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쩔 수 없으니 쓴다

이 글을 어찌하여 백운(白雲筆)이라 이름하였는가? 백운사(白雲舍)에서 썻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백운사에서 썼는가? 어쩔 수 없어 쓴 것이다. 어찌하여 어쩔 수 없이 썼다고 하는가?

백운은 원래 궁벽한 곳인데다 여름 날은 지루하기만하다. 궁벽하므로 사람이 없고, 지루하니 할 일이 없다. 일도 없고 사람도 없으니, 어찌해야 이 궁벽한 곳에서 지루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는가?

나는 돌아다니고 싶지만 갈만한 곳도 없고 등에 내리쬐는 뜨거운 볕이 두려워 나갈 수가 없다. 나는 자고 싶지만, 멀리서는 발(簾, 주렴)을 흔드는 바람이 불어오고 지척에서는 풀냄새가 진동하니 크게는 입이 비뚤어지거나 작게는 학질에라도 걸릴까봐 두려워 누울 수가 없다. 나는 글을 읽고 싶지만, 몇줄만 읽어도 이내 혀가 마르고 목구멍이 아파 억지로 읽을 수가 없다. 

나는 서책이라도 뒤적이고 싶지만 몇 장을 채 넘기지도 않아 이내 책으로 얼굴을 덮고 잠이 들고 마니. 그것도 할 수 없다. 나는 바둑을 두거나 장기로 다투고, 쌍륙이나 골패도 하고 싶지만 집에 기구(도구)도 없는데다 그걸 즐기는 성격도 아닌지라 그것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이곳에서 무엇을 하며 이 날들을 즐길 것인가? 어쩔 수 없이 손으로 혀를 대신하여 묵경(墨卿), 모생(毛生)과 더불어 말을 잊은 경지에서 주고 받을 수밖에. 그러면 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나는 하늘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사람들이 분명 내가 천문(天文)을 공부한다고 생각할 것인데, 천문을 공부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있으니 이것은 안된다. 나는 땅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러면 사람들은 분명 내가 지리(地理)를 안다고 여길 것인데, 지리를 아는 자는 남에게부림을 당하므로 이것도 안된다. 

나는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남에 대해 이야기하는 자는 남들 역시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이니, 이 또한 안된다. 나는 본성과 이치(理治, 理性)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평생토록 들은 것이 없다. 나는 문장(文章)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문장은 우리가 추켜 올리거나 폄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석가, 노자 및 방술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이는 내가 배운 것이 아닐뿐더러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조정(朝廷)의 이해관계, 지방관의 잘잘못, 벼슬길, 재물과 이익, 여색, 주식(酒食) 등에 대해서는 범익겸의 칠불언이 있어 내 일찌기 이를 좌우명으로 삼았으니 이 또한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어떤 이야기를 하며 붓을 놀려야 하는가? 형세상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으니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그만이겠으나, 이야기를 한다면 새를 이야기하고, 물고기를 이야기하고, 짐승을 이야기하고, 벌레를 이야기하고, 꽃을 이야기하고, 곡식을 이야기하고, 과일을 이야기하고, 채소를 이야기하고, 나무를 이야기하고, 풀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이 백운필(白雲筆)이 어쩔 수 없이 쓴 것이라는 말이요. 어쩔 수 없으므로 이런 것들을 이야기 했다. 이와 같이 사람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고, 또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아, 마두건처럼 말을 삼갈지어다!

-이옥(李𪸛, 1773~1820), '<백운필 白雲筆>소서 小敍'-

▲번역글 출처 및 참조: '낭송, 이옥'(이옥 저/채운 역/북드라망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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