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억전(柳光億傳 ): 마음을 팔아먹은 사람

유광억(柳光億)은 영남(嶺南) 합천(陜川)에 살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시를 아주 잘 하지는 못할지라도 과시(科詩, 과거 답안용의 독특한 시체)를 잘 하기로 남쪽에서 유명하였다. 그는 집안이 몹시 가난하고 지체도 낮았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향시(鄕試)의 과시(科詩)를 팔아 생계를 잇는 자가 많았는데, 광억 또한 재력을 갖춘 양반 자제의 글을 대신 지어주고 거액의 돈을 버는가 하면, 때로는 말과 종을 거느리고 거드름을 피우기까지 하면서 정작 본인의 급제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일찍이 영남 향시(道試, 지방에서 실시하던 시험, 초시)에 합격하여 장차 경시관(서울 고시관)에게 시험을 치르러 갔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부인이 타는 가마 한 채를 갖고 길에서 그를 맞이했다. 그 집에 이른즉 붉은 대문이 몇 겹이요, 화려한 건물이 수십 채나 늘어섰다. 얼굴이 해말쑥하고 성긴 수염이 난 필경사(서사꾼) 몇 사람이 바야흐로 종이를 펴고 팔 힘을 시험하며 진퇴(進退)의 명령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광억에게는 깊숙한 방을 따로 차려 주고 날마다 아름다운 음식을 제공하고, 과거 시험지와 같은 종이에 시를 써 줄 것을 요구하였다. 주인 대감은 사나흘 만에 한 번씩 아침에 광억에게 들러 경의를 표하되 마치 아들이 어버이를 섬기는 것과 같이 했다. 드디어 회시(두번째 보는과거)를 치르고 본즉, 그 주인의 아들이

과연 광억이 대신 지은 글로써 진사에 올랐다. 


그제야 행장(여행 차림)을 차려 광억을 시골로 내려 보냈다. 광억은 영광스레 말 한 필, 종 한 사람을 거느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 돈 이만 냥을 갖고 광억을 찾아온 자도 있었거니와, 그가 일찍이 빌려 먹은 고을의 환곡(還穀)을 감사(監司)가 벌써 다 청산해 버리기도 했다. 광억의 글이 비록 수준은 높지 못했으나, 산뜻하고 날카로우며 재치와 임기응변에 능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체가 낮아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광억의 이름은 나라에서 유명해졌다. 


어느 날 서울 시험관이 경상 감사를 찾아가서 "영남에선 글재주로써 누가 으뜸입니까?" 라고 경상 감사에게 물었다. "유광억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라고 경상 감사가 말했다. "내 이번 과거 시험에서 반드시 그를 장원으로 뽑겠소." 라고 서울 시험관이 말했다. "당신의 답안지 감식하는 눈이 그렇게 될는지요." 라고 경상 감사가 말했다. 


서울 시험관은 자신하듯, "되구말구." 라고 말했다. 둘이 서로 논란을 하던 끝에 광억의 글을 알고 모름으로써 내기를 했다. 서울 시험관이 과장에 올라 '영남 시월 중구 놀이를 열었으니 남북의 기후가 같지 않음을 감탄한다.[嶺南十月 設重九會 嘆南北之候不同]'는 시제(詩題)를 내걸었다. 조금 있다가 과장의 답안을 제출하는 곳에 답안이 하나 들어왔는데, 그 시 중 두 구는 다음과 같았다. 


"중양절 놀이가 시월에 펼쳐지니[重陽亦在重陰月] 

북쪽에서 온 손님 남쪽의 데운 술 억지로 먹고 취하였네[北客强醉南烹酒]"


서울 시험관이 그 시를 읽고 '이것이 필시 광억의 시로군.' 하며 붉은 빛깔의 먹으로 비점(批點, 과거 등에서, 시관이 응시자가 지은 시나 문장을 평가할 때, 특히 잘 지은 대목에 찍던 둥근 점)을 마구 내리치고, 등급을 이하(二下, 열두 등급 중의 여섯째 등급)로 매기어 장원을 뽑았다. 급기야 봉한 부분을 떼고 보니 광억의 이름은 하나도 없기에 남모래 조사해 보니, 그 답안지들은 모두 광억이 남의 돈을 받고 시를 지어 주되 그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서 글의 차이를 낸 것이었다. 


서울 시험관은 비록 이 일을 혼자 알았긴 하나 경상 감사가 자기를 믿지 않을까 염려해서 광억의 초사(招辭, 진술서)를 받아 증거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합천에 통첩을 내려 광억을 잡아올리게 했으나 광억을 죄로 다스릴 생각은 없었다. 그리하여 광억은 군수의 명령에 의해 구속 송치되게 되었다. '나야말로 과적(科賊, 과거시험에 부정을 저지른 사람)이니 서울에 가더라도 어차피 죽을 것이니 차라리 고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리라' 고 생각하고는 그날 밤에 친척들을 모아 놓고 마음껏 술을 실컷 퍼마신 후에 남몰래 강물에 투신 자살해 버린다. 


서울 시험관은 이 이야기를 듣고 애석하게 여기고 남들도 모두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기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재능을 아까워했지만, 몇몇 선비들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억은 여러 번 과거 시험에서 부정을 저질렀으므로, 그의 죽음은 마땅한 일이다.” 


매화외사(梅花外史, 이옥의 별호)는 말한다. 


“세상에 팔지 못할 물건은 없다. 몸을 팔아 남의 종이 되기도 하고 지극히 가는 털과 형체가 없는 꿈까지도 모두 사고팔 수 있으나, 그 마음을 팔아먹은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모든 사물은 다 팔 수 있지만 마음은 팔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유광억은 마음까지도 팔아먹은 자가 아닌가? 


아아, 슬프도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천박한 매매를 글 읽은 사람이 한다고 했던가? 법전에는‘뇌물을 주는 것과 받는 것은 죄가 같다.’라고 되어 있다.”


-이옥(李𪸛, 1773~1820), '유광억전(柳光億傳)', 『담정유고(藫庭遺藁, 김려가 편찬한 문집)』권22 /「매화외사(梅花外史)」-


▲번역글 출처: 평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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