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지키는 세가지 방법
함부로 생각하지 말고,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함부로 행동하지 말라. 이 세 가지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지키는 중요한 방법이 되기에 충분하다.
‘참을 인〔忍〕’ 한 글자는 온갖 오묘함이 나오는 문(門)이다. 그러나 백 번 참더라도 한 번 참지 못하면 참은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나를 비방하든 칭찬하든, 좋아하든 미워하든 저들 하는 대로 내버려 두고, 곤궁하든 영달(榮達)하든, 뜻대로 되든 되지 않든 처지에 순응한다면 누가 감히 나를 업신여기겠는가?
설령 내가 알더라도 사람들더러 모른다고 하면 사람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나더러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런 경우에 내가 아는 것을 가지고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싸워 그들이 나를 따르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무지한 짓이다. 그런데 더구나 내가 알지도 못하는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스스로는 보통 사람을 자처하지 말고 성현을 목표로 삼으며, 다른 사람은 성현으로 믿지 말고 보통 사람으로 너그러이 봐주라. 상대를 성현으로 믿는데 그 사람이 성현을 자처하지 않으면 어찌하겠는가? 스스로 보통 사람을 자처하는데 사람들이 나에게 보통 사람 이상의 것을 요구하면 어찌하겠는가?
졸렬할지언정 공교롭지 말고, 어눌할지언정 약삭빠르지 말고, 촌스러울지언정 번지르르하지 말고, 둔할지언정 재바르지 말아야 한다. 이 때문에 천하에 나보다 더 졸렬한 사람이 없건만 나는 늘 공교로워질까봐 근심하고, 천하에 나보다 더 어눌한 사람이 없건만 나는 늘 약삭빨라질까봐 근심하고, 천하에 나보다 더 촌스러운 사람이 없건만 나는 늘 번지르르해질까봐 근심하고, 천하에 나보다 더 둔한 사람이 없건만 나는 늘 재발라질까봐 걱정한다. 누가 나더러 말이 어눌하고 재주가 졸렬하고 행동이 둔하고 외모가 촌스럽다고 하면 마음이 이를 데 없이 기쁘다.
사람들이 나를 붙좇는 것은 나를 붙좇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얻으려는 것을 붙좇는 것이니, 나는 그것이 영광인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나를 업신여기는 것은 나를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천시하는 점을 업신여기는 것이니, 나는 그것이 치욕인지 모르겠다. 붙좇고 업신여기는 대상이 그들 내면에 있는데 나를 붙좇고 업신여긴다고 생각하여 기뻐하고 성낸다면, 이는 다른 사람이 사람들의 추종과 모욕을 받는 것을 보고서 나 자신을 높고 크다고 생각하거나 스스로에게 성내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식자(識者)가 본다면 아마도 점잖지 않은 사람이라고 여길 것이다.
경박한 태도, 교활한 풍조, 악착스러운 습성, 권세를 좇을 뿐 진정성이 없는 마음, 주색(酒色)과 재리(財利)의 탐닉, 바둑과 도박에 빠져 지내는 방탕한 생활, 남을 시기하여 위험에 빠뜨리기를 능력으로 여기는 습성, 자기 편한 대로 남의 것 빼앗기를 긴요한 일로 여기는 습성 등등 명리(名利)를 좇아 휩쓸리는 속인(俗人)들의 행위를 이루 다 손꼽기 어렵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더는 볼 만한 것이 없으니, 작게는 스스로 천하게 만들고 스스로 욕되게 하여 식자들로부터 비루하다는 평을 듣게 되고, 크게는 반드시 패가망신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세상에서 숭상한다 하여 이런 짓을 따라서야 되겠는가?
가까이서 보고 듣는 것에는 물들기 쉽고 글 속의 경계는 소홀히 넘기기 쉬우니, 마음을 단단히 붙잡아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이 두 가지를 면하기 어렵다. 두렵고 두려우니 돌아보고 돌아봐야 할 것이다.
모든 사물은 격동되면 안정을 유지하기 어려운 법이니, 예컨대 물결이 바위에 부딪히거나 화살이 장애물에 튕기면 모두 정도(正道)에 맞게 움직이지 못한다. 사람도 그러하니, 마음이 갑자기 격발되어 억제하기 어려운 것이 노여움이다. 그래서 선유(先儒 옛선비)가 칠정(七情) 중에 노여움이 가장 제어하기 어렵다고 한 것이다.
