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이가 가진 필력, 이 한 가지만 있으면 족하다
천하에는 크게 억울한 것이 있다. 하늘과 땅의 억울함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 억울함에는 재주가 있으면서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자와, 이미 이루었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자가 있을 뿐이다. 요절하여 이루지 못한 것은 하늘이요, 자취와 흔적이 모두 없어져 전하지 않은 것은 땅이다. 하늘이란 것은 운명이므로 말할 것이 없겠으나, 땅은 그 처하는 바에 따라서 추켜 세우기도 하고 억누르기도 한다.
부귀하고 지위가 높아 권세가 있는 사람은 겨우 시를 읊조리고 짓는 것을 흉내낼 정도만 되어도 작품을 내고 문집을 간행하기를 예사로 한다. 반면에 사는 형편도 변변치않고 신분지체마저 구차한 사람은 문명을 흠모하고 숭상하는 때를 만날지라도 그럴 수가 없다. 비록 재주가 시와 문장이 모두 뛰어나고 학식과 식견이 아무리 남다를지라도 세상 지위와 권세에 눈과 귀를 돌리는 세상에서는 홀로 굽어있어 스스로 펼 방도가 없기때문이다.
이렇듯 땅의 다스림, 즉 세상이 공평하지 않은 것은 그 정도가 심하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나 진실로 이를 펴고자 한다면 세력과 지위를 기다릴 것이 없다. 다만 글 쓰는 이가 가진 필력, 이 한 가지만 있으면 족하다.(중략)
이제 내가 사징(士澄, 평와 김소(金瀟)의 字)의 문집에 서문을 쓰는 것은 다만 사징 한 사람을 펴기 위함이 아니다. 이로써 장차 여러 사징과 같은 사람을 나란히 펴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사징의 뜻이기도 하다. (하략) (**번역글은 안대희, 나종면,이은봉 역을 각각 참조하여 개인적인 편의상 일부 풀어서 개역하였음)
-이용휴(李用休, 1708∼1782), '평와집서(萍窩集序)', 『혜환잡저』 권7-
☞원문은 한국고전번역원: 탄만집/序, '萍窩集序'
*옮긴이 주: 사징(士澄)은, 여항문인인 김소(金瀟)의 자이다. 여항문인이란, 사회적 신분 계급인 중인ㆍ서얼ㆍ서리ㆍ평민등 출신 문인들을 말한다. 여항인(閭巷人)은 바로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이 쓴 시나 글들을 위항문학 (委巷文學),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 한다. 혜환 이용휴는 대중에게 잘알려지지 않았지만, 연암 박지원과 함께 당대에 쌍벽을 이루었고 또한 18세기 전체를 대표하는 조선의 문장가이다. 이용휴는, 뛰어난 재능과 고결한 정신을 함께 지녔지만 권문세도, 신분계급등에 의해서 세상에서 백안시되고 천시되며 소외되었던 무명의 조선 문인, 문장가들을 신분고하, 처지와 형편에 관계없이 자신의 몸을 낮추어 그들을 위해 서문(序文)과 전(傳), 심지어 생지명(生誌銘)을 써주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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