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다
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다〔誓瘖〕
무명자(無名子)는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해 어두워 아는 지식이 없고 도모하는 일도 없으니, 천하에서 쓸모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말을 하면, 그 말을 반드시 실천할 수 없어 한갓 일에 방해가 되고 화합만 잃을 뿐이다. 그러므로 묻고 답하는 것과 나에게 절실하여 말을 하지 않아선 안 될 경우가 아니면 맹세코 다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아 치롱(癡聾, 어리석고 귀먹은 사람)의 본색을 잃지 않기를 바라노라.
또 혹 손님이 왔을 때, 인사를 주고받고는 곧 입을 닫고 가만히 있으면 내가 그를 무시한다고 여길 것이므로, 전혀 관계가 없는 쓸데없는 말을 뽑아서 주고받는 말을 대비하고, 그 밖에는 조용히 앉아 책을 보면서, 있으면 먹고 없으면 기한(飢寒, 배고픔과 추위)을 참을 뿐이다. 이렇게 하면 나의 수명을 마치기에 충분할 것이다.
옛 사람 중에 청맹(靑盲 청맹과니, 눈뜬 장님)을 핑계한 자가 있었는데, 계집종이 앞에서 음행을 하고 자식이 우물에 빠지는데도 끝내 말을 하지 않았다. 만일 마음을 한번 정했다면 어찌 이렇게 하지 못하랴. 옛날 거백옥[蘧伯玉, 춘추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 거원(蘧瑗)]이 나이 50세에 49세의 잘못을 알았는데, 지금 무명자는 나이 70에 69세의 잘못을 알았으니, 매우 부끄러운 일이긴 하나 이 또한 다행이다.
나중에 또 쓰다〔後又書〕
이미 벙어리가 되기로 맹세를 하였지만, 요사이 반성해보면 여전히 종전의 습관을 답습한 것이 있다. 간혹 말을 하자마자 입을 뗀 것을 후회하기도 하고, 간혹 낮에는 깨닫지 못하다가 밤에 생각이 나 정신이 오싹해지기도 한다. 이는 모두 심력(心力)이 지극하지 못해서 전처럼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에 심지(心地)가 굳지 못함을 더욱 한탄하였으니, 고인들은 참으로 따라갈 수 없다. 어느 때나 이런 공부를 쌓아서 이런 경계(境界)에 이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무명자집 제10책)
"입을 열면 후회가 생김을 네가 이미 알았다면 / 而旣知開口有悔
어찌 후회가 다시 이를 것을 염려하지 않는가 / 胡不念悔將復來...
네 마음이 혹 게으르게 되면 / 及而心之或怠
어찌 때를 닦고 먼지를 쓸지 않겠는가 / 胡不刮垢而拭埃...
만일 네 마음이 견고하기만 하다면 / 苟而心之能堅
누가 너를 몰아간들 네가 자주 조급해 할 것인가 / 孰驅而而頻催"
[무명자집 제11책/ 벙어리가 되기로 맹세하면서 앞의 이야기를 이어 더욱 채찍을 가한다(誓瘖 申前說 更加鞭辟)의 일부분]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김채식 (역)┃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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