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영전(毛穎傳)

모영(毛穎)은 중산 사람이었다. 그의 조상은 명시(明眎)라는 이름의 토끼였다. 명시는 우임금을 도아 동쪽 땅을 다스리고 만물을 양육하는데 공을 세워 동쪽 묘(卯)땅의 제후로 봉해졌다. 죽어서는 십이지신의 하나가 되었다.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내 자손들은 신명의 후예이어서 다른 동물과 같아서는 안 될 것이니, 마땅히 자식을 입으로 토하여 낳을 것이다.” 하였다. 그 뒤로 과연 그렇게 되었다.


명시의 팔대 손자가 누(㝹, 토끼새끼 누)이다. 누로 말하자면, 세상에 전해지는 말로는 은나라 때에 중산에 살았다. 일찌기 신선술을 터득하여 능히 빛을 가려 몸을 감출 줄 알고 사물을 부릴 줄 알았다. 누는 항아(중국신화에 달을 관장하는  여신, 달의 정령)를 훔쳐서 두꺼비를 타고 달로 들어가버렸다.  그래서 그의 후손들은 끝끝내 달에 숨어 살며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후손으로 동곽에 사는 준(㕙)이란 자가 있었다. 날래고 뜀박질을 따라 올 자가 없었다. 날래고 잘 달리기로 유명한 한로(韓盧)라는 개와 능력을 겨루었는데, 한로가 준을 이기지 못하였다. 한로는 화가 나서 송작(宋鵲)이란 개와 모의하여 준을 죽였다. 그 집안 사람까지도 모두 죽여 소금에 절였다 한다.


진시황 때에 몽념 장군이 남쪽 초나라를 정벌하다가 중산에 잠시 머물었다. 이때 대규모의 군사를 동원하여 대대적인사냥을 함으로써 초나라가 두려움에 떨도록 계책을 세웠다.  그래서 사냥을 시행하기 전에 좌우의 부대장들과 장교들을 불러놓고 연산(連山)의 역술(易)로 점을 쳤다. 이에 하늘과 인문을 뜻하는 점괘가 나왔다. 


점쟁이가 축하하기를, “오늘 잡으실 짐승은 뿔도 없고 이빨도 없는 털베옷을 입은 물건입니다. 입은 언챙이고 긴 수염이 났으며, 몸에는 여덟 구멍이 있고 도사리고 앉은게 보통입니다. 오직 그 놈 털을 취하여 그것을 종이와 함께 쓰면 천하의 글(문자)가 통일될 것이니, 이로써 진나라는 마침내 천하의 제후들을 합병시키게 될 것입니다.”하였다


그런 연후에 본격적인 사냥을 실시하였다. 털 짐승 무리들을 포위한 다음, 그 중의 긴 털을 가진 것들을 골라서 잡았다. 이때 모영(毛穎)도 함께 잡혀 수레에 싣고 돌아왔다. 장대궁(章臺宮)에서 황제에게 포로로 바쳐졌는데, 그의 족속들도 모두 모아서 그와 함께 묶었다. 


진나라 황제는 몽념으로 하여금 모영(毛穎)에게 목욕을 시키도록 한 다음 관성(管城)에 그를 봉하고는 관성자(管城子)라 부르게 하였다. 이후에 날로 황제의 총애가 두터워져 큰 일들을 맡아 처리하게 되었다.


모영의 사람됨은 기억력이 좋고 약삭 빨라서, 태고 시대로부터 진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일들을 모두 글로 적었다. 음양과 점술과 길흉화복의 점치고 관상보는 것과 의약과 씨족과 산림과 지리와 자서와 회화와 제자백가와 천인에 관한 글들로부터 부처와 노자와 외국의 학설 등도 모두 자세히 기록하였다. 


또 그 시대의 행정사무에도 통달하여 공문과 장부와 사회의 문서와 돈 거래 기록과 여러 가지 기록들을 오직 황제가 시키는대로 적으니, 진시황제와 태자인 부소와 호해와 승상 이사와 중거부령 조고로부터 아래로는 나라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그를 사랑하고 중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게 되었다. 


