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된 도학자(道學者)는 되지 말아야
(상략)족하(안정복, 자는 백순, 순암)께서는 학문의 방향에 대해 필시 평소 명확한 주관이 있을 터인데, 무슨 까닭으로 귀머거리와 같은 저의 견해를 이토록 열심히 빌리고자 하십니까? 이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있으면서도 없는 듯이 하고 꽉 찼으면서도 텅 빈 듯이하여, 학식이 적고 유능하지 못한 자에게 더욱 힘써 묻는 것일 뿐입니다.
제가 듣건대, 만약 스스로 발전하고자 한다면 한마디의 가르침으로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머리를 곧게 세우는 것(頭容直)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不妄語)*은 어린아이들도 익히고 외는 말인데, 다른 사람을 통해 이 말을 듣고 깨달아 분발하여 평생 덕업(德業)의 문로(門路)로 삼았던 저분들이 애초에 이 구절을 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뜻이 지향하게 되자 기(氣)가 따르게 되고 기가 따르게 되자 일이 따르게 되어, 단지 이것을 행실의 관건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래로 학문의 차례와 체계가 낱낱이 분석되어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밝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족하께서 책을 펼쳐 읽어 보면 절로 아실 것이니, 제가 어찌 감히 공을 위해 도모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끝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족하께서는 아마도 숨기고서 말해 주지 않는다고 허물하실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논의를 그만두고자 하지 않으신다면, 한마디 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대개 우리 당의 일류(一流)라는 사람들은 기상(氣像)이 좋지 않고 검칙(檢飭, 자세히 검사하여 잘못을 바로잡음)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 끝내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피폐해지고 말았습니다.
소이천(邵二泉)의 “차라리 참된 사대부(士大夫, 학문(학벌)을 가진 관료, 즉 학자이면서 관직에 몸담고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계층, 또는 평민과 대비되는 양반, 지식인 엘리트)가 될지언정 거짓된 도학자(道學者)는 되지 말라.”라는 말을 통해 세속(世俗)을 구제하고자 하는 마음이 도리어 사람을 미혹(迷惑)하게 하는 해독(害毒)이 된다는 사실을 참으로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뜻을 가진 선비는 반드시 먼저 고요함을 주로 하여 공경함을 견지하는 공부에 힘을 쏟아야 비로소 행동을 수양하고 천명(天命)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족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말이 반드시 모든 것을 개괄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니고, 특별한 재능이 없는 검주(黔州)의 당나귀*를 본받고자 했을 뿐입니다. (이하생략)
※[역자 주]
1.머리를 곧게 세우는 것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 : ‘머리를 곧게 세우는 것과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은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실린 서적(徐積)과 유안세(劉安世)의 고사(故事)에 나오는 말이다. 서적이 스승인 호원(胡瑗)을 뵙고 나올 때에 머리의 모양이 조금 기울었는데, 호원이 갑자기 큰소리로 “머리를 곧게 세워라.(頭容直)”라고 하였다. 서적은 이 말을 듣고 머리를 곧게 세워야 할 뿐만이 아니라 마음도 곧아야 한다고 스스로 깨닫고, 이후로 부정한 마음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유안세가 사마광(司馬光)에게 처신(處身)의 요점으로 평생토록 행할 만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자 사마광이 ‘성(誠)’이라고 대답하였는데, 성을 행하려면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느냐고 또 물었다. 사마광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것(不妄語)부터 시작해야 한다.”라고 대답하자, 유안세가 이 말을 7년 동안 실천하여 언행일치(言行一致)를 이루었다고 한다. “머리를 곧게 세워라.”라는 말은 본래 《예기》 〈옥조(玉藻)〉에 나오는 말로, 군자(君子)가 수신(修身)하고 처세(處世)할 적에 견지해야 하는 아홉 가지 몸가짐〔九容〕 가운데 하나이다.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라는 말은 《논어》 〈안연(顔淵)〉에 나오는 말로 “어진 사람은 말을 참고 어렵게 한다.(仁者 其言也訒)”라는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것이다.
2. 검주(黔州)의 당나귀: 검주(黔州)의 당나귀는 유종원(柳宗元)의 〈삼계(三戒)〉에 나오는 고사이다. 검주에는 원래 당나귀가 없었는데, 어떤 호사가(好事家)가 당나귀를 배에 싣고 들여오니, 호랑이가 당나귀를 보고 처음에는 두려워하다가 자꾸 관찰해 보고는 그 기량이 발길질하는 것뿐임을 알고 드디어 당나귀를 잡아먹었다고 한다. 성호가 자신이 학식은 없지만 최선을 다해 조언을 해 주고자 하는 것임을 겸손하게 표현한 말이다.
-이익(李瀷, 1681~1763), '안백순(안정복)에게 답하는 편지 무진년(1748, 영조24)(答安百順 戊辰)' 중에서, 『성호전집 제24권 / 서(書)』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기정 (역)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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