한창 성날 때는 생사를 분간 않고 달려들기도 하지만 조금만 지나면 어김없이 후회하고 후회해도 소용없게 되어 다시 마음이 격발되면 또 처음처럼 성을 낸다. 이것이 잘못된 일임을 스스로 모르지 않지만 기운이 격해지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이야말로 사람의 큰 병통이다.
나는 늘 자신을 반성해 볼 때 수백 수천 가지의 허물이 모두 다 이 때문에 생겨났다. 그런데도 끝끝내 같은 잘못을 계속 저지르고 있으니, 이는 기질이 치우친 데다 치우친 기질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학문이 높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늙어 버렸으니 어찌하겠는가?
사람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뜻밖의 책망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으니, 사실무근의 비방이다. 이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이 또 있으니, 그것은 겉으로는 비방하지 않으면서 마음속으로 지목하여 배척하고 은연중에 헐뜯는 것이다.
뜻밖의 책망은 해명하기가 쉽고, 사실무근의 비방은 사람들이 알기는 어려워도 변론할 수가 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헐뜯는 것은 비록 그 대상이 자신임을 분명히 알더라도 변론할 길이 없으니, 이것이 지극히 견디기 어려운 까닭이다.
그러나 자신을 돌아보아 부끄러운 점이 없으면 그만이니, 내가 저 사람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므로 꾸중과 비방과 마음속으로 헐뜯는 것을 막론하고 모두 변명하지 않는 편이 차라리 낫고, 또 모두 자신을 반성하는 편이 낫다.
《서경(書經)》에 이런 말이 있다. “높은 지위에 있으면 교만하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교만해진다.(位不期驕)” 사람 마음은 대체로 믿는 구석이 있으면 교만해진다. 사람들이 믿는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큰 것으로는 문벌ㆍ권세ㆍ문장과 학문을 들 수 있다.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있으면 누구나 교만해진다. 이는 본디 속 좁은 범인(凡人)들이 면치 못하는 잘못인데, 예로부터 지금까지 교만하고도 망하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부디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옛날 계문자(季文子)*는 세 번 생각한 뒤에 행동하였다. 나는 세 번 생각한 뒤에 말할 요량으로 입을 세 군데 봉한 사람 동상(銅像)*이나, 백규시(白圭詩)*를 날마다 세 번 왼 남용(南容)처럼 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끝내 실천하지 못하여 한마디 말이 나갈 때마다 후회가 따랐다. 아, 나는 끝내 후회를 줄이지 못할 것인가?
※[역자주]
1.계문자(季文子) : 《논어》 〈공야장(公冶長)〉에 보인다. 계문자(季文子)는 노(魯)나라 대부 계손행보(季孫行父, ?~기원전 568)로, 선공(宣公)ㆍ성공(成公)ㆍ양공(襄公) 등 세 임금을 섬기며 집정(執政)하고도 사사로이 축재(蓄財)하지 않아 절검(節儉)했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공자는 “두 번만 생각하는 것이 좋다.〔再 斯可矣〕”라고 하여 임금의 과오에 대한 그의 우유부단한 대처를 비판하였는데, 윤기(尹愭)가 여기에 인용한 것은 ‘신중함’이라는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것으로 보인다.
2. 입을 봉한 사람동상(銅像) : 《공자가어(孔子家語)》 〈관주(觀周)〉에 보인다. 공자가 주(周)나라를 구경하다가 후직(后稷)의 사당 섬돌 앞에 있는 사람 동상을 보니 입이 세 군데가 봉해지고 등에 “옛날에 말을 조심해서 한 사람이다……〔古之愼言人也……〕”라는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3 백규시(白圭詩) : 《논어》 〈선진(先進)〉에 보인다. 백규시는 《시경》 〈억(抑)〉의 “흰 옥의 티는 갈아낼 수 있지만 이 말의 잘못은 어찌할 수 없네.〔白圭之玷 尙可磨也 斯言之玷 不可爲也〕”라는 시를 이른다. 남용은 공자의 제자 남궁괄(南宮括 남궁괄(南宮适)이라고도 함)로, 공자는 언행을 조심하는 그의 성품을 높이 사서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
-윤기(尹愭 1741~1826),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 벽에 써 붙인 글(書壁自警)'중에서 부분 발췌 정리,『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3책』-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강민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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