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시설(觀市說): 남의 말이나 소문만 듣고도 맹종하는 어리석음
내가 일이 있어 광주(廣州)에 갈 적에 인천(仁川)을 지나다가 시장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그날 시장에 모여든 장사치가 아마 천 명은 되었는데, 저마다 싸게 떼어 온 물건을 팔며 조금이라도 이문을 남기고 손해 보지 않으려고 흥정하느라 떠들썩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자 시장 사람들이 모두 팔던 물건을 팽개치고 덩달아 도망가서 시장이 온통 아수라장이 되었다. 어떤 사람은 백 보, 어떤 사람은 오십 보쯤 도망가다 멈추고는 그제야 어리둥절한 모습으로 서로 까닭을 물어보았다. 그들은 애초에 자신이 무엇 때문에 놀라 도망가게 되었는지 몰랐던 것이다.
내가 괴이하게 여겨 물어보았으나 모두 영문을 몰랐는데, 나무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아까 노루 한 마리가 산에서 달려 내려왔는데, 낙엽을 밟아 파삭파삭 소리가 나더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노루 소리인 줄 모르고 놀라서 시장을 가로질러 도망갑디다. 그 모습에 시장 사람들까지 영문도 모른 채 덩달아 도망갑디다. 어찌나 우습던지! 다행히 내가 우스운 꼴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나무하다가 노루를 보았기 때문이라오. 시장통 안에 있었다면 나도 그 꼴을 면하기 어려웠을 게요. 그런데 당신은 어째서 노루를 보지도 못했으면서 도망가지 않고 까닭을 물으신 게요?” 내가 대답하였다.
“그대가 도망가지 않은 것은 노루를 보았기 때문이고, 내가 도망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대가 실제로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노루를 보지 못했다면 도망갔을 테니, 도망가지 않은 의의가 어디 있겠소? 나도 실제로 도망가지는 않았지만 도망갈 만한 일이 아님을 모르고 괴이하게 여겼으니, 도망가지 않은 의의가 어디 있겠소? 도망간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그대와 내가 도망가지 않은 것이 사실이긴 하오. 허나 확고하게 도망가지 않았을 경우에 비추어 말하면 나와 그대 모두 도망간 것과 다름없소. 그렇다면 백 보나 오십 보를 달려가지 않은 것일 뿐 우리도 도망간 것이니, 어찌 저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겠소.”
이때 시장 사람들이 서로 불러 모아 돌아와서는 나무하는 사람에게 어찌된 일인지 묻더니, 나무하는 사람이 자기가 본 것을 자세히 말해 주자 모두들 전처럼 앉아서 물건을 팔았다.
아, 어찌 시장에서만 이렇겠는가. 잘못된 말을 듣고서 놀라고 겉모습만 얼핏 보고서 동요한 나머지, 들은 말을 부풀리고 본 일을 확대하여 천하 사람들을 선동하여 도망치게 만드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
‘개 한 마리가 이상한 형체를 보고 짖으면 백 마리의 개가 그 소리를 듣고 덩달아 짖어댄다.'(一犬吠形 百犬吠聲, 일견폐형, 백견폐성: 일의 진상(眞相)을 살피지 않고 소문만 듣고 단지 느낌이나 분위기에 휩쓸려 맹종하는 사람이 많음을 비유한 말, 왕부의 '잠부론/현난편'이 출전)라는 옛말이 있다. 형체를 보고 도망가는 사람은 시장에서 노루 발자국 소리에 놀라 달아난 사람에 해당하고, 소리를 듣고 도망가는 사람은 시장에서 덩달아 달아난 사람들에 해당한다. 소리를 듣고 도망칠 뿐만이 아니다. 심한 경우 어떤 사람은 소리 없는 소리 때문에 달아나 다른 사람들을 달아나게 만들고, 달아나는 사람들은 또 자기가 달아나는 까닭을 모르기도 한다. 아, 너무도 미혹된 일이다.
시장을 확대하여 천하에 빗대고 노루 발자국 소리를 확대하여 소인배의 유언비어에 빗댄다면, 남의 잘못된 말을 부풀리는 사람은 백 보를 도망친 사람에 해당하고, 잘못 전해진 말에 아첨하며 추종하는 사람은 오십 보를 도망친 사람에 해당한다. 또 분위기에 휩쓸려 자신도 모르게 본연의 바른 마음을 잃는 사람은 시장에서 팔던 물건을 팽개치고 도망간 사람에 해당하고, 영문도 모르고 어지럽게 우왕좌왕하며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세상 사람은 시장에서 서로 까닭을 물은 사람에 해당한다.
대인(大人)이 본다면 나무하는 사람처럼 비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인인(仁人, 어진 사람)이 들으면 나무하는 사람이 비웃은 것을 민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감회가 있어 기록한다.
-윤기(尹愭 1741~1826), '觀市說(관시설)',『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1책/ 책(冊)』-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강민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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