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진실된 것이라야

(상략)대저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은 사람을 관찰하는 것보다 더 큰 것이 없고, 사람에 대한 관찰은 정(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묘한 것이 없고, 정(情)에 대한 관찰은 남녀의 정(情)을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이 없다. 이 세상이 있으매 이 몸이 있고, 이 몸이 있으매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있으매 곧 이 정(情)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관찰하여 그 마음의 사정(邪正, 그릇됨과 올바름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부(賢否,어질고 사리에 밝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를 알 수 있고, 그 땅의 후박(厚薄, 인심과 정이두터운 것과 모멸차고 야박한 것)을 알 수 있고, 그 집안의 흥쇠(興衰, 흥망성쇠,흥하고 망함)를 알 수 있고, 그 나라의 치란(治亂, 잘 다스려지는 세상과 어지럽고 혼탁한 세상)을 알 수 있고, 그 시대의 오륭(汚隆, 쇠락함과 융성함)을 알 수 있다.


대개 사람의 정이란 혹 기뻐할 것이 아닌데도 거짓으로 기뻐하기도 하며, 혹 성낼 것이 아닌데도 거짓으로 성내기도 하며, 혹 슬퍼할 것이 아닌데도 거짓으로 슬퍼하기도 하며, 또 즐겁지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하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혹 거짓으로 즐거워하고 슬퍼하고 미워하기도 하고자 하는 것도 있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지, 모두 그 정(情)의 진실함을 살펴볼 수가 없다. 그런데 유독 남녀의 정(情)에서만은 곧 인생의 본연적 일이고, 또한 천도의 자연적 이치인 것이다.


그러므로 혼례를 올리고 화촉을 밝힘에 서로 문빙(問聘, 청혼)하고 교배(交拜, 서로 맞절함)하는 일도 진정(眞情)이며, 내실 경대 앞에서 사납게 다투고 성내어 꾸짖는 것도 진정(眞情)이며, 주렴 아래나 난간에서 눈물로 기다리고 꿈속에서 그리워함도 진정(眞情)이며, 청루(靑樓,창녀나 창기(娼妓)를 두고 손님을 맞아 영업하는 집, 즉 기생집) 거리에서 황금과 주옥으로 웃음과 노래를 파는 것도 진정(眞情)이며, 원앙침(鴛鴦枕,신혼의 젊은 부부가 함께베는 베개) 비취금(翡翠衾, 신혼부부가 함께 덮는 이불) 홍안(紅顔, 혈색이 좋은 젊은 얼굴) 취수(翠袖, 푸른 소매, 즉 미인을 뜻함)를 가까이 하는 것도 진정(眞情)이며, 서리 내리는 밤의 다듬이질이나 비오는 밤 등잔 아래서 한탄을 되씹고 원망을 삭이는 것도 진정(眞情)이며, 꽃 그늘 달빛 아래에서 옥패(玉佩)를 주고 투향(偸香, 향을 훔친다는 뜻, 즉 남녀간에 사사롭게 정을 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진정(眞情)이다.


오직 이러한 종류의 진정은 어느 경우에도 진실한 것이 아님이 없다. 가령 그것이 단정하고 정일(貞一)하여 다행히 그 정도(正道)를 얻었다고 하면 이 또한 ‘참[眞]’ 그대로의 정(情)이고, 그것이 방자 편벽되고 나태 오만하여 불행하게도 그 정도(正道)를 잃었다고 하더라도 이 또한 ‘참’ 그대로의 정이다. 


오직 그것이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를 얻었을 때는 족히 본받을 만하고, 오직 그것이 진실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도를 잃었을 때는 또한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것이 진실한 것이라 본받을 수 있고, 그것이 진실한 것이라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 그 사람, 그 일, 그 풍속, 그 땅, 그 집안, 그 나라, 그 시대의 정(情)을 또한 이로부터 살펴볼 수가 있다. 천지만물에 대한 관찰도 이 남녀의 정에서 살펴보는 것보다 더 진실한 것이 없다.


이것이 <주남> · <소남> 25편에 남녀의 일이 20편 있게 된 까닭이고, 또한 <위풍衛風> 39편에 남녀의 일이 37편 있게 된 까닭이며, <정풍鄭風> 21편에 남녀의 일이 16편이나 많이 있게 된 까닭이다. 또한 당시의 시인이 예(禮)가 아닌 것을 듣고 보고 말하는 것을 꺼리지 않은 까닭이며, 또한 우리 대성지성(大成至聖) 공부자(孔夫子, 공자)가 이것을 취하게 된 까닭이며, 모씨(毛氏) · 정현(鄭玄) · 자양(紫陽) 등 모든 순유(純儒, 순수한 유학자, 진짜 선비)가 전주(이야기에 해석을 다는 것)하고 집주(集注, 여러사람의 해석을 한데 모음)하게 된 까닭이며, 또한 그대가 이른바 ‘사무사思無邪, 즉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것이며, ‘백성을 교화하여 선(善)을 이루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대는 어찌 저 예(禮)가 아닌 것을 듣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듣지 않으려는 것임을 모르며, 예가 아닌 것을 보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보지 않으려는 것임을 모르며, 예가 아닌 것을 말하는 것이 장차 예가 아닌 것을 말하지 않으려는 것임을 모르는가? 하물며 보고 듣고 말하는 것이 반드시 모두 다 예가 아닌 것이 아님에랴!(이하 생략)


-이옥(李鈺 1760~1812), 이언(俚諺) '이난(二難)'중에서 부분,『완역 이옥전집 2 』(이옥 지음/실사학사 고전문학연구회 번역 / 휴머니스트,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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