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주설(觀舟說): 배는 물이 아니면 다닐 수 없고 훌륭한 사공은 세찬 풍랑에 주저하거나 포기함이 없다

나는 요즘 탁영정(濯纓亭)에 우거(寓​居)하고 있는데, 탁영정은 도성 서쪽에 위치하여 긴 강을 굽어보고 있다. 강을 오르내리는 돛단배들이 아스라이 처마를 스치며 지나가는데 크고 작고 높고 낮은 모습들이 헛것인 듯, 그림인 듯 은은하다. 날마다 난간에 기대어 이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왠지 모르게 마음에 맞아 기분이 좋아진다.


배는 일개 무정물(無情物)에 불과하건만 어쩌면 이리도 우리네 학문 수양과 닮았는지! 튼튼하고 질박한 모습은 인(仁)에 가깝고, 밀물과 썰물에 따라 오가는 것은 신(信)에 가깝다. 가운데를 비워 외물(外物)을 받아들이는 것은 군자의 넓은 도량이 아니겠는가? 무거운 것을 싣고 멀리 가는 것은 죽은 뒤에야 그만두는 군자의 공부가 아니겠는가?


가까이는 물가에서 움직이고 멀리는 수평선까지 가는 것은, 우리네 공부가 거시적으로는 천지 상하 사방의 모든 사물을 아우르고 미시적으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은미(隱微)한 부분에까지 미치는 것과 같다. 안으로 칸살의 깊이와 넓이가 반듯반듯하고 밖으로 노와 돛의 모습이 당당한 것은 우리네 공부가 밖으로는 규모가 지극히 크고 안으로는 절목(節目)이 지극히 상세한 것과 같다.


귀천을 가리지 않고 뭇사람을 건네주는 것은 백성을 사랑하는 지극한 뜻이 아니겠는가? 사람들보다 먼저 강기슭에 오르는 것은 도(道)에 대한 조예가 지극히 깊은 것이 아니겠는가? 작은 배는 작은 배의 쓰임이 있고 큰 배는 큰 배의 쓰임이 있는 것은 군자가 그릇에 맞게 사람을 쓰는 것과 닮았고, 물의 흐름을 따를 때에는 흐름을 따르는 도구를 쓰고 흐름을 거스를 때에는 거스르는 도구를 쓰는 것은 군자가 때에 맞추어 변통(變通)하는 것과 닮았다.


안개 낀 달밤 모래섬에서 작고 가벼운 배에 두세 사람이 알맞게 타고 천상(天上)에라도 앉은 듯 마냥 한가로이 노닐며 한적한 낚싯대의 흥취를 싣고 어부의 맑은 피리 소리를 전송하는 것은 세상사에 초연한 소부(巢父)ㆍ허유(許由)의 낭만적인 모습과 같다. 반대로 큰 바다에서 배가 뒤집힐 듯한 풍랑을 만나 사람들은 모두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고 오직 훌륭한 사공*만이 지혜와 힘을 짜내어 세찬 풍랑을 뚫고 강변에 정박하는 경우가 있는데,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이 성왕(成王)을 보필하여 주(周)나라를 안정시킨 일이 이에 해당한다.


물은 배가 아니면 띄울 것이 없다. 마찬가지로 백성은 임금이 아니면 누구를 떠받들겠는가? 배는 물이 아니면 다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임금은 백성이 아니면 함께 나라를 지킬 사람이 없다.


힘도 헤아리지 않고 배를 띄우고는 큰소리치면서 함부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물이 새어 점차 가라앉는 배로 파도치는 위험한 바다에 나갔다가 전복되는 화를 자초하고야 만다. 이는 재주와 덕이 없는 선비가 지위를 탐하고 녹봉을 동경하여 분에 차고 넘치는데도 그칠 줄 모르다가 마침내 패망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격이 아니겠는가?


반대로 항해 도구를 정비하고 정신을 집중하여 배를 모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만전지책(萬全之策)을 헤아려 힘을 쓰고 위험한 길은 피하고 따르지 않아서, 도중에 풍파의 우려가 있으면 돛과 노를 추스르고 과감히 물러나 기슭에 정박한다. 이는 선비가 덕업(德業)을 쌓고 도(道)에 맞게 나아가는 격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자신을 바르게 하여 남을 통솔하고자 힘쓸 뿐, 잘못된 학문으로 세상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세상을 떠날 만한 일이 있으면 기미를 보고 바로 일어나지 날이 저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또 배는 험한 파도 속을 안전히 건너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편안히 흐르는 물가에서 전복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른바 대비가 있으면 환란이 없고 소홀히 대처하면 환란이 생긴다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나쁜 소리가 나오고 빈 배에서는 편협한 마음이 사라지는데, 이른바 자취가 있으면 의심하기 쉽고 무심(無心 사심이 없는 마음의 상태)하면 저절로 공정해진다는 말이 이에 해당한다.


