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은 뜻이 통하기만 하면 된다

저는 재주가 노둔하고 성품이 게을러 학문과 문장에 뜻은 있으나 능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감히 잘하지 못하는 것을 억지로 하여 남에게 보이고 알아주기를 꾀하지 않는데, 사람들도 이런 저를 문장가로 대하지 않습니다.


전에 한번은 학문과 문장에 대해 논쟁하는 자들이 거리낌 없이 떠들어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만 있었으니, 학문과 문장에 대한 식견이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족하(足下)께서 주신 편지에 문장을 논하셨는데, 이 어찌 제가 본디 문장을 논하는 축에 끼지 못하는 사람임을 모르시어 고명한 견해를 지니고도 어리석은 사람의 천려일득(千慮一得, 사기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내용으로, '어리석은 사람일지라도 천번을 생각하다보면 한번은 얻을만한 깨달음이 있다'는 한자성어를 인용한 말이다. 원 문장은 '우자천려 필유일득'(愚者千慮, 必有一得)이다.)의 견해를 듣고자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면 저의 실상을 아시고도 짐짓 이렇게 물으시어 제게서 광망(狂妄)한 말을 끌어내어 한바탕 웃음거리로 삼으시려는 것입니까?


전자라면 저는 천 가지 생각 중에 한 가지도 쓸 만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후자라면 족하께서는 무엇 때문에 일부러 남의 못난 점을 들추어내어 조롱거리로 삼으려 하십니까?


비록 그렇기는 하나 족하께서 이미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답하지 않는다면 예가 아니니, 우선 제가 지금처럼 부끄러운 사람이 된 까닭을 말씀드리고 나서 족하께서 편지에서 하신 말씀에 대해 답변 드리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가정교육을 받아 내심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었습니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연로하여 생계가 막연한 데다 약한 체질로 병치레가 잦아 농사를 지어 먹고살 수도 없고 재간이 부족하여 장사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벼슬아치가 되어 녹봉으로 살아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과거 시험이 아니고는 이를 이룰 방법이 없었습니다.


결국 과거 공부에 전념하며 시험관의 평가에 성패를 맡겼으나,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며 노년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늘그막에 운 좋게 급제하긴 했으나 정력이 쇠하고 열의가 식어서, 쥐꼬리만 한 녹봉을 받기는 했으나 얼마 못 가 그마저 잃고 말았습니다.


결국 부모님 생전에 변변한 봉양 한 번 못해 드린 통한을 안게 되었고 이제는 저도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성인의 학문은 논할 것도 없고 문장 짓는 하찮은 재주를 익히려 해도 일모도원(日暮途遠 갈 길은 먼데 해가 저묾)의 탄식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를 생각하면 늘 한숨과 눈물만 나옵니다.


간혹 예전에 공부했던 것을 다시 음미해 보고 이따금 시문을 지어 스스로 마음을 달래 보기도 하지만, 모두 스스로 경계하고 자손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것에 불과한지라 선뜻 남에게 보여준 적이 없습니다. 이 때문에 저의 글을 본 사람이 거의 없는데, 어떤 호사가가 제 글에 대해 논평했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족하의 편지에 사람들이 제 문장에 대해 과문(科文)이지 고문(古文)의 작법(作法)이 아니라고 말한다고 하셨는데, 반평생을 과문에 종사해 온 제가 어떻게 과문을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과문을 고문의 기준으로 평가했으니, 이는 마치 난쟁이에게 몸집이 거인처럼 크지 못하다고 꾸짖는 것과 같습니다. 과문을 버리고 억지로 고문을 본받으라 한다면, 마치 수릉(壽陵)의 소년*이 한단(邯鄲)의 걸음걸이를 배우는 꼴이 될 것이니 어찌 잘못된 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문장은 한 가지이니, 어찌 과문과 고문이 다르겠습니까? 다만 과문은 다소 수식을 가하고 되도록이면 신기하고 교묘하게 지어서 사람들의 눈에 들게 하려다 보니, 다소 부끄러운 점이 없을 수 없습니다.