또 사람들의 뜻을 따라 잘 따라서, 올바르고 곧고 삐뚤어지고 굽고 교묘하고 졸렬한 것을 일심으로 모두 그를 부리는 사람대로 따랐다. 비록 버려진다 하더라도 끝내 입을 다물고 아는 일을 누설치 않았다. 오직 무인들은 좋아하지 않았으나 요청이 있으면 역시 마다치않고 곧장 달려갔다.


벼슬은 중서령에 올라 황제와 더욱 허물없이 지내게 되었고, 황제가 일찍이 그를 중서군(中書君)이라 불렀다. 황제가 친히 어떤 일을 결정할 때에는 무게와 양까지도 스스로 헤아려 결정했다. 그래서 비록 궁인이라하더라도 황제의 좌우에 서있을 수가 없었지만, 오직 모영만이 촛불을 든 사람과 함께 언제나 시종하였다. 황제가 쉴 때야만 비로소 그들도  쉴 수가 있었다.


모영은 강주 사람 진현(陳玄, 오래 묵은 먹)과 홍농 사람 도홍(陶泓, 벼루)과 회계 사람 저(楮, 종이)선생과 친하게 벗하였다. 서로 밀어주고 이끌어주고 하면서 외출할 적에는 그들이 반드시 함께 하였다. 황제가 모영을 부르면 이들 세 명은 황제가 따로 부리지 않아도 언제나 함께 갔다. 그럴지라도 황제도 한번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후일 그가 황제를 만낫을 때, 황제께서 그를 부릴 일이 있어서 그를 뽑아 쓰려하자, 모영은 관을 벗고 사양을 하였다. 황제가 보니 모영의 머리가 다 벗겨졌고 또 그가 그리는 것이 황제의 뜻에 들어맞지 않았었다. 이에 황제가 웃으면서 말했다.


“중서군中書君이 늙어서 머리가 벗겨지니 나의 쓰임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일찍이 군은 글쓰기에 합당하다 말했었는데, 군은 이제는 글쓰기에 합당치 아니한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저는 이른바 마음을 다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시는 불리워지지 않고 봉읍인 관성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자손이 매우 많아져 중국과 오랑캐 땅에 흩어져 살게 되었는데, 모두 관성 사람이라 내세웠다. 그러나 오직 중산에 사는 사람들 만이 조상들의 가업을 잘 계승하였다.


태사공이 말하기를, “모씨(毛氏)에는 두 족속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희(姬)姓)인데 문왕의 아들로서 모(毛) 땅에 봉해진 사람들이다. 이른바 노나라와 위나라의 모담의 후손들이다. 전국시대에는 모공과 모수가 있었다. 다만 중산에 사는 족속들은 그 근본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없으되 자손들이 가장 번창하여 지금에까지 이른다. 


『춘추』를 가록할 때 공자에 의하여 절필 당하기도 하였으나 그들의 죄는 아니었다. 몽념 장군이 중산 땅의 빼어난 자들을 뽑았고 진시황이 그들을 관성에 봉함으로써 세상에는 마침내 그 이름이 알려졌으나, 도리어 희(姬)씨 성을 가진 모씨는 보기 힘들게 되었다. 모영은 처음에 포로로 잡히어 황제를 뵈었지만 마침내는 벼슬에 임용되어, 진나라가 다른 제후들을 멸망시키는 데에 모영도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공로에 대한 상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고, 후에는 늙었다하여 버림받았다. 이처럼 진나라는 적은 은총을 베푸는데 그쳤음으로 이는 진정 은혜를 베푸는 것이 인색하였다 하겠다.


-한유(韓愈, 한퇴지韓退之 768~824), '모영전(毛穎傳)', 『당송팔대가문초(唐宋八大家文抄) 卷4 /書 11고문진보후집(古文眞寶後集) 卷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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