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과 사심(私心)이 평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나의 벗 아무개(某)가 누명을 쓰고 고을 수령에게 미움을 사 감옥(獄)에 갇혔는데, 우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돌을 던지듯이 그 틈을 타 위해(危害)를 가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동아줄을 내려 주듯이 구원의 손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친척과 친구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혀를 찰 뿐이었다. 그런데 그의 지친(至親) 중 한 사람이 그가 억울하게 구속된 것을 불쌍히 여기고 구원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옥중의 아무는 평소 내가 믿고 존경하던 사람이라 문장을 짓고 윤색할 때면 심부름꾼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언을 구하곤 하였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말을 전해 왔다. “나는 지병(持病)이 있는 몸으로 횡액을 당하여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소. 이런 사정을 수령에게 알려 선처를 구하고 싶으니, 그대가 나를 위해 글을 지어 주소.”


나는 애처로운 마음에 곧 초안을 작성하여 그의 지친이라는 사람에게 보여 주었다. 그런데 지친이란 자가 다 읽고 나서 벌컥 화를 내며 말하였다. “이런 글을 올리면 틀림없이 노여움을 사게 될 것이외다. 그리고 문장이 영 좋지 않으니 못 쓰겠소이다. 갑(甲)에게 청해 보리다.”


갑은 그의 이웃인데 문명(文名)이 있는 사람이었다. 곁에 있던 사람이 이 말이 공정한 말이 아님을 알고는 즉시 거짓으로 둘러대었다. “이 글은 갑이 지은 것이오. 집사(執事)는 어찌 그리 안목이 없으시오?”


이 말을 듣고 그 지친이란 자가 한참 동안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말하였다. “그렇소이까? 다시 보니 이것도 어지간하군그래.” 또 한참 있다가, “이거 좋소이다. 정말로 갑의 솜씨구먼.” 하더니, 또 한참 있다가는 손으로 탁자를 치며 말하였다.


“내가 건성으로 보았다가 좋은 문장을 놓칠 뻔했소이다. 이 글이 올라갔다 하면 아무는 틀림없이 풀려날 것이외다. 아무 구(句)와 아무 자(字)는 기이하고 묘하오이다. 갑이 아니고서야 이런 글을 지을 수 없지요.” 그러고는 마침내 써 올리기를 허락하였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곁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사심(私心)은 참으로 털끝만큼도 마음속에 용납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심이 한번 끼어들고 나면 서시(西施) 같은 절세미인도 무염(無鹽) 같은 추녀로 보이고, 도척(盜跖) 같은 도적도 백이(伯夷) 같은 충신으로 보이게 됩니다. 눈이 남과 달라서도 아니고 마음이 사람들과 달라서도 아니라 오직 사심 때문에 이처럼 공정하지 않은 일이 무수히 벌어지는 것입니다. 심한 경우는 상하(上下)가 뒤바뀌고 건곤(乾坤)이 제자리를 잃어서 본모습대로 평가되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니,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글은 한 편의 문장일 뿐입니다. 그런데 제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좋지 않고 갑의 글이라 생각하고 보면 볼수록 좋아지니, 우눌(虞訥, ?~?)이 장솔(張率, 475~527)을 깎아내리고 심약(沈約, 441~513)에게 아첨한 방법이 바로 이러하였습니다. 글이 금세 탈바꿈해서도 아니고 눈이 잠깐 사이에 바뀌어서도 아니라 오직 보는 자세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글을 평가할 적에 글 자체의 좋고 나쁨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글쓴이의 명성이 있고 없음에 따를 뿐이니, 식자(識者)의 입장에서는 비웃음을 당한다고 수치스러울 것도 없고 칭찬을 받는다고 영광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글쓴이의 명성을 기준으로 글을 평가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갑은 일찌감치 과거에 급제하여 문단(文壇)에 이름을 드날렸으니, 명성이 이미 사람들의 심안(心眼)을 휘어잡기에 충분합니다. 반면에 저는 비록 어려서부터 글을 읽어 옛 성인의 도를 배우고 있지만 20세가 넘도록 이룬 것이 없어 보잘것없는 신세이니, 사람들이 칭찬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 때문에 평소 자신을 돌아보면 두려워서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리곤 합니다.