대조법(對照法)과 억양법(抑揚法) 및 감정을 격앙시키거나 기복(起伏)을 질탕하게 두는 변화로 말하면 작자의 솜씨에 달려 있으니, 이로 인해 문장의 작법이 판이하게 달라진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옛 작자(作者)들의 문장을 낱낱이 살펴보더라도 이를 벗어나서 이른바 ‘고문의 작법〔古文法〕’이라는 것이 따로 있었던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전에 보니 지금 세상에 고문을 짓는다는 이들은 대부분 세상에 보기 드문 자구를 이어놓고 실속 없이 허세 부리는 말을 늘어놓아, 한 구 안에서 의미가 통하지 않기도 하고 전편의 맥락이 통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고문의 작법이 겨우 이 같은 것일 뿐입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문장은 뜻이 통하기만 하면 된다.(辭達而已矣)” ‘……만 하면 된다(而已矣)’라는 말은 이것이 전부이고 다른 것은 없다는 뜻이니, 이 말씀을 가지고 보면 ‘뜻이 통한다(達)’라는 말에 문장 작법의 묘리가 모두 담겨 있습니다.(옮긴이 주: 인용된 글은 논어 위령공편 이 그 출전이다. "언사(말과 글)는  드러내고자 하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어 그것이 제대로 상대방에게 전달되면 그 뿐이다"는 의미로 헤아려진다. 이는 진실되고 정확하게 자신이 가진 뜻을 전달하되,  거짓된 교언영색이나 미사려구로 치장하여 본래 전하고자 하는 뜻을 의도적으로 가려서 상대방이  그 뜻을 왜곡하거나  착각해서 받아들이게끔 하지말라는 경계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봐도 무방하겠다. 이와 관련하여 논어의 ‘학이편’과 ‘양화편’에서  ‘교언영색선의인(巧言令色鮮矣仁)’이란 말이 거듭 강조되는 것을 본다. 직역하면, ‘말을 교묘하게 꾸며 말하고 얼굴빛을 좋게 하는 사람치고  인(仁)한 사람이 드물다’로 해석된다. 의역하면, ‘자기를 높이고 남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과 글을 번지르르하게 꾸며하고 얼굴빛을 꾸며가며 시류에 영합하는 사람치고 어질고 선한사람이 드물다’라는 뜻이 되겠다. )


그렇지 않다면 공자께서 문장에 대해 일러 주실 적에도 틀림없이 성인이 경례(經禮) 3백 가지와 곡례(曲禮) 3천 가지를 제정한 것처럼, 그리고 음악을 연주할 때 처음엔 ‘오음육률(五音六律)을 모두 갖추고〔翕如〕’ 그 뒤엔 ‘조화를 이루면서도〔純如〕 각 음률이 분명하게 드러나고〔皦如〕’ 또 ‘끊김이 없이 이어져〔繹如〕’ 한 악장을 마무리한다고 하신 말씀처럼 여러 방면을 모두 거론하여 자세히 일러 주었을 것이니, 어찌 이처럼 한 마디로 포괄하고 여지없이 단정하셨겠습니까?


이 때문에 공자의 문장은 모두 평이하고 명백하여 어렵고 모호한 뜻이 전혀 없고, 주자(朱子)의 문장도 그러하여 자연히 ‘조리가 분명하고 의미가 널리 통하는〔曲暢旁通〕’ 묘미가 있습니다. 저는 고문을 짓고자 한다면 공자와 주자의 문장을 배워야지 위에서 말한 것을 배워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문장을 평하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이것은 좌씨(左氏, )의 문체(춘추좌전(春秋左氏傳))이다.”라느니 “이것은 장주(莊周)의 문체(장자, 莊子)이다.”라느니 “이것은 반고(班固)의 문체(한서, 漢書)이다.”라느니 “이것은 사마천(司馬遷)의 문체(사기史記)이다.”라느니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뜻만 통하는 글은 문장이 아니다. 문장에는 본디 ‘문장가의 품격〔文章家體格〕’이 있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말을 서로 돌려가며 숭상하고 본받으면서 마치 특출한 식견과 남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높이 표방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장을 평할 때는 본디 글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없어서 오로지 작자의 명성이 높고 낮음에 따를 뿐이니, 자신이 경외하는 사람의 글에 대해서는 “이는 고문의 작법이다.”라고 하고, 얕잡아 보는 사람의 글에 대해서는 “이는 과문에 불과하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그들은 어떤 문장이 고문이고 어떤 문장이 과문인지 알지 못하니, 가탄스럽습니다.


옛날 양(梁)나라 때 장솔(張率)이 시를 지어 우눌(虞訥)에게 보이자 우눌이 형편없다고 평했습니다. 그런데 장솔이 다시 자기가 지은 시를 보여 주며 심약(沈約)의 작품이라고 속이자 우눌이 구절마다 찬탄하였습니다. 오늘날 문장을 볼 줄은 모르고 오로지 작자의 명성에만 귀 기울이는 자들은 모두 우눌과 같은 자들입니다.


