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두 종류의 귀머거리

모태(母胎)에서 태어날 때부터의 천성적인 귀머거리는 사람의 말도 물체의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적막한 천지요 들리는 것 없는 세계이다. 다른 사람편에서 보면, 가엾게 여기는 마음이 없는 자는 불치의 병신이라 하여 푸대접하나, 사랑과 동정이 있는 이는 불쌍하게 여기고 그를 위해 답답해 하며 이르기를 ‘부모 형제의 말을 어떻게 들으며 물명(物名)이나 글자를 무엇으로써 배우느냐?’고 한다. 


사람의 모양을 하고서도 사람의 행동을 못하고, 모든 감각 기관을 갖고도 그 때문에 모두 쓰지 못하게 된다.


귀머거리 쪽에서 보면 ‘사람은 원래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으며, 입으로 먹고 마시며, 대소변을 배설하고, 손으로 잡으며, 발로 다니니, 여느 사람과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갖추고 있는 것이 나보다 많은 줄을, 내가 갖춘 것이 남보다 작은 줄을 알지 못한다.


한 동작 한 동작이 남의 손과 턱의 지시에 의지하며, 온갖 사물을 망매(罔昧, 그물에 갇힌 것처럼 옴짝달싹 못하고 어두움에 갇힌 상태)와 오유(烏有 사물이 아무것도 없이 됨)에 맡김으로써 평생을 지내고, 말을 듣고 소리를 듣는 것이 인생의 대용(大用, 크게 쓰임, 중요한  구실)이 된다는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 더욱이 말을 배우지 못하면 아무리 절박한 사정이 있다고 해도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으니, 이는 곧 두 구멍이 아직 혼돈(混沌)의 상태로 남아 있는 자의 답답함이다.


무릇 듣는 것이 있으면서도 알고 깨닫는 것이 없는 자가 바로 신기(神氣)*의 귀머거리이다. 이는 천생의 귀머거리에 비교하면, 비록 배를 찾고 대추를 찾는 말을 하고, 닭울음과 개짖음은 들을 수 있지만, 사람을 대(待)함에 즐거운 느낌인지 성난 느낌인지 생각지 않으며, 일을 처리함에 전도(顚倒, 순서가 뒤바뀜, 위 아래가 바뀌어 거꾸로 됨)된 행동이 허다하다. 


그리하여 누구 한 사람 불쌍히 여기는 자 없고 평생토록 헤매는 부끄러움만 있으니, 도리어 천생의 귀머거리가 되어 남이 시키는 대로 따르고 남에게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만도 못하다.


-최한기(崔漢綺1803-1879), '천성적인 귀머거리와 신기의 귀머거리(天聾神氣聾 천농신기농)', 기측체의(氣測體義)/ 신기통(神氣通) 제2권/ 이통(耳通)-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영대 (역) ┃ 1979


※[옮긴이 주] 신기(神氣): 혜강 최한기선생의 철학에서 말하는 신기(神氣)는 흔히 무속인들이 말하는 신령한 현상 혹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와 관련된 신령한 기운과는 다른 차원의 개념이다. 선생은 우주와 자연의 모든 존재와 현상을 ‘기(氣)’로써 설명하고, 모든 존재를 형성하는 근원을 ‘기(氣)’로 보기 때문이다. 선생이 말하는 신(神)이란 무형의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기(氣)의 내재적 속성, 우주를 구성하는 본질적 실체를 의미한다. 설명하기를, " 신(神)이란 기(氣)의 알맹이다. 기(氣)란 신(神)의 기본바탕으로 신기(神氣)는 지각의 뿌리, 지각은 신기의 경험이다. 경험이 있어야 신기(神氣)가 스스로 지각을 가진다.", 또 "(氣)는 한 덩어리의 살아있는 활물이므로 본래부터 순수하고 담박하고 맑은 바탕을 가지고 있다. 비록 소리와 빛과 냄새와 맛에 따라 변하더라도 그 본성만은 변하지 않는다. 그 전체의 무한한 공용(共用)의 덕(德)을 총괄하여 신(神)이라 한다(기측체의)."라고 설명한다이는 형이상학을 설명하는 어렵고 난해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유기체철학)과 일맥상통한다. 즉 '신기(神氣)'는 신비로운 어떤 기운이나 특별한 능력이 아니다. 쉽게 말하자면, 기(氣)는 일상에서 실감되는 것이다.  평소의 태도에서 지니고 있는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능력으로 자연스레 바깥으로 우러나오는 어떤 기운이라고 볼 수 있다. 


정리하면 신기(神氣)란, '모든 존재하는 형질의 근원을 이루는 기(氣)가 활동하여 유형무형의 상태로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해도 되겠다. 이에 따르자면, 신기가 가로 막혀 있는 상태는 곧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누구나 알수 있는 것마저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하는 상태'라고 확대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겠다.


사람이 이러한 상태에 처하는 까닭은 굳이 여러 심리학 이론들이나 사회철학을 논거로 들어 논하지 않아도 옛 성현들의 말씀이나 옛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 까닭은 "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됨이라(야고보 1:14)"라 는 말씀으로 대표된다. 미혹 (迷惑)의 문자적 의미는,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 등을 뜻한다고 사전에 나와 있다. 공자는 '지혜로운 사람은 미혹되지 않는다'(논어, 헌문 30)고 하였다. 불혹의 의미가 이에 있다. 공자의 제자인 자장(子張)이 공자에게 내면의 德을 높이고 미혹을 분별하는 방도에 대해 물었다. 이에, “충신(忠信)을 위주로 하고 불의(不義)에서 정의(正義)로 옮겨 가는 것이 덕이 높아지는 길이다. 사랑하면 그가 살기를 바라고 미워하면 그가 죽기를 바라는데, 그가 살기를 바랐다가 다시 죽기를 바라는 것이 미혹(迷惑)이다."(논어, 안연 10)라고 공자는 가르친다. (20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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