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산문] 속임을 당하고도 속은 줄 모르고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
기만하는 말은 또한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잠시 실적(實蹟)을 빌려 속에 있는 재화를 유인하거나 귀와 눈을 현혹하여 그릇된 길로 끌어들이는 일은, 진실로 창졸간에 나온 속임수이니, 보통 사람이 범하기 쉬운 것인 동시에 또한 쉽게 깨달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속임을 당한 것을 깨달으면 돌이키는 길이 어렵지 않고 또한 복철지계(覆轍之戒 앞 수레가 넘어지면 뒷 수레는 이것을 보고 경계하는 것이니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음을 말한다)로 삼기에 족하다. 그러나 잘못된 문학(差誤之文學)을 널리 말함으로써 남의 자제를 해롭게 하거나, 백성을 괴롭히는 정령(政令)을 가지고 임금의 도타운 부탁을 저버리는 것은 크나큰 기만이다.(옮긴이 주:맥락상 여기서 '문학 ' 이란, 문(文)과 학(學) 각각의 의미 즉 언어로 표현된 글과 문장 그리고 배움 또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그런데 몸소 행하고 있는 자는 스스로 크게 기만당하고 있는 줄 알지 못하고, 곁에서 듣는 자는 혹 끝난 뒤에 짐작하며, 처음 발언할 적에 알아차리는 이는 별로 없다. 기만이 커지는 것이 실로 이에 기인한다.
무릇 기만하는 방법은 예(과거)와 이제(현재)가 판이하며, 어리석은 자와 똑똑한 자에 따라 다르다. 옛적에 속은 일을 가지고 후세 사람에게 그대로 실행할 수 없고, 어두운 자가 속은 일을 가지고 밝은 자 앞에서 꾸며 베풀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을 속이는 자는 모름지기 속을 만한 사람이 하고 싶어하는 것을 끌어서 그 틈을 엿보고 기회를 타며, 또 말씨와 얼굴을 좋게 하여 이르거나 아니면 옆에 있는 사람을 끌어서 돕게 한다. 이것을 듣고 속는 자는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만약 먼저 얼굴빛을 살펴본 뒤에 그의 말을 듣고, 말과 의논을 다 듣고 나서는 피차간에 일의 기미를 참증(參證, 참고가 될만한 증거로 삼음)하면, 묻지 않았는데 스스로 떠벌인 단서가 있거나 또는 지극히 작은 단서가 잡히는 바 있거든 반복해서 힐문하라. 반드시 탄로가 나는 것이 있을 것이다.
어쩌다가 속임을 당하는 것은 족히 수치스러울 것이 없고 속임을 당하고도 속은 줄을 깨닫지 못하는 이것이 수치스러운 것이다. 한 번 속고 두 번 속고 평생토록 그 사람에게 속임을 당하는 자는 어떻게 한정(限定)하리요마는, 젊을 적부터 탐관 오리가 되어서 늙어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부귀를 누리니, 이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다.
처음 시작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이는 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전하는 자는 속임을 당하는 줄 알지 못하며, 그것을 받는 자도 또한 속임을 당하는 줄 알지 못하니, 천하에 이럴 수가 있겠는가. 오직 어긋나고 잘못된 문학일 뿐이다.(其惟差誤之文學爾)
*기(氣)를 통하지 못하고 오직 이(理)만을 말하면 흔히 기(氣)를 착오하여 물(物, 사물)을 얻음이 없고, 다만 심(心)만을 논하면 흔히 물(物)을 착오하여 고문(古文, 옛글과 문장)을 이끌어 금문(今文, 현재의 글과 문장)을 꾸밈으로써 전수(傳授,기술이나 지식 따위를 전하여 줌)하는 자료로 삼는다.
-최한기(崔漢綺1803-1879), '속임말을 듣느냐 듣지 않느냐(欺言聽否 기언청부)', 기측체의(氣測體義)/ 신기통(神氣通) 제2권/ 이통(耳通)-
▲원글출처: ⓒ 한국고전번역원 ┃ 권영대 (역) ┃ 1979
*옮긴이 주: 기측체의(氣測體義)는 신기통 3권과 추측록 6권으로 구성 되어 있다. 신기통은 인간의 감각과정 즉 인지에 대해서, 추측록은 인식에 대해 서술한다, 기측체의는 인간의 인지와 인식과정을 서술하는데, 추상적인 관념론이 아닌 과학적인 방식, 즉 철저하게 관찰과 경험론에 입각한 조선말기의 독특한 철학서다. 혜강선생의 글은 관념을 논증하는 글이 아니라 이미 경험하고 통찰된 논제를 설명하는 글이다. 해서 윗글 중에서 특히 마지막 단락의 글이 번역된 글만으로는 '기(氣)이(理)심(心)물(物)'이라는 다소 설명이 필요한 어려운 용어들때문에 선생의 저서 '기측체의'를 읽어보지 않은 이들에게 선듯 이해하기가 좀 어렵다. 그럼에도 둔한 소견에 나름 정리해보면 이렇게 이해된다. 사물이나 현상의 실재는 겉으로 보이는 바깥사정이 있고, 보이지 않는 속사정이 있기 마련이다. 겉으로 보이는 실재는 누구라도 이치를 따져 생각하거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속사정은 설령 뚜껑을 열어 들여다 본다할지라도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 이상 쉽게 알 수 없다. 그렇게 안다고 느끼는 것일 뿐 실재를 확신할 수는 없다. 다만 실재에 대면하여 풍겨나오는 기운(氣)를 통해 추측만 할 뿐이다. 이때의 기운(氣)은 개인의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혹은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누구라도 보편적으로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감각, 경험, 연상, 판단, 추리 따위의 사유 작용을 거치지 아니하고 대상을 직접적으로 파악하는 작용을 뜻하는 직관과도 또한 다르다. 기(氣)는 관념적으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실감되는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사자나 호랑이같은 맹수를 직접 눈으로 대면했을 때 무언가 압도하는 그 느낌같은 것이 바로 기(氣)다. 이렇듯 설명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실재라고 확신하고 섣불리 단정짓는 것은 고려해 볼만한 일이다. 이러한 전제를 두고 정리하면, 바깥사정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이(理)요, 드러내지 않는 속사정이 사물이나 현상을 통해 풍겨나오는 기운(氣)를 보고 추측하는 것이 심(心)이라 이해해 본다. 이 경우의 심(心)은 관념적인 것으로 직관에 가깝다. 옛글과 문장(古文)이 그렇게 쓰여진 것은 반드시 그만의 상황과 배경과 이유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럴진대 이에 대한 헤아림이 없이 여기저기서 옛글의 권위를 끌어다가 오늘의 현실에 끼어맞추고 꾸며낸 것(今文)을 전래의 지식이라 무작정 확신하고 맹신하는 것은 심히 어리석은 일이다. 옛글에 화가가 가장 그리기 쉬운 소재는 귀신과 도깨비라고 하였다. 실재하는 형상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는 까닭이다. 사람을 속이고 기만하는 현학과 곡학아세와 이단사설은 여기로부터 나온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혜강선생은 겉과 속, 실재와 관념, 추측과 편견, 직관과 이성,.. 등등 어느 한 쪽에 치우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돌이킬 수 없는 착각과 기만이 시작된다고 통찰하고 경계한다. 나는 혹은 그대는 속이는 사람인가? 속는 사람인가? 아니면 이해관계때문에 알고도 속아주는 사람인가? 잠시 생각해 볼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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