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사람이 아이 적에 책을 두세 번만 읽고도 곧바로 외우거나, 또 간혹 7, 8세에 능히 시문을 지어 입만 열면 그때마다 남들을 놀라게 하다가도 정작 나이가 들어서는 성취한 바가 남보다 특별히 나은 점이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똘똘한 재주가 쉬지 않는 부지런함만 못함을 알게 되었다. 또 불을 밝혀 새벽까지 쉬지 않고 애를 쓰다가 흰머리가 흩날릴 지경이 되었는데도 스스로 일가의 말을 이루지 못하는 자가 있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일까?
겨우 백여 권의 책을 읽고도 붓을 내려 종이에 폄에 쟁그랑 소리를 내며 환히 빛나, 만 권을 외운 자가 뒤에서 눈이 휘둥그레지기도 한다. 똑같이 한 권의 책을 읽고 한 사람은 한 글자도 남김없이 외웠는데도 식견은 늘지 않고 저작에 볼 만한 것이 없으며, 한 사람은 반 넘어 잊어버렸으나 그 핵심이 되는 알맹이를 모두 옮겨가 폐부를 적셔 펼쳐 글을 지으면 이따금씩 똑같이 되곤 하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재주는 부지런함만 못하고 부지런함은 깨달음만 못하다. 깨달음은 도덕의 으뜸가는 부적이다. 옛사람의 책 가운데 경전과 역사책 같은 것은 한 글자도 허투루 지나쳐서는 안 된다. 그 나머지 자질구레한 것들은 하나하나 정밀히 궁구하느라 심력을 나눌 필요가 없다. 가령 한 권의 책이 대략 7, 80면쯤 된다고 해도 그 정화를 추려내면 10여 면에 지나지 않는다.
속된 선비는 처음부터 다 읽지만 그 알맹이의 소재는 알지 못한다. 오직 깨달음이 있는 자는 손가는 대로 뒤적이며 지나쳐도 핵심이 되는 곳에 저절로 눈길이 가 닿는다. 그래서 한 권 안에서 단지 10여 면만 따져보고 멈추어도 전부 다 읽은 사람보다 보람이 두 배나 된다. 이런 까닭에 남들이 바야흐로 두세 권의 책을 읽을 적에 나는 이미 백 권을 읽어치울 수 있고, 보람을 얻는 것도 또한 남보다 배나 된다.
뜻에 맞는 일을 만나게 되더라도 절대로 기뻐해서는 안 되고, 내키지 않는 일이 닥쳐도 절대로 근심하거나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화(禍)와 복(福)이 서로 기대어 엎드리는 것은 사람이 이미 짐작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세상을 산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나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만 해도 이미 이루 다 기록할 수가 없다.
매번 사람들이 책을 읽는 것을 보면 겨우 한 구절을 읽고는 이미 의심을 일으켜 남에게 물어댄다.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아래 문장에 풀이하는 말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그만 머쓱해진다. (게다가 책을 읽다가 한 글자만 막히게 되면 끝내 다시는 그 아래 글을 읽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이 일을 처리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겨우 그 발단만 보고서 바로 시끌벅적하게 옳으니 그르니 의논을 하고, 혹 한 가지 일의 얻고 잃음에 대해서도 문득 걱정을 하니 모두 조급한 사람이다. 사람이 일을 꾀할 때 대부분 하루아침에 성대하게 생각한 대로 이루어지는 법이란 없다. 모름지기 바뀌는 장면을 마땅히 크게 두려워해야 한다.
- 홍길주(洪吉周, 1786∼1841), 『수여방필(睡餘放筆)』중에서-
▲번역글 출처: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생각창고』,홍길주지음/정민외 옮김/ 돌배게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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