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희로애락이 바른 사람은 그 성품(性)도 바르다

이른바 본연의 성(性)이라는 것은 그 형질(形質)이 이루어지기 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형질이 갖춰진 뒤에도 항상 그 본연의 성(性)이 있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천지 인물(天地人物)이 다같이 얻는 것으로 기(氣)에 의지하여 존재하게 된 것이다.


사람과 만물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곧 천지의 이기(理氣)였다가, 그 형질이 이루어진 뒤에야 기(氣)는 질(質)이 되고 이(理)는 성(性)이 되며, 또 그 형질이 없어지게 되면 질은 기(氣)로 돌아가고 성(性)은 이(理)로 돌아가는 것이다. 천지에 있어서는 기(氣)와 이(理)라 하고, 사람과 만물에 있어서는 형(形)과 성(性)이라 한다. 그러니 만일 사람과 만물의 형(形)이 없다면, 무엇으로 그 성(性)을 논할 수 있겠는가.


인(仁)ㆍ의(義)ㆍ예(禮)ㆍ지(知)의 이름은 성(性)을 미룸(推 이미 알려진 것으로써 다른 것을 비추어 헤아림)에서 나오고, 측은(惻隱)ㆍ수오(羞惡)ㆍ사양(辭讓)ㆍ시비(是非)의 사단은 정(情)을 헤아림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性)은 다른 곳으로부터 알기를 구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나타나는 바의 실마리를 따라 그 근원을 헤아려야 한다.


《맹자(孟子)》에 ‘측은히 여기는 것은 인의 실마리요, 부끄러이 여기고 미워하는 것은 의의 실마리이며, 사양하는 것은 예의 실마리요, 옳게 여기고 그르게 여기는 것은 지의 실마리다.’ 한 것은 대개 후학(後學)들로 하여금 측은으로부터 미루어 가서 그 인을 확충하고, 수오로부터 미루어 가서 그 의를 확충하며, 사양으로부터 그 예로 나아가고, 시비로부터 그 지혜를 이루게 하고자 함이니, 진실로 이것이 정(性)을 미루어 성(性)을 헤아리는 것이다.


희로애락이 바른 사람은 그 성(性)도 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희로애락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그 성(性)도 바르지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에 쌓여 있는 것은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므로, 밖에 나타난 것을 따라 그 속에 쌓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물결이 흐리면 그 근원이 반드시 맑지 못한 것이므로, 물결의 흐름을 보고 그 근원의 맑고 흐림을 알 수 있다.


생(生)에 알맞은 것은 좋아하고 생에 알맞지 않은 것은 미워하니, 정으로 나타난 것을 이름지은 것이 비록 일곱 가지가 있으나, 기실은 호오(好惡 좋음과 싫음)뿐이다.


칠정이란 희(喜)ㆍ노(怒)ㆍ애(哀)ㆍ락(樂)ㆍ애(愛)ㆍ오(惡)ㆍ욕(欲)이다. 정의 발현에 어찌 이같이 실마리가 많겠는가. 진실로 그 실(實)을 추구해 보면 대개 호오가 있을 뿐이지만, 그 호오(好惡)에 각각 천심(淺深 얕고 깊음)이 같지 않으므로 여러 가지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싫어함의 절실한 것이 슬픔이 되고 미움의 격렬한 것이 노여움이 되며, 좋아함의 나타난 것이 기쁨이 되고 좋아함의 드러난 것이 즐거움이 되며, 좋아함이 대상에 미친 것이 사랑이 되고, 싫은 것을 피하여 좋은 것으로 옮아가는 것이 욕(欲)이 되는 것이다. 


다만 추측(推測 깊이 살피고 이를 비추고 미루어 헤아림)을 아는 이는 그 좋아할 바를 좋아하고 미워할 바를 미워하나, 추측을 모르는 이는 혹 미워할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좋아할 것을 미워하기도 하여,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싫어하고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좋아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마땅히 기뻐할 것에 도리어 노여워하는 이는, 다만 면전(面前)의 거스르는 정(情)만을 헤아리고 본래의 이루어진 성(性)을 미룰 줄(推)은 모르기 때문이다.


칠정(七情) 중에 이미 희로가 있으니, 노여운 일을 당하면 노하고 기쁜 일을 당하면 기뻐하는 것이 진정한 희로이다. 만일 기쁜 일을 당하여 노하고 노여운 일을 당하여 기뻐한다면 이것은 망령된 희로인 것이다. 희로의 참되고 망령됨은 성정(性情)의 쓰임이 다른 데서 연유된 것이다. 


대개 성에는 순역(順逆)이 있고 정에는 선악(善惡)이 있는데, 정이 선으로 흐른 사람은 성도 그 이(理)를 따르고, 정이 악으로 흐른 사람은 성(性) 또한 그 이를 거스르는 것이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을 유인하여 악한 일을 하라고 하더라도 당연히 노여워하지 않는 것은 그 성이 이미 순하기 때문이며,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을 돌이켜 선한 일을 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인데 도리어 노여워하는 것은, 그 성(性)이 이미 역(逆 도리와 이치에 어긋남)하여 도리어 역(逆)을 순(順 도리와 이치에 맞음)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情)의 선(善)하고 악한 기미로부터 시작하여 마침내 성(性)의 순역(順逆)이 전도(顚倒 뒤바뀜, 거꾸로됨)되는 데까지 이르는 것이, 마치 밖에서 감염된 병이 점점 깊어져 마침내 목숨을 해치기에 이르는 것과 같다.


조존(操存, 마음을 흩트리지 않고 본성을 지킴)의 공부는 발용(發用, 일어나는 것을 부림)에 있으며 함양(涵養 능력이나 품성 따위를 길러 쌓거나 갖춤)의 공부는 본원(本源, 근원, 즉 태생적으로 타고나는 본성本性)에 있으니,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이다. 성(性)이 순할 때는 기가 평화롭고 고요하고, 성(性)이 거스를 때는 기가 격하고 움직이며, 정(情)이 선할 때는 기쁨과 노여움이 대상에 따라 마땅하게 되어 나의 성(性)도 순하고, 정(情)이 악할 때는 기쁨과 노여움이 뒤바뀌어 기를 부리고 심(心)을 부려 해로움이 성(性)에까지 미친다.


-최한기(崔漢綺1803-1879), '우러나오는 정을 미루어 성을 헤아린다. (推情測性 추정측성)'『기측체의(氣測體義)/ 추측록(推測錄)/제3권』, 중에서 발췌정리-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정소문 (역) ┃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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