지금 저의 문장을 과문이라고 평한 것은 저의 실상에 맞는 정확한 평가입니다만, 자구(字句)의 오류와 내용의 비천함을 분명히 지적하지 않고 범범하게 말하며 모호하게 지적한 것은 또 어째서입니까? 따질 가치도 없다고 치지도외(置之度外)하여 글의 결함을 논하거나 무지함을 깨우쳐줄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렇게 해서는 사람을 납득시킬 수 없습니다.


아, ‘문장의 격이 시대가 내려올수록 떨어지는〔文以世降〕’ 현상은 옛사람도 논한 바 있습니다만, 지금 《서경(書經)》을 읽어 보면 50편 중에 〈요전(堯典)〉ㆍ〈순전(舜典)〉ㆍ〈대우모(大禹謨)〉ㆍ〈고요모(皐陶謨)〉의 문장이 가장 좋고, 이 이하는 점차 이만 못하며, 말미의 여러 편들은 이보다 몇 단계나 떨어지는지 모릅니다. 이는 자연의 이치이고 필연의 형세입니다.


진대(秦代)ㆍ한대(漢代)의 문장은 그나마 옛 뜻이 남아 있었지만 당대(唐代)의 문장은 한대만 못하였고, 송대(宋代)의 문장은 당대만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송대에는 문장의 의미를 중시하여 조리가 분명하였으니, 고상하고 고풍스러운 품격은 이전 시기만 못하였으나 ‘뜻이 통한다〔達〕’는 면에서는 성인의 무리라고 하기에 아무 하자가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일컫지만 그 중에 구양수(歐陽脩)와 삼소(三蘇 소순(蘇洵)ㆍ소식(蘇軾)ㆍ소철(蘇轍))는 아무래도 한유(韓愈)와 유종원(柳宗元)보다 못합니다. 또 삼소 중에 대소(大蘇 소식)는 노소(老蘇 소순)만 못하고 소소(小蘇 소철)는 대소만 못하며, 증공(曾鞏)과 왕안석(王安石)은 또 소소만 못합니다. 문장은 이처럼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명대(明代)의 문장으로 말하면 본원(本源 문장에 담긴 사상과 주장)과 기력(氣力) 중에는 믿을 만한 것이 하나도 없으니, 한낱 참신하고 교묘하여 속태(俗態)에 물들지 않음만을 추구하여 노심초사 힘을 쏟았습니다. 그들은 되도록이면 사람들이 하지 않은 말을 하면서 스스로 이전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문체가 각박하고 자잘하며 음운이 급하고 가볍습니다. 언뜻 보면 아름다운 듯하나 실은 나약하고 언뜻 보면 노련한 듯하나 실은 공허하니, 명대의 문장을 고문과 비교하면 자주색이 붉기는 하나 선홍색과는 다르고 향원(鄕原)이 후덕한 듯하나 유덕자(有德者)와는 다른 것 이상으로, 언뜻 보면 비슷한 듯하나 실은 매우 다릅니다. 어찌 취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근세의 어떤 문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문장의 격은 시대가 내려올수록 높아졌으니〔文以世高〕’ 명대에 이르러 더없이 훌륭해졌다.” 그의 저술은 대부분 명나라 사람의 글귀를 주워 모은 것에 불과한데 겉으로 표방하기는 반드시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말을 하고 싶다고 하니, 매우 가소롭고 애처롭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리적으로 궁벽한 모퉁이에 있습니다만 일찌감치 기자(箕子)의 가르침을 받아 풍속은 예의를 숭상하고 문장은 이치가 통하고 의미가 진실하며 문맥이 잘 통하고 용어 사용이 적절하니, 《동문선(東文選)》을 보면 당(唐)ㆍ송(宋)의 문장가들 못지않습니다.


