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신에게 올리는 제문(祭文神文)
갑진년(1784)도 저물어 한 해를 마치는 섣달그믐 경술일 경금주인(絅錦主人, 이옥의 호)은, 이날 시신(詩神)에게 제사를 올리는 옛 사람의 의로운 일을 삼가 본받아, 글을 지어 문학의 신의 영전에 경건하게 고합니다.
아! 아! 문학의 신이여! 내가 그대를 저버린 일이 너무도 많구나! 나는 배냇니(젖니)를 갈기 전부터 글쓰는 일에 종사하였으므로 그대가 나와 동무가 된지도 어느덧 22년이라는 오랜 세월이 흘렀다. 내 천성이 게을러 부지런하지 못한 관계로, 전후에 읽은 책 가운데 《서경(書經)》은 겨우 사백 번을 읽었고, 《시경(詩經)》은 전후에 일백 독(讀)을 하였는데 아송(雅頌)은 배를 더 읽었다. 《주역》은 삼십 독을 하였고, 공자,맹자,증자,자사가 지은 《사서(四書)》는 그보다 이십 독을 더하였다.
마음에는 《☞이소(離騷)》를 가장 사랑하여 입에서 읽기를 그만둔 적이 없었으나 그것조차도 일천 독을 채우지는 못하였다. 그 나머지 책은 대체로 눈으로 섭렵하였을 뿐이요 서산(書算)으로 계산하여 읽지는 않았다.
또 눈으로 섭렵한 책에 대해 말한다면, 주씨(朱氏)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축씨(祝氏)의 《사문유취(事文類聚)》, 유종원(柳宗元)의 문장 약간 편에 다소 힘을 기울였다. 통계를 내보면, 서책이 수레 한 대를 채우지 못할뿐더러 근면한 사람이 몇 해에 공부할 양에 견줄 정도다. 그러니 입에서 내뱉는 말은 거칠고, 가슴에서 뽑아내는 생각은 졸렬하여 문인의 반열에 끼일 수가 없다.
그렇기는 하나 오늘날의 세상을 내 일찍이 깊이 들여다보았다. 박학으로 칭송이 자자한 자가 있어 질문을 해보니 독 속에 들어앉아 별을 세는 꼴이었고, 사부(詞賦)와 고문(古文)을 잘 짓는다고 알려진 자가 있어 글을 뽑아 읽어보았더니 남의 글을 훔치고 흉내 내는 꼴이었으며, 시문(時文)에 능하여 과장(科場)에서 기예를 뽐내는 자가 있어 구해다 감상해보니 모두 허수아비를 꾸며서 저잣거리에서 춤추게 하는 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솜씨가 좋다고 하여 저들은 모두가 큰 도읍에서 명성을 날리고, 태평성대에 활개를 친다. 살아서는 과장(科場 과거시험장)과 관각(館閣, 홍문관과 예문관)에서 솜씨를 발휘하면서 스스로 여유를 부릴 정도이고, 죽어서는 글이 목판에 새겨지고 빗돌을 수놓는다. 몸은 죽어도 문장은 죽지 않는다. 낮은 것도 그들이 쓰자 높아지고, 자잘한 것도 그들이 쓰자 크게 되어 모두들 제 문학의 신을 저버리지 않는다. 유독 나만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
아무리 경서에 술인냥 탐닉하고, 서책에 여자인 양 빠진다해도 마찬가지요. 눈과 귀가 놓친 것을 손으로 베껴 공부해도 나를 박학하다고 칭찬하는 놈 하나도 없다. 칭찬은 커녕 마을의 멍청한 아이들 조차 도리어 모욕한다.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열린 시회에서나 송별하는 자리, 유람하는 모임에서 사실을 서술하여 산문을 짓고 율격을 넣어 시를 지으니, 크게 애쓰지 않은 사이에도 그 수량이 많아졌다. 당시풍도 아니고 명시풍도 아니며, 두보풍도 아니고 소식풍도 아니었다. 지음이 두 서넛 있어 분에 넘치게 칭찬하며 마음에 드는 말이 잇다고 평하기는 한다.
그러나 슬프다! 한유를 만나지 못했으니 항사가 누구에게 하소연하랴! 외출할 때는 이웃 사람의 시통을 쓰고, 집에 있을 때에는 시주머니에 넣으면 되니, 큰 소의 허리를 짓누를 큰 전대가 굳이 필요하랴!
시험장에서 쓰는 문장은 대방가(大方家)가 달갑게 여기는 문학은 아니지만 수재와 학구는 그러한 문장에 무게를 둘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성균관 유생들이 조정에 진출하는 길이므로, 토끼잡는 올가미요 물고기잡는 통발격으로 생각하여 반평생 신경을 쓴다.
따라서 과거에 뜻을 둔지 십 육년 동안 천 편에 가까운 시를 지었고, 그 사이 이백편에 이르는 변려문(駢儷文)도 지었으며, 제문 쉰 편을 채웠고, 부(賦), 논(論), 명(銘), 경의(經義)를 틈틈이 번갈아 지어냈다. 망령되이 "과거에 한 번 합격하기에 부끄럽지 않을 정도다." 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나무라는 자는 오히려 "시(詩)는 화려해야 하건만 오히려 꺽꺽하고, 변려문은 치밀해야 하건만 노성하고, 책문은 적절해야 하건만 넘친다. 부(賦)이하는 비판할 가치조차 없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까닭에 잠시 성균관에서 공부할 적에는, 가까스로 장원에 가까웠지만 여러차례 급제에 미치지 못했고, 일곱번이나 과장에 들어갔으나 끝내 한번도 합격하지 못했으며, 한 차례 대궐에서 대책문(對策文)을 썼으나 내쫒김을 당했다.
나이 스물 여섯살이 되는데 아직도 일개 선비일 뿐이니 그 누가 이 사람이 과제(科題)에 능하다고 평가하겠는가? 설령 그들이 나를 능하다고 해도 나는 자신을 믿지 못하겠다. 자초지종을 묵묵히 따져보니 내가 그대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 몇이나 되는가?
아! 똑같은 봄이건마는 연꽃과 국화를 만난 봄은 반드시 머뭇머뭇하며 꽃을 피우기 어려워서 일찍이 피는 오얏꽃(자두나무 꽃)에 비교할 수가 없다. 이것이 어찌 봄의 잘못이랴! 연꽃과 국화가 봄을 저버린 결과다.(옮긴이 주: 연꽃은 여름, 국화는 가을 꽃)
가만히 생각하니 낯이 뜨겁고 창자에 열이 나서 차마 더 말을 늘어놓지 못하겠다. 바라건대, 그대 문학의 신은 나를 비루한 놈이라 여기지 말고 바보 같은 성품의 나를 한 번 더 도와서 예전의 습성을 한 번 씻어버리게 해달라. 내 비록 불민하나 새해부터는 조심하여 그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노력하리라.
오늘은 세모라, 내 감회가 많이 생겨 붓꽃을 안주 삼아 들고 벼루샘물을 술 삼아 길어 올리니 마음의 향기 한 글자가 실낱같이 가늘고 희게 타오르는구나. 글을 잡고 신(神)에게 고하노니 신령은 와서 흠향하시라!
-이옥(李鈺, 1760~1815) , 제문신문(祭文神文)-
▲번역글 출처: 『조선의 명문장가들』(안대회 지음, 휴머니스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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