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취하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또 술을 즐긴다. 그렇지만 거처하는 곳이 벽지이고 올해는 흉년이 들어 돈을 빌려서 술을 살 수는 없다. 바야흐로 따듯한 봄기운이 사람을 취하게 만들므로 그저 아무도 없고 어떤 집기도 없는 방안에서 술도 없이 혼자 취할 따름이다. 


어떤 이가 내게 술단지속에 시여취(詩餘醉)란 책 한질을 넣어 선물 하였는데, 그 내용은 곧 화간집(花間集)과 초당시여(草堂詩餘)였고 편집한 사람은 명나라 인장(鱗長) 반수(潘叟, 반유룡 潘游龍)였다. 


기이 하여라! 먹을 누룩으로 하여 빚은 술이 결코 아니고, 서책은 술통과 단지가 결코 아니거늘, 이 책이 어찌 나를 취하게 할 수 있으랴? 그 종이로 장독이라도 덮을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렇게 읽기를 사흘이나 계속 하였더니 눈에서 꽃이 피어나고 입안에서 향기가 피어올랐다. 위장 안에 버린 피를 깨끗이 쓸어버리고 마음에 쌓인 먼지를 씻어주어 정신을 깨끗이 하고 온 몸을 안온하게 해주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무하유의 장소(無何有之鄕, 아무 것도 없는 곳, 즉 別天地, 이상향,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었다. 아아! 이것이 조구(糟邱,  술지게미의 언덕)위에 노니는 줄거움이니 제구(虀臼, 버무리거나 부수는 절구통 ,즉 절묘한 詩句)에 깃들어 살아감이 마땅하도다. 


무릇 사람의 취함이란 것은 어떻게 취하느냐에 달려 있지, 꼭 술을 마신 뒤에야 취할 필요가 없다. 붉은색과 초록빛이 현란하게 아롱져 있다면, 사람의 눈이 그 꽃이나 버드나무에 취하게 된다. 연지분과 눈썹먹으로 그린 눈썹이 화창하다면 사람의 마음은 혹 그 아리따운 여인에게 취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 책이 거나하게 취기가 돌게하여 사람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이 어찌 한섬의 술이나 다섯 말의 봉급만 못

하겠는가? 


시여(詩餘, 사(詞)의 다른 이름, 즉 시가 詩歌)의 長調(장조,긴노래)와 短闋(단결, 짧은 노래)은 즉 달 아래서 석 잔 술로 축수(祝壽, 오래살기를 빔)하는 것과 같다. 詩餘에 있는 자가 구양수(歐陽脩), 안수(晏殊), 신기질(辛棄疾), 유영(柳永)등이 바로 꽃나무 사이에 함께 노니는 여덟 신선의 벗이다. 이 책을 읽어서 묘처를 터득하는 것은 그 짙은 맛을 사랑하는 것이니, 읆조리고 낭송하면서 감탄을 마지 못하는 것은 취하여 머리까지 적시는 것이다.


때때로 운자(韻字)를 밟아서 곡조에 맞추어 글을 지어보는 것은 극도를 취하여 토해내는 것이다. 이 책을 베껴서 책상자에 보관하는 것은 장차 이것을 도연명(陶淵明)의 차조밭(도연명은 차조를 심어 술을 담가 즐겼음)으로 삼으려는 것이다. 


나는 모르겠다. 이것이 책인지 아니면 이것이 술인지? 오늘 날에 또한 누가 능히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옥(李𪸛, 1773~1820), '묵취향서(墨醉香序)', 『담정유고(藫庭遺藁)』/花石子文鈔-


▲번역글 출처: '선생, 세상의 그물을 조심하시오'(이옥 저/심경호 역/태학사2001)


 “글을 읽는다는 것은 취하는 것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토하는 것이다.” (이옥, 『墨吐香前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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