근대에 와서 비로소 난삽(難澁,말이나 글 따위가 이해하기 어렵고 까다로움)한 문체가 생겨나 독자로 하여금 눈이 휘둥그레지고 입이 딱 벌어지게 만들었는데, 이는 불행히도 한유(韓愈)가 서너 번을 읽어도 이해할 수 없었던 진상(陳商)의 편지와 유사합니다. 가슴속에 큰 물결이 없으면서 웅덩이의 빗물과 도랑물을 가지고 굽이치는 강물과 큰 폭포를 만들어 사람들을 놀래 주려고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장이란 것이 어찌 고작 이렇게 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저는 가난하여 책이 없는 관계로 평생 읽은 것이라고는 경서(經書)와 역사서 및 제자서(諸子書)들 중 구하기 쉬운 것들에 불과하였고, 기이한 문장과 희귀한 책을 두루 섭렵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저는 공부할 때 성현의 경전에 근본하고 역대의 사적(史蹟)과 대표적인 제자서로 지식을 넓히되 다시 경전으로 돌아와 정리하였습니다. 경전 중에 극히 중요한 것은 또 사서(四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만 한 것이 없기에 특히 사서에 힘을 쏟았는데, 사서 중에서도 제가 시종 도움을 받은 것은 또 《논어》 한 부(部)입니다.


저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습니다. ‘여러 경서가 다 성인의 말씀이지만 《논어》가 특히 더 중요하고, 여러 경서에 다 주자(朱子)가 주를 내셨지만 《논어집주(論語集註)》가 특히 더 뛰어나다. 문장이 간결하면서도 분명하고 의미가 절실하면서도 포괄적이니, 참으로 이른바 “한 글자도 더 보탤 수 없고 한 글자도 뺄 수 없고 한 글자도 바꿀 수 없는〔增一字不得 減一字不得 換一字不得〕” 것이다.’


아이 적부터 《논어》를 익혀 왔건만 노년이 되도록 또렷이 알지 못하여 끝내 터득한 것이 아무것도 없기는 하나, 지금까지 제가 언행의 지침으로 삼아온 것은 모두 이 책이고, 대ㆍ소과(大小科)에 응시하여 쓴 글도 모두 이 책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고문(古文)의 안목으로 보면 저의 글이 과문(科文)이라는 비판을 면하기가 참으로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차라리 과문을 지었으면 지었지 요즘 사람들이 짓는 고문을 짓지는 않겠습니다.


족하께서 주신 편지에 사람들이 저의 시에 대해, 묘사는 잘하지만 색향(色響, 이어지는 문맥으로 보아  사물에서 느끼는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서정성을 뜻하는 것으로 헤아려짐)*이 부족하다는 평을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색향은 매우 수준 높은 것이니, 저 같은 사람에게 적용하여 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묘사라도 그럴듯하게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시의 한 가지 영역인데 어떻게 시를 지을 줄 모르는 축에 넣어 말할 수 있단 말입니까?


아, 그 말을 한 사람은 과연 색향과 묘사가 무엇인지 참으로 알고 있을까요? 시는 《시경(詩經)》의 시가 가장 훌륭한데, 《시경》의 시들은 묘사가 실제에 가깝고 색향이 자연스러워 반복하여 읊조리다 보면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악한 마음을 징계할 수 있습니다.


《시경》의 시를 시의 정도(正道)요 종맥(宗脈)이라고 하는데, 요컨대 그 시들은 모두 인간의 성정(性情)에서 나오고 시대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정풍(正風)과 변풍(變風), 정아(正雅)와 변아(變雅)의 구분이 없을 수 없었으니, 공자께서 “시를 통해 정치의 득실과 풍속의 성쇠를 관찰할 수 있다.〔詩可以觀〕”라고 하신 말씀이 어찌 맞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한(漢)ㆍ위(魏) 대(代)로 내려와서는 비록 삼대(三代 하ㆍ은ㆍ주) 의 수준을 바랄 수는 없었지만 고아하고 예스러운 맛과 아름답고 아정(雅正)한 품격이 있었으며 왕왕 비유와 은유가 심오하여 바라보아도 볼 수 없고 귀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듯한 작품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시경》 이후에 다소나마 옛 작풍이 남아 있는 시들이었습니다.


당대(唐代)에 와서는 색향(色響)을 중시하는 풍조가 극히 성한 나머지 도리어 너무 노골적인 결함이 있었지만, 천추(千秋)에 뛰어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가 나왔습니다. 이백은 타고난 재주가 특출했고 두보는 기개가 드높았으니, 사람들이 시선(詩仙)과 시성(詩聖)으로 칭하는 것은 결코 과찬이 아닙니다.


