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언(俚諺) : 천지만물이 나를 통해 표현된다
천지만물은 천지만물의 성(性, 본질, 특성)이 있고, 천지만물의 상(象, 모습 형태)이 있고, 천지만물의 색(色)이 있고, 천지만물의 성(聲, 소리)이 있다. 총괄하여 살펴보면 천지만물은 하나의 천지만물이고, 나누어 말하면 천지만물은 각각의 천지만물이다.
바람 부는 숲에 떨어진 꽃은 비오는 모양처럼 어지럽게 흐트러져 쌓여 있는데, 이를 변별하여 살펴보면 붉은 꽃은 붉고 흰 꽃은 희다. 그리고 균천광악(勻天廣樂)이 우레처럼 웅장하게 울리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현악(絃樂)은 현악이고 관악(管樂)은 관악이다. 각각 자기의 색을 그 색으로 하고, 각각 자기의 음을 그 음으로 한다.
한 부의 온전한 시(詩)가 자연 가운데에 원고로 나와 있는데, 이는 팔괘(八卦)를 그어 서계(書契)를 만들기 전에 이미 갖추어진 것이다. 이것이 국풍 · 악부 · 사곡을 지은 사람이 감히 스스로 한 일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또한 감히 서로 도습(蹈襲)하여 사용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곧 천지만물이 그것을 짓는 자의 꿈에 의탁하여 그 상(相)을 드러내고, 기(箕)에 나아가 정(情)을 통하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사람에 가탁하여 장차 시(詩)가 될 적에, 물 흐르듯이 귀와 눈을 따라 들어가 단전 위에서 머물다가 줄줄 잇달아 입과 손끝으로 따라 나오는 것으로, 그 사람의 주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석가모니가 우연히 공작(孔雀)의 입을 통해서 뱃속에 들어갔다가 잠시 뒤에 공작의 꽁무니로 다시 나온 것과 같다. 나는 모르겠거니와, 석가모니가 석가모니인가? 아니면 공작의 석가모니인가? 그러므로 작자(작가)라는 것은 천지만물의 한 상서(象胥, 역관 즉 통역하는 사람)이며, 또한 천지만물의 한 용안(龍眠, 용면)이라 할 수 있다*.
지금 역관이 사람의 말을 통역할 때, 나하추(納哈出,북원(北元)의 장군)의 말을 통역하면 북번의 말(몽고어)이 되고, 마테오 리치의 말을 통역하면 서양의 말이 된다. 그 소리가 익숙치 않다고 하여 감히 바꾸고 고치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화공(畵工)이 사람의 상(像)을 그릴 때, 맹상군(孟嘗君)을 그리면 작달만한 상이 되고, 거무패(巨無覇)를 그리면 장적(長狄)과 같은 상이 된다. 그 형상이 일반 사람과 다르다고 하여 감히 미루어 옮기는 바가 있어서는 안 된다. 어찌 이와 다르겠는가?
대체로 논하여 보건대, 만물이란 만 가지 물건이니 진실로 하나로 할 수 없거니와, 하나의 하늘이라 해도 하루도 서로 같은 하늘이 없고, 하나의 땅이라고 해도 한 곳도 서로 같은 땅이 없다. 마치 천만 사람이 각자 천만 가지의 성명을 가졌고, 삼백 일(日)에는 또한 스스로 삼백 가지의 하늘 일(事)이 있음과 같다. 오직 그와 같은 뿐이다.(중략)
내가 이미 눈으로 봄이 이와 같으니, 이러하다면 나는 진실로 인위적으로 짓는 바가 있을 수 없다. 오직 저 장수하는 천지만물은 건륭 연간이라 하여 혹 하루도 있지 않은 적이 없으며, 오직 저 다정한 천지만물은 한양성 아래라 하여 혹 한 곳이라도 따르지 않는 곳이 없다. 또한 나의 귀 · 눈 · 입 · 손도 내가 용렬하다 하여 혹 한 부분이라도 옛사람에 비해서 갖춰지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도다. 이것이 내가 또한 짓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중략)
나비가 날아서 학령(鶴翎, 국화의 일종)을 지나치다가 그 차갑고 야윈 것을 보고 묻기를, "너는 어째서 매화의 흰색, 모란의 붉은색, 도조桃李의 반홍반백색(半紅半白色)과 같은 빛깔을 띠지 않고 하필 노란색이 되었는가?’" 하니, 학령이 말하였다.
"어찌 내가 그렇게 했겠는가? 시(時, 시간, 때)가 곧 그렇게 만든 것이다. 내가 시(時)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 또한 어찌 나에게 나비와 같이 묻고 있는가?"
-이옥(李鈺 1760~1812), 이언(俚諺) '일난(一難)'중에서 부분,『완역 이옥전집 2 』(이옥 지음/실사학사 고전문학연구회 번역 / 휴머니스트, 2009년)-
*옮긴이 주(사족): 윗글의 밑줄친 문장에서 용안으로 번역된 용면(龍眠)은 문자그대로 '용이 잠자는 것'이다. 이는 단어도 그렇고 뜻 또한 번역자의 오역으로 추측된다. 사전을 뒤져 찾아보니 일반적으로 통용되지 않는 단어로 나온다. 옛기록들을 미루어 다시 찾아보니 龍眠(용면)은 북송의 문신이며 말그림으로 유명한 거장 화가인 이공린(李公麟, 龍眠居士 1049~1106)의 호로 찾아진다. 즉 문맥에 맞게 다시 의역하면, '그러므로 작가는 천지만물의 소리를 통역하는 사람이며 또한 천지만물의 형상을 그려내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가 되겠다.
매사(梅史, 이옥)선생은 앞서 이난(二難)에서 밝힌바 있듯이 글의 형식보다는 '본질 그대로의 진실된 것을 살피고 헤아리는 관찰을 통해서 그 뜻을 드러내는 것'을 글쓰는 이가 가져야할 자세로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는 작가가 가져야 할 기본소양으로써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강조한 릴케의 통찰, 그리고 '제대로 보는 것'을 중시한 샤르댕의 철학(인간현상), 혜강선생(최한기)의 철학(추측록)과도 일맥상통한다.
한갓 돌덩이에 불과한 보석원석은 세공사가 자세히 살펴 알아보고 깍아 다듬어 봐야 비로소 보석의 가치를 드러낸다. 공작의 깃털로 화려한 장식을 한 까마귀를 공작이라 인정할 수는 없다. 개가 혹은 원숭이가 사람의 복색을 갖추고 사람처럼 행세한다고해서 개도 원숭이도 사람이 될 수는 없다. 귀매최이(鬼魅最易)라는 고사성어가 있다. '그림중에서 귀신그리기가 가장 쉽다'는 말이다. 이는 한비자(韓非子)의 외저설좌상편(外儲說左上篇)에 나오는 일화가 그 출전이다. 그 의미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실체가 없는 것, 볼 수도 없고 확인할 수도 없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 가장 쉬운 것이라는 뜻이다. 심지어 그것을 표현하는 이 조차 그 정확한 실체를 모르는 것이니 이는 참 대단한 역설이라 하겠다. 곡학아세, 혹세무민은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이름을 훔치고 세상을 속이는 이단사설(異端邪說)과 곡학아세의 현학(衒學)이 난무하는 요즘 세태에 세상만물이 내는 진실된 소리를 통역하고, 그것을 세세히 관찰하여 글로 그려내는 작가, 선생이 참으로 귀한 세상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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