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야(七夜): 일곱 가지 밤
어느 날 밤, 내가 등잔 기름이 다 닳은 뒤에 잠이 들었는데 실컷 자고 깨어 보니 아직 캄캄하더라고. 그래서 심부름하는 아이한테 물었지.“밤이 얼마나 됐느냐?” “아직 자정이 안 됐습니다.”
그래서 또다시 잠이 들었어. 실컷 자고 깨어나서 또 아이한테 물었지. “밤이 얼마나 됐느냐?” “아직 닭 울 때가 안 됐습니다.그래서 또다시 억지로 잠을 청했지마는 잠이 와야 말이지. 몸을 뒤척뒤척하다가 일어나서 또 아이한테 물었어. “밤이 얼마나 됐느냐? 방 안이 환한 걸 보니 날이 샌 게지.” “아니, 아직 날이 새지 않았습니다. 방 안이 환한 것은 달빛이 지게문에 비쳐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소리쳤어. “아이고 참. 겨울밤이 길기도 하구나!” 그랬더니 아이가 뭐랬는지 알아? “무슨 밤이 길다고 그러십니까? 나리한테나 긴 게지요.” 이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성을 내어 따졌지. “뭐라고? 왜 그런지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말 못하면 혼내 주겠다.” 그랬더니 아이가 차근차근 말을 하는데. 듣고 보니 썩 그럴 듯하더라고. 너희들도 한 번 들어볼래?
"친한 벗이 먼 길을 걸어 나를 찾아왔다고 칩시다. 어릴 적 서로 친하게 지냈던 벗인데 이제야 서로 만나서 함께 술을 마신다고 쳐요. 그러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흰 술 한 섬과 맑은 술 한 닷 말을 걸러 놓고, 술병 술단지 큰 술잔 작은 술잔을 왼쪽 오른쪽에 주욱 늘어놓고, 돼지고기구이 쇠고기찜과 꿩꼬치구이 잉엇국에 향기로운 나물, 맛난 젓갈, 금귤, 홍시 같은 갖가지 음식을 벌여 놓고, 생황은 삘리리삘리리 음을 맞추고 거문고는 둥기덩 강물 소리를 내며 사랑 노래를 연주하면 그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흥에 겨우면 노래하기를 '손님이 와서 즐거운데 술이 있어 더 좋구나. 마시고 먹으니 이보다 더 좋은 밤이 어디 있으리?' 합니다. 흥이 더 무르익으면 일어나 칼춤을 추기도 하고 거문고 장단에 맞춰 노래 부르기도 하지요. 이렇게 놀다 보면 술 석 잔을 거푸 마셔도 취하지 않고 술 열 통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텐데. 이럴 때도 밤이 길다고 하실 건가요?” 듣고 보니 할 말이 없지 뭐야. 그래서 잠자코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서울 거리에 젊은이들이 노름을 하면서 논다고 칩시다. 투전목(두꺼운 종이로 숫자를 만드는 노름 ‘투전’에 쓰이는 종이 한 묶음)을 던지고 골패쪽(나무와 뼈 조각으로 그림과 숫자를 맞추는 노름. ‘골패’에 쓰이는 조각)을 훑으며 재주를 다투고 판돈을 센다고 쳐요. 그러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노름판에는 큰 촛불이 쌍을 이뤄 밤을 환하게 밝히고, 맛좋은 술이 강물처럼 넘치겠지요. 패를 죽 늘어놓고 돈을 점점 더 많이 걸다가, 피곤하면 몇몇씩 패를 지어 갈마들며 쉬기도 할 겁니다. 돈궤를 끌어안고 있던 부자도 금세 빚쟁이가 되는가 하면, 돈을 다 잃고 풀이 죽어 있던 사람이 금세 돈을 많이 따서 횡재를 하기도 합니다. 성미대로 먹고 마시고 흥청대면서, 노름을 무슨 큰일이라도 하는 것처럼 여겨 자꾸만 돈을 걸 뿐 도무지 물러날 줄을 모르지요. 밤새도록 노름을 해도 눈은 눈곱 하나 없이 반짝반짝 빛날걸요. 돈을 잃으면 주먹을 쥐고 흔들다가 벽에 대고 성을 내기도 하고, 마구 왁자지껄 떠들다가 자랑도 하고 탄식도 할 텐데, 이럴 때도 밤이 길다고 하실 건가요?” 