중당(中唐)ㆍ만당(晩唐) 이후에는 더욱 묘사를 숭상하여 격조(格調)는 도리어 낮아졌고, 송대(宋代)에는 논리는 뛰어났으나 색향은 당대(唐代)에 비할 수 없었습니다. 명대(明代)에는 비록 부끄러운 줄 모르고 큰소리치면서 속마음을 꺼내어 노래하였으나, 끝내는 계집종을 아무리 잘 꾸며도 대갓집 부인과는 다른 것처럼 바탕을 숨길 수 없다는 탄식을 자아냈습니다. 이는 모두 시대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기력과 정신과 재주와 국량이 옛사람들보다 훨씬 못하니, 어찌 시문만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세상 사람들은 얄팍한 재주와 엉성한 학문으로 하루아침에 옛사람들을 뛰어넘으려 하니, 어리석은 것이 아니면 망녕된 것입니다.


요즘 시 짓는 사람들은 반드시 두보의 시집에서 문구를 따다가 꿰어 맞추어 짐짓 노련하고 힘 있고 예스럽고 질박한 태를 만들어서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고는 스스로 “내가 바로 두보다.”라고 합니다. 그를 추종하여 칭찬하는 자들도 “이 사람은 두보다.”라고 하여 돌려가며 서로 높이 숭상하면서 시평(詩評)을 써 주곤 하는데, 저는 오늘날 세상에 어쩌면 이리도 두보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전에 들으니, 문명(文名)이 있고 문임(文任)까지 지낸 어떤 이가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시문의 수준을 논하며 남을 전혀 의식 않고 거침없이 말하다가 병풍에 쓰인 두보의 율시(律詩)를 가리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도 시라고 할 수 있는가? 틀림없이 명나라 사람의 작품일 것이다.” 그것이 두보의 시임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이 말을 듣고 비웃었다고 하는데, 세상에서 시를 논하는 자들이 모두 이러합니다.


시는 온갖 글 중에서도 잘 짓기가 특히 더 어려우니, 타고난 재주와 착실한 공부가 없으면 일정 수준에 쉽게 오를 수 없습니다. 전에 우리나라 사람의 문집을 보니, 문(文)은 문리(文理, 글에서 논리적으로 이치(理致)에 맞고 체계(體系)가 있는 뜻과 내용)가 통하지 않는 것이 없으나 시(詩)는 대체로 다 마음에 차지 않았습니다. 시는 이처럼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자질이 우둔하고 성품도 엉성하여 과거(科擧)에 쓰이는 시도 잘 짓지 못하니, 운(韻)을 맞추어 짓는 시로 말하면 사람들을 놀랠 만한 작품을 지어 높은 명성을 얻으려고 한 적이 없습니다. 간혹 마음에 맞는 풍경을 만나거나 어떤 일로 생각이 촉발되어 우연히 시를 지은 경우는 있으나, 그것은 대부분 생각나는 대로 읊조리고 사실대로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마음을 달래려고 읊은 그 시들 속에는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한 의미가 조금은 담겨 있으므로 보는 이의 눈에 꼭 거슬리지는 않을 것이요, 논자들의 꾸지람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어찌 묘사를 잘했다고 자부하겠으며, 또 어찌 감히 이른바 색향을 잘했다는 평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저의 시에 대해 이 점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것은 나무꾼과 어부의 노래를 듣고 오음육률(五音六律)에 맞지 않다고 평하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본디 명성을 구한 적도 없고 시 짓는 벽(癖)도 있지 않습니다. 다만 서투른 몇몇 작품을 먼지 앉은 책 상자에 넣어 두었다가 자손들로 하여금 제가 문장을 업으로 삼았음을 알게 하려고 할 뿐입니다. 자손들이 혹여 자취로 인해 뜻을 알고 그림자를 보고 형상을 상상하듯 저의 작품을 통해 저의 뜻과 모습을 상상한다면 열에 일곱만 모사(模寫, 본을 뜨고 베껴서 실물 그대로 그려냄)할 수 있는 한 폭의 초상화보다 나을 것이요, 또 혹시라도 작품 속의 법식(法式)을 스스로 체인(體認, 마음속으로 깊이 인정함)해 보려 생각하고 작품 속의 경계의 말을 좋게 여겨 준수할 방도를 생각한다면 바구니에 가득 유산을 남겨 주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것입니다. 


그리된다면 설사 자손들이 저의 속도 모르고 저를 무식한 사람으로 치부해 버리는 한탄스러운 일이 있을지라도, 아주 패악하지만 않다면 저의 작품들을 태워 버리거나 내다 버리지 않고 가보(家寶)로 삼아 잘 보관해 둘 것입니다.


