊고 정밀함이 모두 같지 않으니 《논어》와 비교하면 알 수 있다. 그러나 양웅이 〈장양부(長揚賦)〉와 〈우렵부(羽獵賦)〉를 만들고 남은 생각을 가지고 《논어》를 흉내 냈으니, 이는 《논어》를 제대로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독서를 잘하는 사람은 그 의미를 취하지 문장을 흉내 내지는 않으니, 의미를 취하면 살고 문장을 흉내 내면 죽는다. 양웅의 문장은 완전히 죽은 문장이며 자구마다 손숙오(孫叔敖)의 흉내를 내고도 전혀 부끄러움이 없었으니, 이것이 그가 망대부(莽大夫 양웅을 왕망(王莽)의 신하라고 빗대는 말)가 된 이유이리라.


독서를 잘못하는 데는 고금이 차이가 없다. 《시경》과 《서경》의 서(序)를 쓴 사람이 어찌 스스로 독서한 사람이라고 일컫지 않았겠는가만, 《서경》에 ‘과형(寡兄)’, ‘짐제(朕弟)’라고 불렀는데도 오히려 성왕(成王)의 글이라고 생각했고, 《시경》에 무왕(武王)의 시호가 있는데도 오히려 무왕의 시라고 판단했다. 천근(淺近)하고 명백한 것도 이와 같은데, 하물며 문장의 뜻이 깊은 경우이겠는가?


육상산(陸象山 육구연(陸九淵))은 이른바 호걸지사(豪傑之士)였다. 그런데 “한번 음으로 한번 양으로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一陰一陽之謂道〕”라는 말을 거론하여 ‘음양은 형이상자(形而上者)’라고 했다. 《주역》에서 만약 “하나의 음과 하나의 양이 도이다.〔一陰一陽謂之道〕”라고 했으면 이는 음양을 가리켜 도라고 한 것이다. 지금 “한번 음으로 한번 양으로 하는 것을 도라고 한다.” 하였으니, 이는 한번 음이고 한번 양이 되는 근거가 도라는 말이다. 문장을 지을 때 어조사를 쓰는 방식에 대해서도 여전히 그 차이를 연구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오묘한 진리이겠는가. 그가 무극(無極)과 태극(太極)의 뜻을 터득하지 못한 것은 괴이할 것조차 없다.


황산곡(黃山谷 황정견(黃庭堅))은 무극과 태극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이 시인은 책할 것도 없다. 왕 감주(王弇州 왕세정(王世貞))의 경우, 그의 자부심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 그런데도 “‘무극이면서 태극이다.〔無極而太極〕’라는 말은 내가 감히 따를 수 없고 ‘고요하게 되면 음을 낳고 움직이면 양을 낳는다.〔靜而生陰 動而生陽〕’라는 말도 내가 감히 따를 수 없다.”라고 했으니, 그 삶이 참으로 가소로울 뿐이다.


그 방향과 형체가 없는 것을 가리켜 무극(無極)이라고 하고, 그 머리가 되는 것을 가리켜 태극(太極)이라고 하니, 태극 위에 따로 무엇인가의 영역이 있어서 무극이 되거나, 무극 아래에 별도로 무엇인가의 영역이 있어서 태극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무극은 태극이 되는 근거이다. 이른바 태극은 곧 무극이니, 무극이 아니면 태극이 되기에 불충분하고, 태극이 아니면 무극은 모습을 드러낼 수 없다. 그러므로 “무극이면서 태극이다.”라고 했으니, 여기의 ‘이(而)’ 자는 하늘이 만들고 귀신이 주선한 문장의 지극히 묘한 곳이다. 왕 감주가 잘못 읽어 깨닫지 못했으니, 안타깝도다.


가령 주공(周公)을 논찬하는 사람은 “원성(元聖)이면서 총재(冢宰)”라고 했지만, 모르는 사람은 “단지 총재라고 하면 충분하지, 하필 원성을 겹치는가.”라고 한다. 또 모르는 사람은 “원성으로부터 총재가 되었다.”라고 하니, 모두 주공을 논의하기에는 부족한 자이다. 주공이 총재가 되었으면서도 원성이 아니었으면 나라를 안정시켜 백관을 통솔하기에 부족했을 것이고, 원성이 되었지만 총재가 아니었다면 백관을 통솔하여 나라를 안정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오직 원성이면서 총재였던 까닭에 주공다웠던 것이다. 총재 위에 따로 원성이 있던 것이 아니고 원성 아래에 따로 총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니, 이는 본디 알기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모두 읽을 때 끝까지 탐구하지 않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생(生)’ 자의 경우, 태극은 하나의 혼륜(混淪 섞이고 희미함)한 존재이고 두 양태〔兩儀 음양〕를 낳는데, 만일 ‘생’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글자를 쓸 것인가. 대체로 태극의 근본을 최대한 미루어 말하면 고요함이 그 근본이고, 고요함이 지극해져서 움직이면 분명히 양(陽)이 생긴다. 어찌 ‘낳는 도’에 대해 ‘낳는다.’라고 말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겠는가. 단지 최초의 고요함만 생각하여, 고요할 때 어디에서부터인가 끊어서 도가 사라지고 음을 낳는다고 할 수 있다. 이 ‘생’ 자는 출발점이 없는 듯하지만, 이 문제를 ‘시작이 없다.’고 표현할 수조차 없는 데까지 미루어 올라가면 바로 고요함과 움직임이 서로 낳는다. 본래는 고요함뿐이다가 천황(天皇) 첫해부터 끊어서 갑자기 움직여 양을 낳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다만 움직임을 상대로 해서만 “고요하면 음이 생긴다.”라고 말할 수 있다. 저 이른바 “음을 낳고 양을 낳는다.”라는 말이 곧 “하늘을 낳고 땅을 낳는다.”라는 것이다. 하늘을 낳고 땅을 낳는데 ‘낳는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떤 글자를 쓰겠는가?


육상산 같은 무리는 제대로 읽어서 이치에 통달하여 자득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매번 일찍 일가를 이룬 문호(門戶)만 세우려고 한다. 한결같이 먼저 선입견을 가진 서투른 안목을 위주로 하면서 의심하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끝내 도에 들어갈 날이 없는 것이다.


“동네 이름이 ‘어머니를 이긴다.〔勝母〕’라 하여 증자(曾子)가 들어가지 않았다.”라고 했다. 어떤 사람은 이를 의심하지만 여기에는 본디 실제 그럴 만한 이치가 있다. 승모(勝母)라는 이름은 말하자니 통탄스럽고 듣자니 놀라운 일이므로, 이런 이름을 가진 동네에 사는 사람은 인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단 하루를 묵는 것도 오히려 편치 않을 뿐 아니라, 이런 동네에 사는 사람이 어찌 군자가 묵을 집 주인이 될 수 있겠는가? 자리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고, 잠시도 떠날 수 없다는 이치가 또한 여기에 있다. 이 의미를 깊이 체득하면 그럭저럭 구차하게 답습하는 폐단을 면할 수 있을 것이다.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존재집(存齋集) 제13권/ 잡저(雜著)/ 격물설(格物說)/ 사물(事物)」 중에서 부분-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ㆍ한국고전문화연구원 ┃ 오항녕 (역) ┃ 2013


"시(詩)를 해석하는 사람은 글자(文)로써 말의 뜻(辭)을 해하지 말며, 말(辭)로써 사람의 뜻(志)을 해하지 말고。오직, 읽는 사람의 마음(意)으로 작자(作者)의 뜻(志)을 맞아들인다면 비로소 시(詩)를 안다고 할 수 있게 된다 -맹자(孟子)만장상(萬章上)-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