큰비로 물이 불어 물살이 급해지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배는 반드시 닻줄로 끌어당기는데, 사람 수가 적어도 온 마음과 온 힘을 다 쓰면 끌어올리기 쉽고, 사람 수가 많아도 해찰하며 여유를 부리면 끌어올리기 어렵다. 간혹 힘 들이지 않고 끌어올리는 경우도 있고 애쓴 뒤에야 끌어올려지는 경우도 있지만, 끌어올리고 나면 결과는 같다. 또 간혹 거의 다 끌어올렸다가 문득 해이해져 닻줄을 손에서 놓치는 바람에 단번에 십 리나 떠내려가는 경우도 있고, 사람들은 모두 끌어올리는데 홀로 힘쓰는 것을 꺼려 스스로 한계를 짓고 마는 경우도 있으며, 힘은 다 썼지만 끌어올리는 방법을 모르는 경우도 있고, 빨리 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우리네 학문 수양과 같지 않은가? 우리네 학문은 굳게 믿고 힘껏 실천하면 성인(聖人)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지만, 해이함이 전일(專一)함을 이기면 끝내 성인의 경지에 들어갈 수 없다. 또 나면서부터 이치를 아는 사람도 있고 어렵게 배운 뒤에 아는 사람도 있으며, 산을 만들다가 한 삼태기의 흙이 모자라 완성하지 못하듯이, 또 우물을 아무리 깊이 파더라도 물이 샘솟는 곳에 닿기 전에 그만두면 이미 판 우물을 버리는 결과가 되듯이, 마지막 노력이 모자라 성인의 경지에 들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중도에 그만두고 자포자기하는 경우도 있고, 마음속으로 동경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고 부지런히 실천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건만 학문의 가치를 참으로 알지 못하여 끝내 외물에 이끌려 뜻을 빼앗기는 경우도 있으며, 등급을 뛰어넘어 빨리 성취하겠다는 망녕된 생각 때문에 끝내 진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등 갖가지 경우가 다 있다. 그러나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더라도 학문을 성취하고 나면 결과는 똑같고, 지나치고 못 미친 차이가 있더라도 하류(下流)로 떨어지고 나면 결과는 똑같다. 아, 두렵다.


계속하여 비유해 보겠다. 물은 흘러온 거리가 몇만 리인지 알 수 없고, 고리처럼 돌고 띠처럼 굽이치는 등 구불거리고 꺾인 모양이 몇만 가지인지 알 수 없으며, 바위에 부딪혀 튀어오르고 기슭을 세차게 쳐서 성이 나면 우레가 되고 뿜어내면 물보라가 되는 등 그 상태가 몇만 번 변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물의 성질은 천하의 물이 매한가지이다.


배는 형태가 몇만 가지인지 알 수 없고, 흐름을 따르거나 거스를 때 순풍이 불면 돛을 달고 여울이 험하면 닻줄로 끄는 등 배를 모는 방법이 몇만 가지인지 알 수 없으며, 배의 무게에 따른 운행 속도의 빠르고 느림, 항해 도구의 편리하고 불편함, 사공의 기술이 좋고 나쁨 등의 차이가 또 몇만 가지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배의 성질은 천하의 배가 똑같다.


어찌 사람만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은 얼굴 모습이 제각기 다르고, 잘생기고 추함, 키가 크고 작음, 체력이 강하고 약함, 행동이 민첩하고 둔함, 수명이 길고 짧음, 부유하고 가난함, 신분이 귀하고 천함, 인생이 행복하고 불행함 등등이 또 만 가지로 다르며, 제일 윗 등급의 성인(聖人)으로부터 가장 어리석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타고난 기질의 청탁(淸濁)과 후천적 교육의 득실(得失)이 또 만 가지로 다르다. 그러나 사람의 본성은 천하의 사람이 똑같다.


같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의 이치이다. 물은 맑아서 아래로 흘러내릴 수 있는 점이 같고, 배는 물에 떠서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는 점이 같고, 사람은 착하여 성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점이 같다.


그러나 모두 다른 점이 있으니, 다른 점은 무엇인가? 각각의 개별성(個別性)이다. 물은 다른 물건에 의해 흐려지지 않고 맑은 것, 맑음을 지키지 못하고 흐려진 것, 고요하고 깊게 고여 있는 것, 물결이 일렁이는 것, 이마를 넘고 산 위에 있는 것, 거꾸로 달려 마구 부딪치는 것 등이 각기 다른 점이고, 배는 오리처럼 생긴 것, 고래처럼 생긴 것, 삐걱삐걱 가볍게 노를 젓는 것, 큰 파도 속에 출몰하는 것, 오(吳)나라 배다, 초(楚)나라 배다 하는 것 등이 다른 점이며, 사람은 천리(天理)를 순수히 부여받아 나면서부터 이치를 알고 노력하지 않아도 저절로 인륜을 행하는 사람, 인욕(人慾)에 빠져 아무것도 이룬 일이 없이 흐리멍덩하게 사는 사람, 본성을 회복한 사람, 배워서 터득한 사람, 이것저것 섞여 있어 순일하지 않은 사람, 본성을 잃어버리고 되찾지 않는 사람 등이 다른 점이다.


