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
세상의 군자(君子)들을 보니 잘난 체하고 남을 업신여기며, 제멋대로 행동하고 큰소리 치는 사람이 많았다.
유독 권언후(權彦厚)군은 무언가 결여되어 부족한 듯하고, 뒤로 빼서 무능해 보여 그 낯빛에 부끄러움이 있는 것 같았다.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머뭇거리다가 한참 후에 말했다.
"저는 천지(天地, 하늘과 땅)를 대하기가 부끄럽습니다. 천지는 일찍이 수많은 성현(聖賢)들을 살게 해주었는데, 지금은 저를 살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해와 달을 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해와 달은 일찍이 수많은 성현들을 비추어 주었는데 지금 저를 비추어 주기 때문입니다. 또 저는 음식과 거처를 옛 사람과 같이 하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잡고 발로 가는 것을 옛 사람과 같이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 같지 않는 것이 있으니 재주와 재능에 있어서는 고인은 물론이고 지금 사람들만도 못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내가 이말을 듣고 얼굴빛을 고치며 말했다. "자네는 부끄러움을 아는 자이니 부끄러움을 멀리 할 수 있을 것이네. 자네가 일찍이 집의 편액을 구했는데 '부끄러움(恥)'으로 편액을 삼음이 좋을 것 같네."
기문을 청하니, "나 또한 자네의 부끄러움을 부끄러워 하는 사람이다. 그대를 위해 기문을 짓는 것이 곧 나 스스로를 말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용휴 (李用休 , 1708~1782), '치헌기(恥軒記)',『혜환잡저(惠寰雜著)』-
▲번역글 출처: 『나를 찾아가는 길 - 혜환 이용휴 산문선』(이용휴지음, 박동욱.송혁기 옮기고 씀, 돌베개 2014)
『중용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은 용기에 가깝다"(知恥, 近乎勇)고 했다. 그리고 "사람은 부끄러워 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게 될 것이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는 맹자의 말이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 잘못한 사람은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늘 부끄럽다고 말하는 사람은 부끄럽지 않은 사람들 뿐이다. 세상에서 정말 부끄러운 일은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이고,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무서운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사람들은 너무나도 후안무치, 파렴치 몰염치에 익숙하다. 결국 혜환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당대 지식인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한 셈이다. 정작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것은 그때만의 일이 아니다.』 (박동욱, 위의 책, 윗 글의 역자 해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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