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할 줄 안다는 것
옛날의 성현(聖賢)도 사람이다. 성현이 할 수 있었던 일 가운데 한 가지 일을 내가 만약 전심(專心)으로 흠모하여 본받는다면 서로 비슷하게 되지 않는 경우가 드물 것이니, 두 가지 세 가지 일에 이르더라도 어찌 대번에 전혀 미치지 못하겠는가.
일마다 성현과 비슷하기를 바라는 것을 가리켜 “뜻이 크다.”라고 하는데, 뜻이 크면 내가 성현과 비슷한 점이 많아지고 비슷하지 않은 점은 적어진다. 스스로 한계를 그은 사람치고 성현과 비슷해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므로 어릴 때부터 뜻이 작은 것을 사람들이 가장 꺼리는 것이다.
학문은 사유(思惟)를 근원으로 삼는다. 사유하지 않으면 터득하는 것이 없으니, 해야 할 일을 행할 수 없을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을 생각하고, 그 까닭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다. 자식이라면 효도해야 하는 것을 누군들 듣고서 알고 있지 않겠는가. 혹시라도 성현의 가르침이나 사우(師友)의 권면이나 사람들의 부러움 때문에 효도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반드시 스스로 생각해서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까닭을 터득해야 하는 것이니, 한 가지 일을 빠뜨리면 두려워할 줄 알고 한 가지 일을 실천하면 마음이 편안해야 비로소 자식의 도리를 제대로 하는 것이다.
사람의 법도는 정(靜)을 위주로 하여 세워지지만, 정만 있고 동(動)이 없으면 도(道)가 아니다. 공자가 말하기를 “중후하지 않으면 위엄이 없으니, 배워도 견고하지 못하다.〔不重則不威 學則不固〕” 하였는데, 중후함은 동과 정을 포괄하는 것이다. 군자(君子)가 정하려고 하면 먼저 몸가짐을 중후하게 해야 하니, 몸가짐이 중후하면 마음가짐이 중후하게 되어 행동거지가 어지럽지 않게 된다. 그릇이 움직이는데 담긴 물이 요동치지 않는 경우는 없으니, 이것이 바로 안과 밖이 서로 바르게 되도록 해야 하는 것의 증험이다.
말세(末世)의 풍속이 매우 각박해졌다.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이 중요한데, 종일토록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스스로 뉘우치지 않는 자도 있다. 한 가지라도 혹 뉘우쳐 깨달음이 있으면 수천수만 명의 사람이 있더라도 반드시 가서 대적할 수 있게 될 것이며, 또한 스스로 이전에 자신의 행동이 어떠하였는지 생각해 보아 참으로 흡족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용납될 곳이 없는 듯이 여기면서 스스로 다시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恥之於人 大矣〕”라고 하는 것이며,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하면 수치스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無恥之恥 無恥矣〕”라고 하는 것이다. 부끄러움이 없는 마음이 털끝만큼 싹트는 것은 무방하다는 생각은 곧 짐독(鴆毒, 집안에 액을 가져온다는 상징적인 새의 깃에 있는 맹독)과도 같다.
사우(師友, 스승과 친구)의 도가 무너진 뒤로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 몰라서 성인(聖人)의 말씀을 업신여기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성인이 계시다면 누가 감히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나는 항상 우리가 성인의 시대에 미처 태어나지 못하여 직접 가르침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원망스럽고 한탄스러운 심정이 마치 고아(孤兒)가 돌아가신 부모를 추모하는 마음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성인이 남긴 말씀에 대하여 반드시 벽옥(璧玉)을 받들 듯이 소중히 여기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니, 그렇게 하지 않는 자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속이고 유훈(遺訓)을 소홀히 여기는 자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므로 학문을 한 뒤에야 자신의 부족함을 알 수 있고 성인의 말씀이 두려워할 만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니, 그래야 비로소 도리에 가까울 것이다.
근면한 것은 안일(安逸,무엇을 너무 쉽고 편하게 생각하여 적당히 처리하려는 태도)한 것의 반대이다. 안일하다는 것은 꾀하여 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버지에게는 효자가 되고 임금에게는 충신이 되고 스승에게는 어진 제자가 되는 것이 어찌 안일하게 지내면서 가능한 일이겠는가. 경서(經書)에 말하기를 “부모의 가까이에 나아가 봉양하되 일정한 한도가 없으며, 죽을 지경에 이르도록 부지런히 종사한다.〔左右就養無方 服勤至死〕”라고 하였다. 만약 평소에 어렵고 힘든 일을 꺼리고 피하며 노력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생삼사일(生三事一)의 의리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자이다. 근면하게 하는 것도 할 수 없는데 목숨을 바치는 것을 어찌 논하겠는가.
겸손하면 보탬을 받는다는 것은 비단 사양하고 공손한 것만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무릇 사람의 입과 코는 각각 한 개씩이지만, 귀와 눈은 모두 두 개씩인 것은 청각(聽覺)과 시각(視覺)을 넓혀 주려는 것이다. 천지(天地)는 지극히 크고 만물은 지극히 많은데, 만약 한 사람의 귀와 눈이 이것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해괴한 말이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만족하게 여기는 영웅(英雄)은 없다고 하는 것이니, 영웅이 천하의 일에 장차 큰 역할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록 겸손하지 않으려 해도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에는 말은 겸손하게 하면서도 발전을 도모하지 않는 자가 있는데, 스스로를 비천하고 어리게 보는 잘못에 빠진 것이다.
결단하여 실행하는 것은 오히려 쉽고,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것이 가장 어렵다. 결단하여 실행하는 것은 한때의 용기와 관계된 일이고,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것은 평생의 용기이다. 혹시라도 위무(威武)로써 위협하고 재물(財物)로써 유혹하며 성색(聲色)으로써 현혹하고 비방(誹謗)으로써 격동시킨다면 뛰어난 인내심을 가진 강골(强骨)이 아니고서는 지조를 지킬 수 없는데, 이들은 스스로 귀중하게 여겨서 지키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스스로 보기에도 어설프다면 지키는 바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이익(李瀷, 1681~1763), '조카손자 가환이 훈계의 글을 써 달라고 하기에 써서 부치다〔姪孫家煥求訓誡書以寄之〕',『성호전집 제48권/ 잡저(雜著)』-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양기정 (역) ┃ 2011
*옮긴이 주: 조카손자 가환은 혜환 이용휴의 아들이다. 이용휴는 성호선생의 조카로, 성호선생의 넷째형인 이침(李沉)의 아들이다. 이익은 조카손자 가환의 뛰어난 자질과 인물됨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심경을 적은 편지(書寄姪孫家煥)를 부치기도 하였다. 이가환(李家煥, 1742∼1801)은 유학자로 시가와 문장뿐만 아니라 천문학과 수학에도 능통하였다. 숙부 이승훈은 조선 최초로 천주교 영세를 받은 인물로 중국으로부터 성서를 직접 들여왔다. 숙부의 영향으로 한때 학자로서 천주교 교리를 연구하기도 하였다. 이가환은 천주교탄압이 시작되자 정치적으로 천주교와는 분명한 선을 그었지만, 신유박해때 반대 정파에 의해 천주교인으로 내몰려 이승훈과 함께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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