딴은 그렇지. 뭐 할 말이 있어? 그저 고개나 주억거리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나이 열여섯 먹은 처녀와 나이 열여덟 먹은 총각이 사귄다고 칩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살면서 자주 못 만난다 쳐요. 만나면 언제나 새롭고, 헤어지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가득하여 나날이 커져만 가겠지요. 이럴 때 어쩌다가 서로 만나면 어떻겠어요? 옷자락을 부여잡고 반가워하다가, 맛난 음식도 나눠 먹고 향불도 피우며 밤을 지새우겠지요. 이야기도 나누고 장난도 하다 보면, 마음은 앉은자리처럼 점점 더 가까워질 것이고 정은 솜이불처럼 점점 더 두터워질 것입니다. 몸은 봄날의 졸음처럼 노곤하고 마음은 술에 취한 듯 몽롱할 거고요. 좋은 꿈은 오래 가지 않는다더니, 어느새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오려 합니다. 첫닭이 울까 봐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비단 휘장 드리운 문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고는 아직 날이 새지 않았다고 좋아하지요. 하느님이 부디 이런 마음을 헤아려 보름달이 기울지 않게 해 주십사고 간절히 빌 텐데, 이럴 때도 밤이 길다 하실 건가요?” 말이야 백 번 맞는 말 아닌가. 그저 헛기침이나 하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장사하는 백성이 길갓집에서 물건을 만들어 판다고 칩시다. 새벽닭이 울고 파푸종이 울리면 자리에서 일어나, 그때부터 잠을 못 자고 장사를 한다고 쳐요.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아침부터 온 식구가 분주히 일을 하겠지요. 어린 딸은 백분을 가지런히 모으고, 어린 아들은 담배를 저울에 달 것입니다. 어른들은 술동이를 씻고 누룩을 빚으며, 등잔불을 사르고 엽전을 세느라고 바쁩니다. 수많은 장인이 제각기 가진 재주로 먹고사니 맡은 일을 소홀히 할 수 있나요? 어느 때까지 무엇을 만들어 달라고 관청에서 여러 번 재촉을 하면 밤을 새워서라도 물건을 만들어야지요. 해가 지면 등불을 대낮처럼 밝혀 놓은 채 쇠를 두드리고 장작을 쪼개어 허리띠와 옷과 신을 만들어 겹겹이 쌓아 놓습니다. 밤새도록 바쁘게 일하면서 제 마음대로 그치지 못하니, 이럴 때도 밤이 길다 하실 건가요?” 그것도 그럴듯한 말일세그려. 그저 입맛만 다시면서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벼슬아치가 금모자를 쓰고 비단옷을 입고 관청 일을 본다고 칩시다. 나랏일로 바쁘고 번거로운 때를 만나서 아침 일찍 관청에 나갔다가 밤늦게 돌아온다고 쳐요. 그러면 어떻겠습니까? 마음은 바쁘고 몸은 지쳤는데, 부리나케 밥을 먹고 옷도 대충 꿰고 관청에서 일하다가 집에 돌아와 보면 섬돌에 손님들 신발이 가득하단 말이에요. 큰 머슴은 손님이 하도 많아 어쩔 줄 모르고 머뭇거리기만 하고, 여자 종들도 덩달아 여기저기 기웃거리만 하고, 모두들 자꾸만 한숨을 쉬고 하품만 하지요. 이러면 마음도 고달프고 몸도 지치지 않겠어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님 대접을 하다 보면 어느새 관청에서 심부름꾼들이 앞다투어 달려와 일거리를 전합니다. 아직 등불은 환한데 벌써 새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리고 굳게 잠겼던 사대문도 스르르 열리니 어느덧 하룻밤이 지났습니다. 