저의 바람은 이 같을 뿐이니, 어찌 다른 사람이 입에 올려 평할 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이 때문에 족하께서 지적하고 바로잡아 주신 점들에 대해 감히 알지도 못하면서 억지로 일일이 답변 드리지 못합니다. 다만 저를 비난하는 말에 대해 말씀드려 부끄러운 심정으로 사과의 뜻을 아뢰오니, 족하께서는 너그러이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시문(詩文)의 쇠망(衰亡, 세력이나 기세가 약해져 전보다 못한 상태이르러 망해 가는 것)이 요즘처럼 심한 적이 없었으니, 제아무리 뛰어난 사람이 출현하여 자신의 문장을 자부한다 하더라도 지체가 높고 당여(黨與, 같은 편에 속하는 사람들)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면 천하 후세에 그 누가 문단에서 그의 존재를 알겠습니까?


그러나 문장은 공적인 것이니, 다행히 누군가 뛰어난 재주와 착실한 공부로 한유(韓愈)가 위(魏)ㆍ진(晉) 이후 쇠퇴한 8대(代)의 문풍을 부흥시킨 것처럼 할 수만 있다면, 온 세상이 떠받들어도 더 높아지지 않고 온 세상이 비웃어도 더 낮아지지 않는 확고부동한 위상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리 스스로는 의기양양하더라도 곁에서 보는 이들이 비웃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문장에는 본디 정해진 값이 있다〔自有定價〕’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족하께서는 어째서 구태여 깊이 슬퍼하고 근심하시는지요? 족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족하는 문풍을 부흥시키는 데 뜻을 두신 것 같으니, 족하께서는 실력 연마에만 힘쓰시고 남의 평가에는 연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역자 주]

1. 문장을 논한 편지에 대한 답서(答人論文書): 본서의 편차 순서로 보아 이 글은 작자 나이 65세(1805)~66세(1806)의 작품으로 추정되는데, 총 2728자에 달하는 장편의 편지에 작자의 문론(文論)ㆍ시론(詩論)ㆍ문학 비평관이 집중적으로 담겨 있다. (이하 생략)

2. 수릉(壽陵)의 소년 : 본분을 잊고 함부로 남의 흉내를 내다가 본디 지니고 있던 장점까지 잃게 됨을 뜻한다. 수릉은 연(燕)나라의 고을이다. 한단(邯鄲)은 조(趙)나라의 도읍으로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좋았다. 수릉의 소년이 한단까지 가서 걸음걸이를 배우려 했으나, 본성에 어긋난 걸음법이라 배우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디 익숙하던 자신의 걸음법마저 잃어버렸다고 한다. 《莊子 秋水》

3. 사서((四書) 중에서도 제가 시종 도움을 받은 것: 작자는 20세 때인 1760년에 처음으로 스승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을 찾아가 만났는데, 그때 작자가 종신토록 마음에 새길 말 한 마디를 여쭈자 이익이 “우리 유가(儒家)의 도(道)는 오직 《논어》 한 부에 담겨 있네. 그대는 돌아가서 《논어》를 읽으시게.”라고 하였다. 작자는 이때부터 《논어》를 학문의 중심에 둔 것으로 보인다. 《無名子集 文稿 冊1 祭星湖先生文》

4. 색향(色響) : 시문에 표현된 의경(意境 문예 작품에 표현된 감정과 경계)과 격조(格調)를 이르는 ‘성색(聲色)’과 유사하되 의경에 무게가 실린 개념으로 파악된다. ‘색향(色響)’을 이러한 뜻으로 사용한 것은 작자의 독특한 용법으로, 다른 데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하 생략)

5. 문장에는정해진 값이 있다 : 송(宋)나라 소식(蘇軾, 1037~1101)이 〈사민사(謝民師)에게 답한 편지〔答謝民師書〕〉에서 인용한 구양수(歐陽脩, 1007~1072)의 말을 축약한 것으로, 원래 글은 다음과 같다.

“문장은 순수한 금이나 아름다운 옥이 시장에서 정해진 값이 있듯이 그 가치가 정해져 있으므로, 사람들이 구설(口舌)로 귀천(貴賤)을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文章如精金美玉 市有定價 非人所能以口舌定貴賤也〕” 《唐宋八大家 蘇軾 23》


-윤기(尹愭 1741~1826), '문장을 논한 편지에 대한 답서〔答人論文書〕',『무명자집(無名子集)/무명자집 문고 제 5책』-


▲원글출처: 한국고전번역원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강민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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