같은 점이 천리(天理)의 본체로 수많은 개별성의 근본임은 물론이지만, 다른 점 역시 천리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본성의 동일함에 조금도 위배되지 않는다.


그리고 강물은 밤낮없이 흘러 바다에 도달하며, 이미 지나간 것은 가고 앞으로 흘러올 것이 어어져 한순간도 흐름이 끊기지 않는다. 그런데도 바닷물의 양은 더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만드는 것인가?


아, 천명(天命)이 무궁하여 해가 지면 달이 뜨고 추위가 가면 더위가 오니, 한 번 가고 한 번 오는 가운데 형언할 수 없는 묘리(妙理)가 깃들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나와 배가 똑같이 이 안에 있는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니, 어찌 피차가 다르겠는가?


지금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가는 구멍(尾閭 미려)’이나 ‘바닷물이 흘러들어 즉시 말라 버리는 뜨거운 돌산(沃焦 옥초)’이 있기 때문에 바닷물이 넘치지 않는다는 설에 대해 끝까지 논하려 한다면 허황될 것이요, 우물 바닥에 앉아 하늘을 보는 개구리나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고 앉아 토끼를 기다리는 농부처럼 편협하고 융통성 없는 견해로 고집을 피우려 한다면 미혹될 것이다. 


아, 말하기가 쉽지 않다. 공자의 말씀을 되새길 뿐이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이를 본받아 게을리하지 않고 스스로 계속 노력한다.(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 논어 안연편)” 배를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쓴다.


※[역자 주]

1. 배를 보며 : 작자 나이 25세~27세 때의 작품으로, 탁영정(濯纓亭)에 우거하면서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을 보며 떠오른 단상을 기록한 글이다.(이하생략)

2. 훌륭한 사공 : 원문은 ‘副手之梢工’이다. 이는 주희(朱熹)가 〈여백공에게 답한 편지〔答呂伯恭〕〉에서 당시 송(宋)나라의 형편을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한 데서 따온 문구이다. “우리와 백성들의 목숨은 모두 이 물 새는 배 위에 있네. 만약 훌륭한 사공을 불러 그가 술에 빠져 있지 않다면, 급할 때 그래도 믿을 수 있을 것이네.〔吾輩與百萬生靈性命盡在此漏船上 若喚得副手稍工 不至沈醉 緩急猶可恃也〕” 《朱子大全 卷34》주자의 말 중 ‘副手’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논란이 있는데, 여기서는 전자의 설을 따라 번역하였다.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진책(辰冊)에는 ‘副手’를 ‘적합한 사람〔的當之手〕’이라고 풀이하였다. 그런데 김매순(金邁淳, 1776~1840)의 《주자대전차의문목표보(朱子大全箚疑問目標補)》 제4책에는 “‘副’는 ‘副貳’라는 뜻의 ‘副’인 듯하다. 물 새는 배가 매우 위태로워 사공에게 의지해야 하는데 상등의 사공은 얻을 수가 없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부(副) 사공이 술에 빠지지 않았으면 그래도 살아날 가망이 있다는 말이니, 간신히 괜찮다고 인정하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기를 바란 말이다.(副 似是副貳之副 言漏船危甚 須仗梢工 上等手段 縱不可得 但是副貳之手 苟不至沈醉 則尙可爲也 蓋僅可而冀幸之辭也)”라고 하면서, 이는 “선생이 신참(新參)을 그다지 만족스럽게 여기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남의 충고를 받아들여서 일을 그르치는 사태를 면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말씀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적합한 사람(的當之手)’으로 풀이하면 뜻이 맞지 않아서 깊은 의미가 없게 된다.(先生於新參 不甚滿意 而猶望其受人箴益 免致僨誤 故其言如此 若作的當之手 恐齟齬少意味)”라고 하였다. 위의 두 가지 설 중 전자를 따른 이유는, 작자가 주자의 이 비유를 본서 시고(詩稿) 제1책 〈하옹(霞翁)이 또 진퇴격(進退格)의 시를 부쳐 왔기에 '다시 차운하여 대충 지은 시(霞翁又寄以進退格 聊復次之)'의 여섯째 수에서도 다음과 같이 원용하였는데, 그 문맥에서는 전자의 의미로 쓴 것이 분명하니, “말세에는 좋은 사공 만나기 어려우니, 파도가 높은데 물 새는 배에 사공도 취해 있네.〔衰世難逢副手梢 漏船沈醉碧波迢〕”라고 한 데서 알 수 있다.

3.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 《논어》 〈계씨(季氏)〉의 “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은 상등(上等) 인물이고, 배워서 아는 사람은 그 다음이고, 곤란을 겪고 나서 배우는 사람은 또 그 다음이다. 곤란을 겪고도 배우지 않으면 하등(下等)의 백성이 된다.(生而知之者 上也 學而知之者 次也 困而學之 又其次也 困而不學 民斯爲下矣)”라는 공자(孔子)의 말을 원용한 표현이다.


-윤기(尹愭 1741~1826), '배를 보며(觀舟說)',『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1책』-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강민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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