그런데 지금 이 일을 당하고 보니 더욱 자책(自責)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까 저 사람이 제 글을 한번 깎아내리고 치켜세우는 동안 저는 부끄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으니, 이번 경험이 스스로 분발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에게 유익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까 저 이가 사람이 나쁘다고 그 사람의 좋은 말까지 버리지는 않았던 옛 성인의 원칙을 팽개치고 따르지 않은 것은 슬프지만 그렇다고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


옛날 퇴계(退溪) 선생이 시골집에서 “이 서방!” 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를 부른다고 생각하여 찬찬히 살펴보니 촌부(村夫)를 부르는 소리였습니다. 퇴계 선생은 ‘나도 이 서방이고 저 사람도 이 서방이라 호칭이 같기 때문에 이런 수모를 당한 것이다.’ 생각하고는 더욱 노력하여 마침내 과거에 급제하고 결국 대현(大賢)이 되었습니다. 제가 자초한 것도 퇴계 선생의 경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곁에 있던 사람이 말하였다. “나는 아까 마음속으로 몹시 비웃기만 했소이다. 하지만 이제 그대의 말을 듣고 보니 그대에게 분발의 계기가 되었을 뿐 아니라 나도 심각하게 반성하게 되오이다. 종신토록 명심하겠소이다.” 집으로 돌아와서 이 일을 기록해 둔다. 수시로 읽어 보고 조심하기 위함이다.


※[역자주]

1. 명성에 대하여 (名解):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작자 나이 24세 때인 1764년의 작품이다.(중략) 작자의 문학 비평관, 곧 ‘문장의 평가는 문장 자체의 우열에 따라야 하지 글쓴이의 명성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라는 주장을 천명하였다. ..원제(原題) ‘名解’는 ‘명성에 대한 풀이’라는 뜻인데, ‘解’는 의혹을 분변하고 해석하여 논쟁의 대상에 대한 분석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논변류(論辯類)의 문체 이름이기도 하다.

2. 서시(西施)무염(無鹽)서시(西施)는 중국 춘추 시대 말기 월(越)나라의 미녀이다. 무염(無鹽)은 중국 전국 시대 제 선왕(齊宣王)의 후비 종리춘(鍾離春)으로, 무염(無鹽) 사람이기 때문에 무염, 또는 무염녀(無鹽女)라고 불렸다. 그는 덕이 있으나 못생겨서 후대에는 추녀를 대표하게 되었다.

3. 우눌(虞訥) 의 일: “옛날 양(梁)나라 사람 장솔이 시를 지어 우눌에게 보이자 우눌이 깎아내리더니, 장솔이 다시 시를 짓고 심약의 작품이라고 속이자 우눌이 구절마다 칭찬하였다.〔昔梁人張率爲詩 示虞訥 詆之 率更以所爲詩託云沈約作 訥乃句句稱嗟〕”라고 한데서 유래한다. 본서 문고(文稿) 제5책 〈문장을 논한 편지에 대한 답서〔答人論文書〕〉에도 보인다.


※옮긴이 주:우눌의 일화는 「南史 卷31 張裕列傳 張率편」이다. 원내용은 이렇다. "남조(南朝) 양(梁)의 장솔(張率)이 소년 시절부터 글을 잘하여 16세 때에는 그동안 지은 시가 무려 2천여 수나 되었는데, 우눌이라는 자가 그 시를 보고 혹평을 하자 하루아침에 모두 불살라 버렸다. 그러고는 다시 시를 지어 그에게 보이면서 심약(沈約)의 작품이라고 말하니 우눌이 극구 칭찬하였는데, 장솔이 자기가 지었다고 말하자 우눌이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한국고전번역원)"  한편 신라의 최치원 선생은 회남군 절도사(淮南軍節度使) 고병(高騈)에게 올린 글, '초투원태위계(初投獻太尉啓)'에서 세속의 평판이나 비웃음에 연연해 하지 않고 오히려 학문과 수양에 증진하는 절차탁마의 본보기로 이 일화를 들었다.


-윤기(尹愭 1741~1826), '명성에 대하여(名解)',『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1책』-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강민정 (역) ┃ 2013 

TAGS.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