밤이 아침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데, 이럴 때도 밤이 길다 하실 건가요?” 옳은 말이지. 암 옳은 말이고말고. 할 말이 없어서 그저 먼 산만 바라보다가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젊은 선비 늙은 선비가 모여 글공부를 한다고 칩시다. 과거 볼 날은 얼마 안 남았는데, 급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도 끝도 없이 간절하다고 쳐요. 차가운 털옷을 입고 책상에 기대앉아, 등잔불 긴 심지가 짧아지도록 시를 읊고 《주역》을 외우겠지요. 문장을 이어 쓰고 글귀를 풀어 보며, 마치 암탉이 알을 품듯이 온 정성을 모아 글공부를 합니다. 어쩌다가 쉴 틈이 생겨도 글을 짓고 시를 쓰지, 다른 일은 할 줄도 모르지요. ‘옛날에 소진이라는 사람은 자기 허벅지를 찔러 가며 공부를 했고, 사마광이라는 사람은 둥근 통나무를 베고 글을 읽었다는데, 나 또한 그런 뜻을 가져 볼까? 어느 때인들 그만큼 글 잘 하는 사람이 없겠는가? 이렇게 생각하고 밤낮으로 부지런히 글공부를 하면서, 마음속으로 수없이 맹세를 하고 세월을 보낸다면, 이럴 때도 밤이 길다 하실 건가요?” 거참 말도 잘 하네. 애꿎은 혀나 두어 번 차고 나서 다음 이야기를 들었지.
“나이 많은 신선이 혼자 살면서 외롭게 도를 닦는다고 칩시다. 눈도 감고 귀도 막고 오로지 마음속으로 생각만 하면서 도를 닦는다고 쳐요. 마치 허물 벗은 매미처럼 홀가분하게 앉아 있으면, 몸은 거기 있지만 마음은 몸을 떠나 버리지요. 눈을 감고 있으면 낮도 아닌 것 같고 밤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이럴 때는 그저 모든 것이 고요하고 희미합니다. 그윽하고 넓습니다. 아득하고 까마득합니다. 기쁘고 즐겁습니다. 모든 것이 뒤섞여서 뭐가 뭔지 모릅니다. 그런 그윽한 것을 손으로 잡으려고 온 정신을 모으고 있는데, 이럴 때도 밤이 길다 하실 건가요?”
이제 이야기가 다 끝났나 봐. 내가 한참 마음 속으로 이것저것 생각을 하면서 가만히 있다가, 대꾸할 말이 없어서 공연히 심술만 부렸어. “너는 대체 뭘 하는 아이기에 밤이 긴 것도 모른단 말이냐?”
“저는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천한 아이랍니다. 밖으로는 세상 물정을 모르고 안으로는 마음속 느낌도 모르지요. 무슨 깊은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일을 꾸리는 재주가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저 밥이 다 되면 먹고 날이 저물면 자고, 그렇게 살 뿐이랍니다. 두 가지 맛 중에 어느 것이 더 단지도 구별 못 하는데, 밤이 얼마나 긴지 그 시간을 어찌 낱낱이 알 수 있겠습니까?” 아이는 말을 끝내더니 이내 다시 쿨쿨 잠을 자는 거야. 나는 혼자서 탄식했지.
“아이고! 내가 듣기로 훌륭한 사람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어린아이를 본받고, 어린아이는 아직 깨나지 않은 알을 본받는다더니, 과연 모르는 것이 아는 것보다 낫구나.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과 정말 몰라서 모르는 것이 무에 다르단 말인가? 내가 저 아이를 따라야지 누구를 따르겠나?”
-이옥(李鈺 1760~1815), '칠야(七夜)', 『담정총서(藫庭叢書)4 권19 / 문무자문초(文無子文鈔) 』-
▲번역글 출처: 『이옥 단편모음, 일곱 가지 밤』(서정오 지음/ 알마 |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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